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의 액체적 미학:
John Akomfrah의 <Vertigo Sea>와 제14회 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를 중심으로
Fluid Memory and the Liquid Aesthetics of Trauma: John Akomfrah's Vertigo Sea and the 14th Gwangju Biennale soft and weak like water
저자: 최지우
소속: 아이테르, 객원 연구자
초록
본 연구는 현대미술에서 물과 바다가 집단적 트라우마를 기억하는 방식을 ‘액체적 미학(liquid aesthetics)’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트라우마는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도 반복적으로 귀환하며 사회적 기억을 구성하는 경험이다. 이러한 기억은 고정된 형태로 보존되기보다 이동하고 변형되며 새로운 관계 속에서 재구성된다. 본 연구는 John Akomfrah의 Vertigo Sea(2015), Shahana Rajani의 Four Acts of Recovery(2023), 그리고 제14회 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2023)를 중심으로 물이 트라우마 기억을 매개하는 방식을 분석한다. Marianne Hirsch의 포스트메모리(Postmemory), Christina Sharpe의 wake 개념, Astrida Neimanis의 수체성(hydrofeminism) 논의를 이론적 토대로 삼아, 물이 단순한 자연적 배경이 아니라 기억의 이동과 순환, 복원과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적 매체임을 논의한다. 본 연구는 세 사례를 통해 현대미술에 나타난 트라우마의 액체적 미학이 상실된 기억의 귀환, 공동체 기억의 복원, 그리고 미래지향적 회복의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 키워드 : 트라우마, 액체적 미학, 기억, 유동성, 포스트메모리, 해양인문학, John Akomfrah, Shahana Rajani, 광주비엔날레
서론
트라우마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기억의 형식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특히 노예제, 식민주의, 전쟁, 국가 폭력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사회적 기억을 구성한다. 이러한 집단적 트라우마는 사건이 종료된 이후에도 다양한 문화적 재현을 통해 반복적으로 소환되며, 새로운 세대에 의해 재해석된다. 따라서 트라우마는 더 이상 특정 개인의 심리적 상처에 국한되지 않고 공동체 전체가 공유하는 기억의 문제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트라우마는 일반적인 역사적 사건과 달리 완결된 서사로 정리되기 어렵다. 트라우마 기억은 종종 단편적인 이미지, 감각, 정동(affect)의 형태로 나타나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반복적으로 귀환하는 특성을 가진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미술은 기념비나 역사 기록과 같은 전통적 재현 방식 대신 보다 유동적이고 비선형적인 형식을 통해 트라우마를 시각화해 왔다. 특히 물과 바다는 기억의 지속성과 불안정성을 동시에 드러낼 수 있는 매개체로서 빈번하게 활용된다.
물은 고정된 형태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흐르고 순환하며 서로 다른 공간을 연결한다. 동시에 물은 흔적을 지우면서도 새로운 흔적을 남기고, 과거를 묻어버리는 동시에 과거의 잔존물을 현재로 떠올리기도 한다. 이러한 양가적 특성은 트라우마 기억의 작동 방식과 깊은 유사성을 보인다. 트라우마 역시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면서도 동일한 형태로 보존되지 않으며, 반복과 변형을 통해 현재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John Akomfrah의 Vertigo Sea(2015), Shahana Rajani의 Four Acts of Recovery(2023), 그리고 제14회 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2023)를 중심으로 현대미술에 나타난 트라우마의 액체적 미학을 분석하고자 한다. 세 사례는 서로 다른 역사적·지리적 맥락에 위치하지만, 모두 물을 통해 기억을 사유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본 논문은 이들 사례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물이 단순한 자연적 배경이나 상징을 넘어 기억의 유동성을 드러내는 미학적 장치로 기능한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유동하는 기억과 액체적 미학
기억 연구는 오랫동안 과거를 보존하는 방식에 주목해 왔다. 기념비와 박물관, 국가 아카이브는 기억을 저장하고 유지하기 위한 대표적 장치로 기능해 왔다. 그러나 최근 기억 연구는 기억을 고정된 결과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기억은 특정 장소에 보존된 채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문화적 재현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며 변화한다.
Marianne Hirsch가 제시한 포스트메모리 개념은 이러한 변화된 기억 이해를 잘 보여준다. 허쉬에 따르면 기억은 직접 경험한 세대에만 속하지 않는다. 후속 세대는 사진, 이야기, 문화적 재현을 통해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사건을 자신의 기억처럼 내면화한다. 따라서 기억은 과거의 보존이 아니라 현재의 재구성 과정이다.
Christina Sharpe는 『In the Wake』에서 대서양 노예무역의 역사가 여전히 현재를 규정하는 구조적 현실이라고 주장한다. 그녀가 사용하는 wake라는 개념은 배가 지나간 뒤 남는 물결이자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는 여파를 의미한다. 이는 기억이 선형적으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파도처럼 반복적으로 귀환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편 Astrida Neimanis는 『Bodies of Water』에서 인간을 물을 통해 서로 연결된 존재로 이해한다. 그녀는 물이 신체와 환경,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매개체라고 설명하며, 기억 또한 고립된 개인의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과정이라고 본다.
본 연구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유동하는 기억(fluid memory)’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유동하는 기억이란 고정된 형태로 보존되는 기억이 아니라 이동과 반복, 변형을 통해 현재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구성되는 기억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을 시각화하는 예술적 전략이 바로 ‘트라우마의 액체적 미학’이다.
상실된 기억의 귀환: John Akomfrah의 <Vertigo Sea>(2015)
John Akomfrah의 Vertigo Sea는 노예무역, 강제 이주, 난민 문제, 포경 산업, 생태 위기를 병치하는 다채널 영상 설치 작품이다. 작품은 특정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 다른 시공간의 이미지들을 병렬적으로 배치함으로써 관객이 기억의 파편들을 연결하도록 만든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다이다. 대서양은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 노예가 강제로 이동했던 경로이자 수많은 죽음이 발생한 장소였다. 그러나 그들의 흔적은 대부분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이처럼 바다는 기억을 보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러한 부재를 통해 오히려 폭력의 역사를 환기한다. 아콤프라의 바다는 전통적인 의미의 아카이브와 다르다. 문서나 기록을 보존하는 장소가 아니라, 사라진 존재들의 흔적이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공간이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파도와 수면의 이미지는 트라우마 기억의 귀환 구조를 시각화한다. 관객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눈앞에 보이지 않는 역사적 죽음과 마주하게 된다.
따라서 Vertigo Sea에서 물은 기억의 저장소라기보다 기억을 현재로 소환하는 매개체이다. 바다는 망각의 공간이 아니라 부재를 통해 기억을 지속시키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크리스티나 샤프는 『In the Wake』에서 노예무역의 역사가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가 사용하는 ‘wake’는 배가 지나간 흔적, 장례의 밤샘, 그리고 죽음 이후의 여파를 동시에 의미한다. 이러한 개념은 Vertigo Sea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작품 속 바다는 과거의 사건이 끝난 공간이 아니라 여전히 기억의 파장을 생성하는 장소로 제시된다. 따라서 아콤프라의 바다는 기억을 보존하는 공간이라기보다 기억이 반복적으로 귀환하는 공간이며, 이는 트라우마의 유동적 시간성을 보여준다.
기억의 복원: Shahana Rajani의 <Four Acts of Recovery>(2023)
Shahana Rajani의 <Four Acts of Recovery>(2025) 는 파키스탄 인더스 델타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이 지역은 환경 파괴와 국가 주도의 개발 정책,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급격한 변화를 겪어 왔다. 작품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사라져가는 공동체의 기억을 기록하고 복원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Rajani에게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기억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증언과 지도 제작, 드로잉과 같은 실천을 통해 새롭게 생성된다. 따라서 작품은 기억을 하나의 능동적 과정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물은 양면적인 의미를 갖는다. 한편으로 물은 공동체의 삶을 변화시키고 상실을 초래하는 원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물은 흩어진 기억들을 연결하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물의 흐름을 따라 과거의 장소를 기억하고 공동체의 역사를 다시 구성한다. <Four Acts of Recovery>는 기억이 단순히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실천을 통해 복원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유동하는 기억이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공동체적 행위 속에서 재구성되는 과정임을 시사한다.
기억의 회복과 확장: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제14회 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는 물을 공존과 연결, 회복의 은유로 제시한다. 광주는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집단적 트라우마를 간직한 도시이다. 광주비엔날레는 이러한 역사적 기억 위에서 출발했지만, 이번 전시는 과거의 폭력을 재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이후의 삶을 탐색한다.
전시에서 물은 경계를 초월하고 서로 다른 존재들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등장한다. 물은 끊임없이 이동하며 고정된 정체성을 해체한다. 이러한 특성은 기억 역시 하나의 고정된 서사가 아니라 다양한 관계 속에서 새롭게 구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전시는 물을 통해 공동체적 회복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기억은 더 이상 상실의 기록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향해 확장된다. 물은 과거의 상처를 지우지 않지만, 그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관계의 방식을 상상하게 만든다. 따라서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에서 물은 회복의 상징이자 기억을 미래로 연결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트라우마의 액체적 미학
세 사례는 서로 다른 역사적 맥락을 다루지만 모두 물을 통해 기억을 재현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Vertigo Sea에서 물은 상실된 기억을 현재로 귀환시키는 역할을 하며, Four Acts of Recovery에서는 공동체 기억을 복원하는 실천의 장으로 나타난다. 반면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에서는 기억이 미래의 관계와 회복으로 확장된다.
이러한 차이는 곧 기억의 서로 다른 국면을 보여준다. 즉 상실된 기억의 귀환, 기억의 복원, 기억의 회복이라는 단계적 흐름이다. 세 사례는 물이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기억을 이동시키고 변화시키는 매개체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액체적 미학이란 단순히 물을 소재로 한 예술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억을 고정된 기록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관계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는 미학적 관점이다. 현대미술은 물의 이미지를 통해 트라우마를 과거에 묶어두지 않고 현재와 미래 속에서 계속 생성되는 기억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결론
본 연구는 John Akomfrah의 <Vertigo Sea>, Shahana Rajani의 <Four Acts of Recovery>, 그리고 제14회 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를 중심으로 현대미술에 나타난 트라우마의 액체적 미학을 분석하였다. 세 사례는 각각 상실, 복원, 회복이라는 기억의 서로 다른 양상을 보여주며, 물이 기억의 유동성과 지속성을 드러내는 핵심 매개체로 기능함을 보여준다.
결국 물은 단순한 자연적 요소가 아니라 기억을 이동시키고 연결하며 재구성하는 관계적 공간이다. 현대미술은 이러한 물의 특성을 통해 트라우마를 고정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의미를 생성하는 과정으로 제시한다. 따라서 액체적 미학은 현대사회에서 기억과 트라우마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예술적·이론적 틀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Hirsch, Marianne. The Generation of Postmemory: Writing and Visual Culture After the Holocaust.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2.
Mentz, Steve. An Introduction to the Blue Humanities. London: Routledge, 2023.
Rothberg, Michael. Multidirectional Memory: Remembering the Holocaust in the Age of Decolonization.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9.
Sharpe, Christina. In the Wake: On Blackness and Being.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6.
John Akomfrah.<Vertigo Sea>. 2015.
Shahana Rajani. <Four Acts of Recovery>.2023
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Soft and Weak Like Water).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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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의 액체적 미학:
John Akomfrah의 <Vertigo Sea>와 제14회 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를 중심으로
Fluid Memory and the Liquid Aesthetics of Trauma: John Akomfrah's Vertigo Sea and the 14th Gwangju Biennale soft and weak like water
저자: 최지우
소속: 아이테르, 객원 연구자
초록
본 연구는 현대미술에서 물과 바다가 집단적 트라우마를 기억하는 방식을 ‘액체적 미학(liquid aesthetics)’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트라우마는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도 반복적으로 귀환하며 사회적 기억을 구성하는 경험이다. 이러한 기억은 고정된 형태로 보존되기보다 이동하고 변형되며 새로운 관계 속에서 재구성된다. 본 연구는 John Akomfrah의 Vertigo Sea(2015), Shahana Rajani의 Four Acts of Recovery(2023), 그리고 제14회 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2023)를 중심으로 물이 트라우마 기억을 매개하는 방식을 분석한다. Marianne Hirsch의 포스트메모리(Postmemory), Christina Sharpe의 wake 개념, Astrida Neimanis의 수체성(hydrofeminism) 논의를 이론적 토대로 삼아, 물이 단순한 자연적 배경이 아니라 기억의 이동과 순환, 복원과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적 매체임을 논의한다. 본 연구는 세 사례를 통해 현대미술에 나타난 트라우마의 액체적 미학이 상실된 기억의 귀환, 공동체 기억의 복원, 그리고 미래지향적 회복의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 키워드 : 트라우마, 액체적 미학, 기억, 유동성, 포스트메모리, 해양인문학, John Akomfrah, Shahana Rajani, 광주비엔날레
서론
트라우마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기억의 형식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특히 노예제, 식민주의, 전쟁, 국가 폭력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사회적 기억을 구성한다. 이러한 집단적 트라우마는 사건이 종료된 이후에도 다양한 문화적 재현을 통해 반복적으로 소환되며, 새로운 세대에 의해 재해석된다. 따라서 트라우마는 더 이상 특정 개인의 심리적 상처에 국한되지 않고 공동체 전체가 공유하는 기억의 문제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트라우마는 일반적인 역사적 사건과 달리 완결된 서사로 정리되기 어렵다. 트라우마 기억은 종종 단편적인 이미지, 감각, 정동(affect)의 형태로 나타나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반복적으로 귀환하는 특성을 가진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미술은 기념비나 역사 기록과 같은 전통적 재현 방식 대신 보다 유동적이고 비선형적인 형식을 통해 트라우마를 시각화해 왔다. 특히 물과 바다는 기억의 지속성과 불안정성을 동시에 드러낼 수 있는 매개체로서 빈번하게 활용된다.
물은 고정된 형태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흐르고 순환하며 서로 다른 공간을 연결한다. 동시에 물은 흔적을 지우면서도 새로운 흔적을 남기고, 과거를 묻어버리는 동시에 과거의 잔존물을 현재로 떠올리기도 한다. 이러한 양가적 특성은 트라우마 기억의 작동 방식과 깊은 유사성을 보인다. 트라우마 역시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면서도 동일한 형태로 보존되지 않으며, 반복과 변형을 통해 현재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John Akomfrah의 Vertigo Sea(2015), Shahana Rajani의 Four Acts of Recovery(2023), 그리고 제14회 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2023)를 중심으로 현대미술에 나타난 트라우마의 액체적 미학을 분석하고자 한다. 세 사례는 서로 다른 역사적·지리적 맥락에 위치하지만, 모두 물을 통해 기억을 사유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본 논문은 이들 사례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물이 단순한 자연적 배경이나 상징을 넘어 기억의 유동성을 드러내는 미학적 장치로 기능한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유동하는 기억과 액체적 미학
기억 연구는 오랫동안 과거를 보존하는 방식에 주목해 왔다. 기념비와 박물관, 국가 아카이브는 기억을 저장하고 유지하기 위한 대표적 장치로 기능해 왔다. 그러나 최근 기억 연구는 기억을 고정된 결과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기억은 특정 장소에 보존된 채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문화적 재현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며 변화한다.
Marianne Hirsch가 제시한 포스트메모리 개념은 이러한 변화된 기억 이해를 잘 보여준다. 허쉬에 따르면 기억은 직접 경험한 세대에만 속하지 않는다. 후속 세대는 사진, 이야기, 문화적 재현을 통해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사건을 자신의 기억처럼 내면화한다. 따라서 기억은 과거의 보존이 아니라 현재의 재구성 과정이다.
Christina Sharpe는 『In the Wake』에서 대서양 노예무역의 역사가 여전히 현재를 규정하는 구조적 현실이라고 주장한다. 그녀가 사용하는 wake라는 개념은 배가 지나간 뒤 남는 물결이자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는 여파를 의미한다. 이는 기억이 선형적으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파도처럼 반복적으로 귀환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편 Astrida Neimanis는 『Bodies of Water』에서 인간을 물을 통해 서로 연결된 존재로 이해한다. 그녀는 물이 신체와 환경,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매개체라고 설명하며, 기억 또한 고립된 개인의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과정이라고 본다.
본 연구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유동하는 기억(fluid memory)’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유동하는 기억이란 고정된 형태로 보존되는 기억이 아니라 이동과 반복, 변형을 통해 현재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구성되는 기억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을 시각화하는 예술적 전략이 바로 ‘트라우마의 액체적 미학’이다.
상실된 기억의 귀환: John Akomfrah의 <Vertigo Sea>(2015)
John Akomfrah의 Vertigo Sea는 노예무역, 강제 이주, 난민 문제, 포경 산업, 생태 위기를 병치하는 다채널 영상 설치 작품이다. 작품은 특정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 다른 시공간의 이미지들을 병렬적으로 배치함으로써 관객이 기억의 파편들을 연결하도록 만든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다이다. 대서양은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 노예가 강제로 이동했던 경로이자 수많은 죽음이 발생한 장소였다. 그러나 그들의 흔적은 대부분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이처럼 바다는 기억을 보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러한 부재를 통해 오히려 폭력의 역사를 환기한다. 아콤프라의 바다는 전통적인 의미의 아카이브와 다르다. 문서나 기록을 보존하는 장소가 아니라, 사라진 존재들의 흔적이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공간이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파도와 수면의 이미지는 트라우마 기억의 귀환 구조를 시각화한다. 관객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눈앞에 보이지 않는 역사적 죽음과 마주하게 된다.
따라서 Vertigo Sea에서 물은 기억의 저장소라기보다 기억을 현재로 소환하는 매개체이다. 바다는 망각의 공간이 아니라 부재를 통해 기억을 지속시키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크리스티나 샤프는 『In the Wake』에서 노예무역의 역사가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가 사용하는 ‘wake’는 배가 지나간 흔적, 장례의 밤샘, 그리고 죽음 이후의 여파를 동시에 의미한다. 이러한 개념은 Vertigo Sea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작품 속 바다는 과거의 사건이 끝난 공간이 아니라 여전히 기억의 파장을 생성하는 장소로 제시된다. 따라서 아콤프라의 바다는 기억을 보존하는 공간이라기보다 기억이 반복적으로 귀환하는 공간이며, 이는 트라우마의 유동적 시간성을 보여준다.
기억의 복원: Shahana Rajani의 <Four Acts of Recovery>(2023)
Shahana Rajani의 <Four Acts of Recovery>(2025) 는 파키스탄 인더스 델타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이 지역은 환경 파괴와 국가 주도의 개발 정책,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급격한 변화를 겪어 왔다. 작품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사라져가는 공동체의 기억을 기록하고 복원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Rajani에게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기억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증언과 지도 제작, 드로잉과 같은 실천을 통해 새롭게 생성된다. 따라서 작품은 기억을 하나의 능동적 과정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물은 양면적인 의미를 갖는다. 한편으로 물은 공동체의 삶을 변화시키고 상실을 초래하는 원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물은 흩어진 기억들을 연결하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물의 흐름을 따라 과거의 장소를 기억하고 공동체의 역사를 다시 구성한다. <Four Acts of Recovery>는 기억이 단순히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실천을 통해 복원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유동하는 기억이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공동체적 행위 속에서 재구성되는 과정임을 시사한다.
기억의 회복과 확장: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제14회 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는 물을 공존과 연결, 회복의 은유로 제시한다. 광주는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집단적 트라우마를 간직한 도시이다. 광주비엔날레는 이러한 역사적 기억 위에서 출발했지만, 이번 전시는 과거의 폭력을 재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이후의 삶을 탐색한다.
전시에서 물은 경계를 초월하고 서로 다른 존재들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등장한다. 물은 끊임없이 이동하며 고정된 정체성을 해체한다. 이러한 특성은 기억 역시 하나의 고정된 서사가 아니라 다양한 관계 속에서 새롭게 구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전시는 물을 통해 공동체적 회복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기억은 더 이상 상실의 기록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향해 확장된다. 물은 과거의 상처를 지우지 않지만, 그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관계의 방식을 상상하게 만든다. 따라서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에서 물은 회복의 상징이자 기억을 미래로 연결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트라우마의 액체적 미학
세 사례는 서로 다른 역사적 맥락을 다루지만 모두 물을 통해 기억을 재현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Vertigo Sea에서 물은 상실된 기억을 현재로 귀환시키는 역할을 하며, Four Acts of Recovery에서는 공동체 기억을 복원하는 실천의 장으로 나타난다. 반면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에서는 기억이 미래의 관계와 회복으로 확장된다.
이러한 차이는 곧 기억의 서로 다른 국면을 보여준다. 즉 상실된 기억의 귀환, 기억의 복원, 기억의 회복이라는 단계적 흐름이다. 세 사례는 물이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기억을 이동시키고 변화시키는 매개체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액체적 미학이란 단순히 물을 소재로 한 예술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억을 고정된 기록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관계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는 미학적 관점이다. 현대미술은 물의 이미지를 통해 트라우마를 과거에 묶어두지 않고 현재와 미래 속에서 계속 생성되는 기억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결론
본 연구는 John Akomfrah의 <Vertigo Sea>, Shahana Rajani의 <Four Acts of Recovery>, 그리고 제14회 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를 중심으로 현대미술에 나타난 트라우마의 액체적 미학을 분석하였다. 세 사례는 각각 상실, 복원, 회복이라는 기억의 서로 다른 양상을 보여주며, 물이 기억의 유동성과 지속성을 드러내는 핵심 매개체로 기능함을 보여준다.
결국 물은 단순한 자연적 요소가 아니라 기억을 이동시키고 연결하며 재구성하는 관계적 공간이다. 현대미술은 이러한 물의 특성을 통해 트라우마를 고정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의미를 생성하는 과정으로 제시한다. 따라서 액체적 미학은 현대사회에서 기억과 트라우마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예술적·이론적 틀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Hirsch, Marianne. The Generation of Postmemory: Writing and Visual Culture After the Holocaust.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2.
Mentz, Steve. An Introduction to the Blue Humanities. London: Routledge, 2023.
Rothberg, Michael. Multidirectional Memory: Remembering the Holocaust in the Age of Decolonization.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9.
Sharpe, Christina. In the Wake: On Blackness and Being.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6.
John Akomfrah.<Vertigo Sea>. 2015.
Shahana Rajani. <Four Acts of Recovery>.2023
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Soft and Weak Like Water). 2023.
문화예술기획 : https://aither.imweb.me/Directing_service
전시용 가벽 렌탈 : https://aither.imweb.me/Home/?idx=168383314&bmode=view
AITHER
DIRECTOR. GONG MYEONGSEONG.
ADDRESS. (48737) 21, BEOMIL-RO 65BEON-GIL, DONG-GU, BUSAN, REPUBLIC OF KOREA.
PARKING : Jin Market public parking lot
4F EXHIBITION.
5F LOUNGE.
6F WAREHOUSE.
ONLINE CS. MON TO SAT 10:00-18:00.
CONTACT. 051-977-5272 | SCK02145@NAVER.COM | https://aither.kr/
INSTA. @aither.kr | YOUTUBE. [www.youtube.com/@AITHERART](http://www.youtube.com/@AITHERART)
FAX. 0504-322-2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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