[글로벌사우스] 초국가성의 역사적 계보: 중세 한자동맹의 해양 네트워크에서 동시대 미술의 이동성까지_5

최지우
2026-06-07
조회수 185

초국가성의 역사적 계보

중세 한자동맹의 해양 네트워크에서 동시대 미술의 이동성까지

Genealogies of Transnationality: From the Maritime Networks of the Medieval Hanseatic League to Mobility in Contemporary Art


저자: 최지우 

소속: 아이테르, 객원 연구자


초록

본 연구는 한자동맹을 단순한 중세 상업 연합이 아닌 초국가적 공간성의 초기 모델로 재해석하고, 이를 동시대 미술 담론의 핵심 개념인 이동성(mobility), 네트워크(network), 초국가성(transnationality)과 연결하여 고찰한다. 일반적으로 초국가성은 세계화 이후 등장한 현상으로 이해되지만, 본 논문은 북해와 발트해를 중심으로 형성된 한자동맹이 이미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관계적 공간을 구축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를 위해 Philippe Dollinger의 한자동맹 연구와 Fernand Braudel의 해양사 이론을 바탕으로 중세 해양 네트워크의 구조를 분석하고, Allan Sekula와 Hito Steyerl의 작업을 통해 이러한 공간성이 동시대 미술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재구성되는지 살펴본다. 본 연구는 초국가성을 근대 이후의 산물로 보는 통념을 재검토하며, 바다가 역사적으로 관계와 이동, 교환의 공간으로 기능해 왔음을 밝히고자 한다.


키워드> 한자동맹, 초국가성, 해양 네트워크, 동시대 미술, 이동성, Allan Sekula, Hito Steyerl, 해양인문학


서론

오늘날 동시대 미술은 국가의 경계를 넘어 형성되는 다양한 이동과 연결의 구조를 다루고 있다. 비엔날레, 국제 전시, 글로벌 아트마켓은 더 이상 특정 국가의 문화적 산물만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작품과 작가, 자본과 담론은 복잡한 네트워크를 통해 순환한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미술사와 시각문화 연구에서는 ‘초국가성(transnationality)’이라는 개념이 널리 활용되어 왔다. 초국가성은 국민국가의 경계를 전제로 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넘어서는 이동과 관계를 의미하며, 현대 세계화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초국가성을 오직 현대적 현상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까. 세계화 이전에도 영토와 국가를 넘어서는 연결 구조는 존재하지 않았을까. 본 연구는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특히 북유럽 해양 공간에서 활동했던 한자동맹은 오늘날의 초국가적 네트워크를 역사적으로 재고할 수 있는 중요한 사례를 제공한다. 한자동맹은 특정 국가의 통치 아래 존재한 조직이 아니었으며, 항구 도시들의 연합을 통해 광범위한 교역과 정보 교환의 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는 국가 이전의 초국가성이라 부를 수 있는 독특한 공간 질서를 형성하였다.

본 논문은 한자동맹을 단순한 경제사적 사례가 아니라 관계와 이동을 기반으로 한 공간적 상상력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나아가 이러한 해양적 공간성이 Allan Sekula와 Hito Steyerl의 작업에서 어떻게 재등장하는지 분석함으로써, 중세 해양 네트워크와 동시대 미술의 초국가성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적 연속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1. 한자동맹과 국가 이전의 초국가성

한자동맹은 일반적으로 중세 북유럽의 상업 연합체로 설명된다. 그러나 Philippe Dollinger의 고전적 연구 『The German Hansa』(1964)를 살펴보면, 한자동맹의 중요성은 단순한 경제적 성공에 있지 않다. 오히려 한자동맹은 서로 다른 정치적 배경을 가진 도시들이 공통의 규범과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형성한 네트워크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자동맹에 참여한 도시들은 단일한 주권 아래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상업적 특권을 공유하고 분쟁 해결 방식을 마련하며 상호 협력 체계를 구축하였다. 이는 근대적 의미의 국민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에 이미 초지역적 공동체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이 공동체는 영토적 통합이 아니라 해양 이동성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오늘날 초국가성은 종종 국경을 초월하는 이동과 네트워크를 의미하지만, 한자동맹은 이러한 현상이 근대 이후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오히려 해양 공간은 오래전부터 국가적 경계를 상대화하며 사람과 상품, 정보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적 장으로 기능해 왔다. 따라서 한자동맹은 초국가성의 전근대적 모델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는 현대 세계화에 대한 선형적 역사관을 재검토하게 만든다.


2. 경계에서 연결로: 브로델의 해양 공간과 초국가적 네트워크 

한자동맹을 초국가성의 사례로 읽기 위해서는 먼저 바다에 대한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전통적인 역사 서술은 영토와 국경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왔다. 그러나 Fernand Braudel은 『The Mediterranean and the Mediterranean World in the Age of Philip II』(1949)에서 이러한 시각을 근본적으로 전환한다.

브로델에게 바다는 비어 있는 자연환경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과 물자, 문화가 지속적으로 이동하는 역사적 구조이며, 다양한 지역을 연결하는 관계적 공간이다. 지중해는 수많은 정치 체제를 포함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하나의 교류권을 형성하였다. 브로델은 이러한 공간을 통해 국가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역사적 리듬을 발견하고자 했다.

이러한 관점은 한자동맹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발트해와 북해 역시 단순한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도시들을 연결하는 매개체였다. 한자동맹의 성장은 영토의 확장보다 해양 네트워크의 안정성에 의존하였다. 다시 말해, 도시들은 국경을 통해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항로를 통해 존재하였다.

브로델의 해양사는 따라서 초국가성을 단순히 정치적 개념이 아니라 공간적 경험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한자동맹은 바로 이러한 해양적 공간성 속에서 형성된 공동체였으며, 이는 이후 등장하는 글로벌 네트워크의 역사적 전조로 해석될 수 있다.


3. 항로가 만든 세계, Allan Sekula와 해양 물류 네트워크의 시각화

동시대 미술에서 해양 네트워크를 가장 비판적으로 탐구한 작가 가운데 한 명은 Allan Sekula이다. 그의 대표작 <Fish Story>(1989–1995)는 약 6년에 걸쳐 제작된 대규모 사진 및 텍스트 프로젝트로, 로스앤젤레스, 로테르담, 글래스고 등 세계 주요 항만과 조선소, 선박 노동 현장을 기록한 작업이다. 작품은 100여 점의 사진과 작가의 비평적 글쓰기를 결합하여 구성되며, 세계 경제를 지탱하는 해상 물류 시스템과 항만 노동의 현실을 시각화한다. 이를 통해 세쿨라는 일반적으로 가시화되지 않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기반 구조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세쿨라가 비판하는 것은 정보화 사회에 대한 낙관적 서사이다.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이 세계를 연결한다는 담론과 달리, 그는 글로벌 경제가 여전히 해상 물류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계를 순환하는 상품들은 보이지 않는 해양 네트워크를 통해 이동하며, 항만은 자본주의의 핵심 인프라로 기능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세쿨라의 작업이 중세의 한자동맹과 구조적 유사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의 컨테이너선과 중세 상선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와 기술이 다르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네트워크의 핵심은 국가가 아니라 이동성에 있다. 상품은 영토보다 항로를 따라 움직이며, 연결성은 특정 국가의 권력보다 네트워크 자체에 의해 유지된다.

세쿨라의 작업은 따라서 바다를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에도 작동하는 역사적 공간으로 재인식하게 만든다. 특히 <Fish Story>가 보여주는 항만과 선박, 물류의 풍경은 바다를 단순한 자연환경이 아닌 관계와 교환, 이동이 집중되는 공간으로 제시한다. 이는 한자동맹의 해양적 공간성이 단절된 역사가 아니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장기 지속(longue durée)의 구조임을 시사한다.


4. 초국가적 공간의 재구성: Hito Steyerl의 『Duty Free Art』와 예술의 이동성 

Hito Steyerl은 동시대 미술이 더 이상 국가 단위의 체계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Duty Free Art』(2017)에서 그녀는 자유항, 글로벌 물류망, 금융 시스템이 오늘날 예술의 이동을 결정한다고 분석한다. 작품은 특정 국가에 귀속되기보다 네트워크를 통해 순환하며, 예술 역시 글로벌 자본주의의 흐름 속에서 존재한다.

슈타이얼의 논의가 중요한 이유는 초국가성을 단순한 문화적 교류가 아니라 공간 구조의 변화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개별 장소가 아니라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경로와 시스템이다. 이는 한자동맹의 해양 네트워크를 떠올리게 한다. 한자동맹 역시 도시 자체보다 도시들을 연결하는 항로가 중요했으며, 공동체는 고정된 영토가 아니라 이동과 교환을 통해 유지되었다.

물론 두 사례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한자동맹이 물리적 교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네트워크였다면, 슈타이얼이 분석하는 동시대 예술 공간은 물류뿐 아니라 정보와 이미지의 이동까지 포함한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공간은 더 이상 경계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오히려 공간은 흐름과 관계의 총체로 구성된다.

이러한 점에서 슈타이얼의 초국가적 예술 공간은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해양 네트워크의 역사적 계보 위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한자동맹은 그 계보의 초기 사례이며, 동시대 미술은 이를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결론

본 연구는 한자동맹을 단순한 중세 상업 조직이 아닌 국가 이전의 초국가적 네트워크로 재해석하고, 이를 동시대 미술의 이동성과 연결하여 고찰하였다. Dollinger의 연구는 한자동맹이 도시 간 관계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였음을 보여주었고, Braudel의 해양사는 바다가 경계가 아니라 연결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또한 Sekula와 Steyerl의 작업은 이러한 해양적 연결성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문화적·정치적 문제로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초국가성은 세계화 시대에 갑자기 등장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바다를 매개로 형성된 오랜 관계의 역사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한자동맹의 항로와 오늘날의 물류 네트워크, 그리고 동시대 미술의 이동 경로는 서로 다른 시대에 속해 있지만, 모두 국가의 경계를 상대화하며 새로운 공간적 질서를 형성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따라서 한자동맹은 단순한 역사적 유물이 아니라, 동시대 초국가성을 사유하기 위한 하나의 중요한 해양적 모델로 재해석될 수 있다.


참고자료 

Braudel, Fernand. The Mediterranean and the Mediterranean World in the Age of Philip II.1949

(Braudel, Fernand. La Méditerranée et le monde méditerranéen à l'époque de Philippe II. Paris: Armand Colin, 1949.)

Dollinger, Philippe. The German Hansa.1964

(Dollinger, Philippe. La Hanse. Paris: Aubier, 1964. )

Sekula, Allan. Fish Story.1989-1995

Steyerl, Hito. Duty Free Art: Art in the Age of Planetary Civil War.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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