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와 식민주의의 역사에서 아카이브는 중립적 저장소가 아니라 권력의 기술로 기능해 왔다. 무엇이 기록되고 무엇이 삭제되었는가는 정치적 판단의 결과이며, 특히 흑인 여성의 삶은 반복적으로 공백 속에 위치해 왔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사이디야 하트먼은 ‘비판적 패불레이션(critical fabulation)’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역사 서술의 윤리와 형식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한다.
비판적 패불레이션의 개념, 계보, 작동 방식
Saidiya Hartman이 제안한 ‘비판적 패불레이션(critical fabulation)’은 역사 서술의 형식적 결핍을 보완하기 위한 서사 기법이 아니라, 아카이브 자체의 폭력성과 불완전성을 전제로 삼는 비평적 방법론이다. 여기서 패불레이션은 허구를 의미하지만, 상상적 창작의 자유를 지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이 말해질 수 없는지, 어떤 지점에서 서술이 멈춰야 하는지를 드러내기 위한 제한된 상상력이다.
비판적 패불레이션은 다음의 세 가지 전제를 갖는다.
첫째, 노예제와 식민주의의 아카이브는 구조적으로 가해자의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둘째, 피해자의 삶은 기록의 결핍 상태로 남아 있으며, 그 공백은 단순한 정보 부족이 아니라 정치적 산물이다. 셋째, 이 공백을 완전히 메우려는 시도는 또 다른 재현 폭력을 야기할 수 있다.
따라서 하트먼의 서술은 사실을 복원하려 하지 않고, 사실이 남기지 못한 흔적을 사유의 대상으로 전환한다. 이 지점에서 비판적 패불레이션은 역사학과 문학, 이론과 수행성 사이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교란한다. 하트먼의 작업은 흑인 연구(Black Studies)와 포스트식민 이론의 교차점에 위치한다. 특히 그녀의 아카이브 비판은 아카이브를 ‘기억의 저장소’로 이해해 온 기존 역사학적 관점을 전복한다. 아카이브는 기억을 보존하는 장치가 아니라, 기억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제도로 기능해 왔다.
이러한 관점은 Michel Foucault의 담론 개념, Achille Mbembe의 네크로폴리틱스, Christina Sharpe의 ‘사후의 현재성(wake)’ 개념과 공명한다. 다만 하트먼의 특수성은 이론적 비판에 머무르지 않고, 서술 형식 자체를 실험의 장으로 삼는다는 점에 있다.
그녀에게 역사 쓰기는 설명의 행위가 아니라 배치의 행위다. 인과 관계를 명확히 정리하는 대신, 단절된 사건과 정동의 파편을 병치함으로써 독자가 그 사이의 긴장을 직접 감각하도록 만든다. 비판적 패불레이션은 사실과 허구의 이분법을 해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경계를 유지한 채, 경계선 위에서만 가능한 서술을 시도한다. 하트먼의 글에서 자주 등장하는 가정법, 추정, 미완의 문장은 허구의 자유를 선언하는 장치가 아니라, 말할 수 없음에 대한 지속적 표식이다.
이 방법론은 다음과 같은 전략으로 작동한다.
최소한의 사실에 대한 집요한 집착
서사적 완결성의 의도적 거부
등장인물의 내면 독백을 과잉 재현하지 않는 태도
감정의 명명 대신 정동의 흔적을 남기는 문장 구성
이를 통해 하트먼은 역사적 주체를 영웅화하거나 피해자로 고정하지 않는다. 삶은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고, 독자는 그 불완전성 속에서 윤리적 불편함을 경험한다.
최근 작업에서 비판적 패불레이션은 글쓰기를 넘어 퍼포먼스와 시청각 매체로 확장된다. Minor Music at the End of the World에서 이 방법론은 시간의 분절과 반복, 이미지의 재편집, 몸의 수행성을 통해 구현된다.
이 퍼포먼스에서 과거는 회상되지 않고 호출된다. 선형적 시간은 해체되며, 역사적 폭력은 이미 끝난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지속적으로 조직하는 조건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시간 감각은 아포칼립스 이후의 상상을 통해 더욱 급진화된다. 종말은 끝이 아니라, 기존 윤리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임계 상태로 기능한다.
비판적 패불레이션의 핵심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말하지 않기로 선택한 지점에 있다. 하트먼은 타인의 고통을 과도하게 서사화하지 않으며, 상상력이 개입하는 순간에도 그 불완전성을 독자에게 노출한다.
이는 대변의 윤리를 거부하는 태도다. 하트먼은 흑인 여성의 삶을 대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말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남긴 구조적 폭력을 독자가 인식하도록 배치한다. 이 자기제한은 그녀 작업의 미학적 특징이자 정치적 입장이다.
AJ Wilmore, Okwui Okpokwasili, Bria Bacon (L-r) in Saidiya Hartman, dir. Sarah Benson, Minor Music at the End of the World (2025). Commissioned and presented by Hartwig Art Foundation, word premiere at Internationaal Theater Amsterdam. Photo Fabian Calis.
Minor Music at the End of the World는 Saidiya Hartman의 글쓰기 방법론인 비판적 패불레이션을 공연의 시간 구조로 전환한 다층적 퍼포먼스다. 암스테르담의 인테르나치오날 테아터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단일한 서사 중심을 갖지 않는다. 대신 텍스트 낭독, 무용, 영상 투사, 사운드가 병렬적으로 배치되며, 각 요소는 서로를 설명하지 않은 채 공존한다.
이 병렬성은 작품의 핵심 형식 원리다. 관객은 의미의 종합을 요구받지 않으며, 장면 간의 간극을 해석의 여지로 경험한다. 이는 아카이브의 공백을 메우지 않고 노출하는 하트먼의 서술 윤리를 공연의 문법으로 치환한 결과다.
공연에서 텍스트는 완결된 서사로 전달되지 않는다. 하트먼의 문장은 중단되거나 반복되며, 때로는 낭독되지 않은 채 무대에 잔존한다. 이때 텍스트는 의미 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발화의 조건 자체를 문제화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가정법과 질문형 문장은 관객에게 직접적인 이해를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이 말해지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지속적으로 환기한다. 이는 Venus in Two Acts에서 드러난 서술 전략이 공연의 시간성 속으로 이식된 사례다.
무용은 인물 재현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특정 인물의 삶을 연기하기보다, 정동의 상태를 신체적 리듬으로 제시한다. 동작은 반복되거나 중단되며, 종종 목적 없는 이동처럼 보인다. 이러한 신체성은 서사적 동일시를 차단하고, 관객이 신체의 지속과 피로, 머뭇거림을 감각하도록 유도한다.
이 수행성은 흑인 신체가 역사적으로 기록되어 온 방식. 노동력, 통계, 대상에 대한 반전이다. 몸은 의미를 생산하지 않으며, 설명을 거부한 채 그 자리에 남는다. 비판적 패불레이션을 공연이라는 시간적 매체로 확장함으로써, 역사 서술의 윤리를 감각적 경험으로 변환한다. 이 작품은 설명하지 않으며, 완결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을 공백 속에 위치시킨다.
흑인 사유에서 ‘미래’는 어떻게 가능한가
Afrofuturism과 Afropessimism은 흑인 역사와 정체성을 사유하는 두 개의 강력한 이론적 축이다. 전자는 기술·상상·서사를 통해 미래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전략을 제시하고, 후자는 노예제의 구조가 현재까지 지속된다는 인식 아래 흑인 존재의 구조적 비인간화를 분석한다.
John Akomfrah | Artists | Lisson Gallery
Afrofuturism은 하나의 통일된 이론 체계라기보다, 서로 다른 실천과 사유가 공통의 문제의식 흑인 주체는 어떻게 미래를 가질 수 있는가를 둘러싸고 느슨하게 결속된 장이다. 따라서 Afrofuturism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별 인물이 제기한 인사이트가 어떤 방식으로 미래, 시간, 역사, 기술을 재배치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장 급진적인 인사이트 중 하나는 미래를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이동 가능한 장소로 전환했다는 점이다. 이 관점에서 현재는 개선되어야 할 조건이 아니라, 벗어나야 할 좌표로 이해된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다른 어딘가에 이미 존재하는 대안적 공간이다.
이 인사이트는 흑인 주체가 역사적 폭력의 연속선상에서 점진적으로 구제될 수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해방은 제도적 변화가 아니라, 인식론적 이탈을 통해 성립한다. 문제는 이 장소적 미래가 현재의 구조적 폭력을 분석하는 대신, 탈출의 은유로 대체될 위험을 내포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 인사이트는 미래를 도착점이 아니라 이미 현재 속에서 작동하는 감각 상태로 이해한다. 반복, 지연, 리듬, 소음과 같은 비선형적 감각은 과거–현재–미래의 직선적 배열을 교란한다. 이때 미래는 예측의 대상이 아니라, 현재를 다르게 감각하게 만드는 힘이다.
이 인사이트의 강점은 미래를 거대 서사로 상상하지 않고, 미시적 경험의 재조율로 끌어내린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 감각적 전복은 때로 구조적 폭력의 지속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형식적 전위에 머무를 위험를 동반한다.
하트먼은 감각을 사용하지만, 전복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녀의 텍스트와 퍼포먼스에서 감각은 불편함, 중단, 피로, 반복의 실패로 남는다. 미래적 리듬을 선취하기보다, 시간이 걸려 있는 상태를 유지한다.
Afrofuturism의 또 다른 중요한 인사이트는 미래를 발화 가능한 언어로 조직하려는 시도다. 미래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흑인 주체가 과거의 피해자 위치에 고정되지 않겠다는 정치적 선언이다. 여기서 미래 서사는 집단적 상상력의 자원이며, 자기서사의 재구성 전략이다.
이 인사이트는 대표성과 연대의 언어를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개별 삶의 불균질성과 기록되지 않은 차이를 통합해 버릴 위험을 갖는다. 미래가 공동의 이야기로 정리되는 순간, 아카이브의 공백은 서사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하트먼은 바로 이 지점을 거부한다. 그녀는 미래를 말하는 언어를 구축하지 않는다. 대신 말해지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남기는 흔적을 유지한다. 이는 침묵이 아니라, 대표성을 경계하는 윤리적 선택이다.
과거의 이미지와 현재의 감각을 재배치함으로써 시간층을 교란한다. 아카이브는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편집과 충돌을 통해 현재를 침범하는 물질로 다뤄진다. 미래는 이 충돌이 만들어내는 여백 속에서 암시된다.
이 접근은 하트먼의 작업과 가장 밀접하게 접속한다. 다만 차이는 명확하다. 이미지의 재배치가 새로운 시간 감각을 구성하는 데 초점을 둘 때, 하트먼은 그 재배치가 설명하지 못하고 남기는 잔여에 머문다. 이미지가 말하지 않는 것, 연결되지 않는 간극이 그녀 작업의 핵심이다.
Afropessimism: 구조의 지속을 사유하는 인사이트와 하트먼의 변위
Afropessimism의 핵심 인사이트는 노예제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조직하는 구조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 관점에서 흑인 존재가 경험하는 폭력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아니라, 이미 발생한 종말이 형태를 바꿔 지속되는 상태다. 해방은 연기되었거나 미완인 것이 아니라, 애초에 사회적 세계의 설계 안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급진적 진단이 여기서 형성된다. 따라서 Afropessimism은 미래를 향한 정치적 약속이나 점진적 개선의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제거하며, 진보 서사가 은폐해 온 구조적 비대칭을 노출시키는 데 집중한다.
이 인사이트는 흑인과 비흑인 사이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사유하게 만든다. 시민성, 계약, 연대와 같은 근대적 정치 개념들은 흑인성을 전제하지 않은 채 구성되어 왔으며, 그 결과 관계는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조건 위에 놓인다. Afropessimism은 이 실패를 우연이나 오해의 결과로 보지 않고, 구조적 필연으로 이해한다. 관계가 가능하다는 가정 자체가 폭력의 지속을 가리는 장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입장은 화해와 공존을 전제로 한 담론에 강력한 비판을 제기한다. 다만 이 급진성은 관계의 불가능성을 선언하는 순간, 윤리적 선택이 발생할 수 있는 미시적 영역까지 함께 봉쇄할 위험을 동반한다.
재현에 대한 회의 역시 Afropessimism의 중요한 인사이트다. 흑인 고통을 말하고 보여주는 행위는 종종 연대의 제스처로 정당화되지만, 동시에 고통을 소비 가능한 이미지와 서사로 전환해 왔다. Afropessimism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재현 자체를 문제 삼는다. 고통은 설명될수록 소진되며, 이해될수록 무력화된다는 인식은, 말하기와 보여주기의 윤리를 근본적으로 흔든다.
사이디야 하트먼의 작업은 이 세 가지 인사이트 종말의 현재성, 관계의 구조적 실패, 재현의 폭력성을 깊이 공유한다. Minor Music at the End of the World에서 종말은 가설이나 은유가 아니라 전제 조건이며, 관계는 성취되지 않은 채 긴장 상태로 유지되고, 고통은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트먼은 Afropessimism이 도달한 선언의 지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구조가 끝났다는 인식 이후에도, 무엇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남겨 둔다.
하트먼에게 중요한 것은 구조적 해결이 아니라, 구조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발생하는 윤리의 잔여다. 관계는 실패하지만, 그 실패 속에서도 책임의 감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재현은 불가능하지만, 배치와 중단, 침묵을 통해 공백을 드러내는 형식은 여전히 선택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하트먼은 Afropessimism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종결점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녀의 작업은 미래를 약속하지 않으며, 구원의 서사를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이미 닫힌 세계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사유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현재형으로 유지한다.
동시대 예술 비평과 큐레이션에 던지는 방법론적 요구
하트먼의 작업이 가장 근본적으로 흔드는 것은 비평의 전제다. 기존의 예술 비평은 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지, 사회적 맥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비판적 패불레이션에 기반한 작업은 설명을 요청하지 않는다. 오히려 설명이 개입하는 순간 발생하는 폭력을 노출한다. 기록되지 않은 삶, 말해질 수 없는 고통, 완결되지 않은 관계는 해석을 통해 구제되지 않는다. 따라서 하트먼의 작업 앞에서 비평은 의미를 생산하는 행위가 아니라, 의미 생산을 유예하는 태도로 전환될 것을 요구받는다.
이 전환은 큐레이션의 영역에서도 결정적이다. 전시는 흔히 작품을 맥락화하고, 관객의 이해를 돕는 장치로 구성된다. 그러나 하트먼의 작업 논리는 맥락화의 과잉이 오히려 작품을 소진시킬 수 있음을 경고한다. 작품이 작동하는 공백, 말해지지 않음의 층위, 감각의 중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큐레이터 역시 설명의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 이는 친절함의 거부가 아니라, 관객을 사유의 위험 속에 위치시키는 선택이다.
이러한 요구는 특히 정치적·역사적 주제를 다루는 전시에서 중요해진다. 폭력의 역사와 소수자의 경험을 다루는 작업은 종종 교육적 설명과 도덕적 합의로 수렴된다. 하트먼의 작업은 이 경로를 거부한다. 이해와 공감이 곧 윤리적 도달이라는 가정을 흔들며, 이해되지 않음 속에서도 책임이 발생할 수 있음을 제시한다. 이는 전시가 감동이나 교훈을 제공해야 한다는 기대를 재고하게 만든다.
동시에 하트먼의 방법론은 동시대 예술이 자주 요구받는 ‘대표성’의 논리를 비판적으로 비껴간다. 그녀는 흑인 여성의 삶을 대표하지 않으며, 집단적 서사를 구성하지 않는다. 이 선택은 비가시화를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성이라는 요구 자체가 또 다른 폭력일 수 있음을 드러내는 전략이다. 큐레이션과 비평은 이 지점에서 작품을 사회적 증거로 소비하는 관성을 경계해야 한다.
결국 하트먼의 작업이 던지는 가장 중요한 요청은 속도의 문제다. 빠르게 이해되고, 즉각적으로 해석되며, 명확한 입장을 제공하는 예술과 달리, 그녀의 작업은 시간을 요구한다. 멈추고, 불편해하고, 결론 없이 머무는 시간을 관객에게 강제한다. 이는 오늘날 예술 제도와 플랫폼이 요구하는 효율성과 가시성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이다.
기록되지 않은 삶을 사유하는 방법
노예제와 식민주의의 역사에서 아카이브는 중립적 저장소가 아니라 권력의 기술로 기능해 왔다. 무엇이 기록되고 무엇이 삭제되었는가는 정치적 판단의 결과이며, 특히 흑인 여성의 삶은 반복적으로 공백 속에 위치해 왔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사이디야 하트먼은 ‘비판적 패불레이션(critical fabulation)’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역사 서술의 윤리와 형식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한다.
비판적 패불레이션의 개념, 계보, 작동 방식
Saidiya Hartman이 제안한 ‘비판적 패불레이션(critical fabulation)’은 역사 서술의 형식적 결핍을 보완하기 위한 서사 기법이 아니라, 아카이브 자체의 폭력성과 불완전성을 전제로 삼는 비평적 방법론이다. 여기서 패불레이션은 허구를 의미하지만, 상상적 창작의 자유를 지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이 말해질 수 없는지, 어떤 지점에서 서술이 멈춰야 하는지를 드러내기 위한 제한된 상상력이다.
비판적 패불레이션은 다음의 세 가지 전제를 갖는다.
첫째, 노예제와 식민주의의 아카이브는 구조적으로 가해자의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둘째, 피해자의 삶은 기록의 결핍 상태로 남아 있으며, 그 공백은 단순한 정보 부족이 아니라 정치적 산물이다.
셋째, 이 공백을 완전히 메우려는 시도는 또 다른 재현 폭력을 야기할 수 있다.
따라서 하트먼의 서술은 사실을 복원하려 하지 않고, 사실이 남기지 못한 흔적을 사유의 대상으로 전환한다. 이 지점에서 비판적 패불레이션은 역사학과 문학, 이론과 수행성 사이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교란한다. 하트먼의 작업은 흑인 연구(Black Studies)와 포스트식민 이론의 교차점에 위치한다. 특히 그녀의 아카이브 비판은 아카이브를 ‘기억의 저장소’로 이해해 온 기존 역사학적 관점을 전복한다. 아카이브는 기억을 보존하는 장치가 아니라, 기억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제도로 기능해 왔다.
이러한 관점은 Michel Foucault의 담론 개념, Achille Mbembe의 네크로폴리틱스, Christina Sharpe의 ‘사후의 현재성(wake)’ 개념과 공명한다. 다만 하트먼의 특수성은 이론적 비판에 머무르지 않고, 서술 형식 자체를 실험의 장으로 삼는다는 점에 있다.
그녀에게 역사 쓰기는 설명의 행위가 아니라 배치의 행위다. 인과 관계를 명확히 정리하는 대신, 단절된 사건과 정동의 파편을 병치함으로써 독자가 그 사이의 긴장을 직접 감각하도록 만든다. 비판적 패불레이션은 사실과 허구의 이분법을 해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경계를 유지한 채, 경계선 위에서만 가능한 서술을 시도한다. 하트먼의 글에서 자주 등장하는 가정법, 추정, 미완의 문장은 허구의 자유를 선언하는 장치가 아니라, 말할 수 없음에 대한 지속적 표식이다.
이 방법론은 다음과 같은 전략으로 작동한다.
최소한의 사실에 대한 집요한 집착
서사적 완결성의 의도적 거부
등장인물의 내면 독백을 과잉 재현하지 않는 태도
감정의 명명 대신 정동의 흔적을 남기는 문장 구성
이를 통해 하트먼은 역사적 주체를 영웅화하거나 피해자로 고정하지 않는다. 삶은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고, 독자는 그 불완전성 속에서 윤리적 불편함을 경험한다.
최근 작업에서 비판적 패불레이션은 글쓰기를 넘어 퍼포먼스와 시청각 매체로 확장된다. Minor Music at the End of the World에서 이 방법론은 시간의 분절과 반복, 이미지의 재편집, 몸의 수행성을 통해 구현된다.
이 퍼포먼스에서 과거는 회상되지 않고 호출된다. 선형적 시간은 해체되며, 역사적 폭력은 이미 끝난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지속적으로 조직하는 조건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시간 감각은 아포칼립스 이후의 상상을 통해 더욱 급진화된다. 종말은 끝이 아니라, 기존 윤리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임계 상태로 기능한다.
비판적 패불레이션의 핵심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말하지 않기로 선택한 지점에 있다. 하트먼은 타인의 고통을 과도하게 서사화하지 않으며, 상상력이 개입하는 순간에도 그 불완전성을 독자에게 노출한다.
이는 대변의 윤리를 거부하는 태도다. 하트먼은 흑인 여성의 삶을 대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말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남긴 구조적 폭력을 독자가 인식하도록 배치한다. 이 자기제한은 그녀 작업의 미학적 특징이자 정치적 입장이다.
AJ Wilmore, Okwui Okpokwasili, Bria Bacon (L-r) in Saidiya Hartman, dir. Sarah Benson, Minor Music at the End of the World (2025). Commissioned and presented by Hartwig Art Foundation, word premiere at Internationaal Theater Amsterdam. Photo Fabian Calis.
Minor Music at the End of the World는 Saidiya Hartman의 글쓰기 방법론인 비판적 패불레이션을 공연의 시간 구조로 전환한 다층적 퍼포먼스다. 암스테르담의 인테르나치오날 테아터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단일한 서사 중심을 갖지 않는다. 대신 텍스트 낭독, 무용, 영상 투사, 사운드가 병렬적으로 배치되며, 각 요소는 서로를 설명하지 않은 채 공존한다.
이 병렬성은 작품의 핵심 형식 원리다. 관객은 의미의 종합을 요구받지 않으며, 장면 간의 간극을 해석의 여지로 경험한다. 이는 아카이브의 공백을 메우지 않고 노출하는 하트먼의 서술 윤리를 공연의 문법으로 치환한 결과다.
공연에서 텍스트는 완결된 서사로 전달되지 않는다. 하트먼의 문장은 중단되거나 반복되며, 때로는 낭독되지 않은 채 무대에 잔존한다. 이때 텍스트는 의미 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발화의 조건 자체를 문제화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가정법과 질문형 문장은 관객에게 직접적인 이해를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이 말해지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지속적으로 환기한다. 이는 Venus in Two Acts에서 드러난 서술 전략이 공연의 시간성 속으로 이식된 사례다.
무용은 인물 재현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특정 인물의 삶을 연기하기보다, 정동의 상태를 신체적 리듬으로 제시한다. 동작은 반복되거나 중단되며, 종종 목적 없는 이동처럼 보인다. 이러한 신체성은 서사적 동일시를 차단하고, 관객이 신체의 지속과 피로, 머뭇거림을 감각하도록 유도한다.
이 수행성은 흑인 신체가 역사적으로 기록되어 온 방식. 노동력, 통계, 대상에 대한 반전이다. 몸은 의미를 생산하지 않으며, 설명을 거부한 채 그 자리에 남는다. 비판적 패불레이션을 공연이라는 시간적 매체로 확장함으로써, 역사 서술의 윤리를 감각적 경험으로 변환한다. 이 작품은 설명하지 않으며, 완결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을 공백 속에 위치시킨다.
흑인 사유에서 ‘미래’는 어떻게 가능한가
Afrofuturism과 Afropessimism은 흑인 역사와 정체성을 사유하는 두 개의 강력한 이론적 축이다. 전자는 기술·상상·서사를 통해 미래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전략을 제시하고, 후자는 노예제의 구조가 현재까지 지속된다는 인식 아래 흑인 존재의 구조적 비인간화를 분석한다.
John Akomfrah | Artists | Lisson Gallery
Afrofuturism은 하나의 통일된 이론 체계라기보다, 서로 다른 실천과 사유가 공통의 문제의식 흑인 주체는 어떻게 미래를 가질 수 있는가를 둘러싸고 느슨하게 결속된 장이다. 따라서 Afrofuturism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별 인물이 제기한 인사이트가 어떤 방식으로 미래, 시간, 역사, 기술을 재배치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장 급진적인 인사이트 중 하나는 미래를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이동 가능한 장소로 전환했다는 점이다. 이 관점에서 현재는 개선되어야 할 조건이 아니라, 벗어나야 할 좌표로 이해된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다른 어딘가에 이미 존재하는 대안적 공간이다.
이 인사이트는 흑인 주체가 역사적 폭력의 연속선상에서 점진적으로 구제될 수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해방은 제도적 변화가 아니라, 인식론적 이탈을 통해 성립한다. 문제는 이 장소적 미래가 현재의 구조적 폭력을 분석하는 대신, 탈출의 은유로 대체될 위험을 내포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 인사이트는 미래를 도착점이 아니라 이미 현재 속에서 작동하는 감각 상태로 이해한다. 반복, 지연, 리듬, 소음과 같은 비선형적 감각은 과거–현재–미래의 직선적 배열을 교란한다. 이때 미래는 예측의 대상이 아니라, 현재를 다르게 감각하게 만드는 힘이다.
이 인사이트의 강점은 미래를 거대 서사로 상상하지 않고, 미시적 경험의 재조율로 끌어내린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 감각적 전복은 때로 구조적 폭력의 지속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형식적 전위에 머무를 위험를 동반한다.
하트먼은 감각을 사용하지만, 전복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녀의 텍스트와 퍼포먼스에서 감각은 불편함, 중단, 피로, 반복의 실패로 남는다. 미래적 리듬을 선취하기보다, 시간이 걸려 있는 상태를 유지한다.
Afrofuturism의 또 다른 중요한 인사이트는 미래를 발화 가능한 언어로 조직하려는 시도다. 미래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흑인 주체가 과거의 피해자 위치에 고정되지 않겠다는 정치적 선언이다. 여기서 미래 서사는 집단적 상상력의 자원이며, 자기서사의 재구성 전략이다.
이 인사이트는 대표성과 연대의 언어를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개별 삶의 불균질성과 기록되지 않은 차이를 통합해 버릴 위험을 갖는다. 미래가 공동의 이야기로 정리되는 순간, 아카이브의 공백은 서사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하트먼은 바로 이 지점을 거부한다. 그녀는 미래를 말하는 언어를 구축하지 않는다. 대신 말해지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남기는 흔적을 유지한다. 이는 침묵이 아니라, 대표성을 경계하는 윤리적 선택이다.
과거의 이미지와 현재의 감각을 재배치함으로써 시간층을 교란한다. 아카이브는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편집과 충돌을 통해 현재를 침범하는 물질로 다뤄진다. 미래는 이 충돌이 만들어내는 여백 속에서 암시된다.
이 접근은 하트먼의 작업과 가장 밀접하게 접속한다. 다만 차이는 명확하다. 이미지의 재배치가 새로운 시간 감각을 구성하는 데 초점을 둘 때, 하트먼은 그 재배치가 설명하지 못하고 남기는 잔여에 머문다. 이미지가 말하지 않는 것, 연결되지 않는 간극이 그녀 작업의 핵심이다.
Afropessimism: 구조의 지속을 사유하는 인사이트와 하트먼의 변위
Afropessimism의 핵심 인사이트는 노예제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조직하는 구조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 관점에서 흑인 존재가 경험하는 폭력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아니라, 이미 발생한 종말이 형태를 바꿔 지속되는 상태다. 해방은 연기되었거나 미완인 것이 아니라, 애초에 사회적 세계의 설계 안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급진적 진단이 여기서 형성된다. 따라서 Afropessimism은 미래를 향한 정치적 약속이나 점진적 개선의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제거하며, 진보 서사가 은폐해 온 구조적 비대칭을 노출시키는 데 집중한다.
이 인사이트는 흑인과 비흑인 사이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사유하게 만든다. 시민성, 계약, 연대와 같은 근대적 정치 개념들은 흑인성을 전제하지 않은 채 구성되어 왔으며, 그 결과 관계는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조건 위에 놓인다. Afropessimism은 이 실패를 우연이나 오해의 결과로 보지 않고, 구조적 필연으로 이해한다. 관계가 가능하다는 가정 자체가 폭력의 지속을 가리는 장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입장은 화해와 공존을 전제로 한 담론에 강력한 비판을 제기한다. 다만 이 급진성은 관계의 불가능성을 선언하는 순간, 윤리적 선택이 발생할 수 있는 미시적 영역까지 함께 봉쇄할 위험을 동반한다.
재현에 대한 회의 역시 Afropessimism의 중요한 인사이트다. 흑인 고통을 말하고 보여주는 행위는 종종 연대의 제스처로 정당화되지만, 동시에 고통을 소비 가능한 이미지와 서사로 전환해 왔다. Afropessimism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재현 자체를 문제 삼는다. 고통은 설명될수록 소진되며, 이해될수록 무력화된다는 인식은, 말하기와 보여주기의 윤리를 근본적으로 흔든다.
사이디야 하트먼의 작업은 이 세 가지 인사이트 종말의 현재성, 관계의 구조적 실패, 재현의 폭력성을 깊이 공유한다. Minor Music at the End of the World에서 종말은 가설이나 은유가 아니라 전제 조건이며, 관계는 성취되지 않은 채 긴장 상태로 유지되고, 고통은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트먼은 Afropessimism이 도달한 선언의 지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구조가 끝났다는 인식 이후에도, 무엇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남겨 둔다.
하트먼에게 중요한 것은 구조적 해결이 아니라, 구조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발생하는 윤리의 잔여다. 관계는 실패하지만, 그 실패 속에서도 책임의 감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재현은 불가능하지만, 배치와 중단, 침묵을 통해 공백을 드러내는 형식은 여전히 선택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하트먼은 Afropessimism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종결점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녀의 작업은 미래를 약속하지 않으며, 구원의 서사를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이미 닫힌 세계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사유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현재형으로 유지한다.
동시대 예술 비평과 큐레이션에 던지는 방법론적 요구
하트먼의 작업이 가장 근본적으로 흔드는 것은 비평의 전제다. 기존의 예술 비평은 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지, 사회적 맥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비판적 패불레이션에 기반한 작업은 설명을 요청하지 않는다. 오히려 설명이 개입하는 순간 발생하는 폭력을 노출한다. 기록되지 않은 삶, 말해질 수 없는 고통, 완결되지 않은 관계는 해석을 통해 구제되지 않는다. 따라서 하트먼의 작업 앞에서 비평은 의미를 생산하는 행위가 아니라, 의미 생산을 유예하는 태도로 전환될 것을 요구받는다.
이 전환은 큐레이션의 영역에서도 결정적이다. 전시는 흔히 작품을 맥락화하고, 관객의 이해를 돕는 장치로 구성된다. 그러나 하트먼의 작업 논리는 맥락화의 과잉이 오히려 작품을 소진시킬 수 있음을 경고한다. 작품이 작동하는 공백, 말해지지 않음의 층위, 감각의 중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큐레이터 역시 설명의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 이는 친절함의 거부가 아니라, 관객을 사유의 위험 속에 위치시키는 선택이다.
이러한 요구는 특히 정치적·역사적 주제를 다루는 전시에서 중요해진다. 폭력의 역사와 소수자의 경험을 다루는 작업은 종종 교육적 설명과 도덕적 합의로 수렴된다. 하트먼의 작업은 이 경로를 거부한다. 이해와 공감이 곧 윤리적 도달이라는 가정을 흔들며, 이해되지 않음 속에서도 책임이 발생할 수 있음을 제시한다. 이는 전시가 감동이나 교훈을 제공해야 한다는 기대를 재고하게 만든다.
동시에 하트먼의 방법론은 동시대 예술이 자주 요구받는 ‘대표성’의 논리를 비판적으로 비껴간다. 그녀는 흑인 여성의 삶을 대표하지 않으며, 집단적 서사를 구성하지 않는다. 이 선택은 비가시화를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성이라는 요구 자체가 또 다른 폭력일 수 있음을 드러내는 전략이다. 큐레이션과 비평은 이 지점에서 작품을 사회적 증거로 소비하는 관성을 경계해야 한다.
결국 하트먼의 작업이 던지는 가장 중요한 요청은 속도의 문제다. 빠르게 이해되고, 즉각적으로 해석되며, 명확한 입장을 제공하는 예술과 달리, 그녀의 작업은 시간을 요구한다. 멈추고, 불편해하고, 결론 없이 머무는 시간을 관객에게 강제한다. 이는 오늘날 예술 제도와 플랫폼이 요구하는 효율성과 가시성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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