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테르 예술연구] 사라진 중국관, 남겨진 압력 - 광주비엔날레에서 작동한 검열의 방식

리자공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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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중국관, 남겨진 압력
— 광주비엔날레에서 작동한 검열의 방식


공명성 예술감독




검열은 언제나 삭제된 작품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작품을 벽에서 떼어내거나, 특정 문장을 지우거나, 전시를 폐쇄하거나, 국가기관이 금지 명령을 내리는 장면만을 검열이라고 생각한다면 오늘날 국제문화정치에서 작동하는 훨씬 더 복잡한 통제의 방식을 놓치게 된다. 때로 검열은 직접적인 금지보다 관계의 철회로 나타나고, 명령보다 손실의 가능성으로 전달되며, 무엇을 하지 말라고 말하기보다 특정한 선택을 했을 때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제16회 광주비엔날레를 앞두고 벌어진 ‘대만 파빌리온’ 명칭 논란과 중국 파빌리온의 철수는 바로 이러한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광주비엔날레재단은 국립대만미술관과의 파빌리온 사업 과정에서 ‘Taiwan Pavilion’이라는 명칭을 미술관의 영문 약칭인 ‘NTMoFA’로 변경했고, 대만 측과 국내외 문화예술계에서 이에 대한 반발이 이어진 뒤 지난 8월 25일 다시 ‘대만 파빌리온’ 명칭 사용을 승인했다. 이후 중국 측 전시팀은 작품 설치를 중단했고 9월 3일 공식적으로 전시 철수를 선언했다. 중국 전시팀은 광주비엔날레가 대만 측의 명칭 사용을 허용한 것을 비판하며 철수를 결정했다고 밝혔고, 주한 중국대사관에 이어 중국 외교부 역시 해당 명칭에 공식적으로 반발하면서 한국 측에 ‘하나의 중국’ 원칙을 실제 행동으로 이행할 것을 요구했다. 한국 외교부는 이에 대해 해당 결정은 문화예술 영역에서 민간이 자체적으로 판단한 것으로 한국 정부의 대만 정책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기까지가 현재 공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의 대략적인 구조다. 따라서 중국 정부가 중국 작가들에게 직접 철수를 명령했다고 단정할 근거가 확인된 것은 아니며, 한국 정부가 광주비엔날레에 명칭 변경을 요구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검열을 논하기 위해 반드시 그러한 명령서가 발견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번 사건이 던지는 더 중요한 질문은 다른 곳에 있다. 하나의 문화기관이 특정 명칭을 선택했을 때 그 선택의 결과로 거대한 국가의 문화적 참여가 철회되고, 대사관과 외교부의 공식적인 항의가 뒤따르며, 문제가 양국 외교관계의 언어로 번역되는 장면을 국제미술계 전체가 목격하게 되었을 때, 그 장면은 앞으로 다른 문화기관들의 판단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 검열의 문제는 바로 그 다음 전시에서 시작된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중국관이 사라졌다는 사실 자체보다 중국관이 사라지는 모습을 모두가 보았다는 사실이다. 한 번의 철수는 한 번의 전시를 없애는 것으로 끝날 수 있지만, 그 철수가 충분히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로 인식될 경우 그것은 이후 수많은 전시의 의사결정 과정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중국과 지속적으로 교류해야 하는 미술관, 비엔날레, 대학, 연구기관, 갤러리, 큐레이터가 앞으로 중국과 대만의 문화기관을 동시에 초청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들은 더 이상 참가자 명칭을 단순한 디자인이나 행정상의 문제로만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Taiwan’이라는 단어를 공식 홍보물에 사용할 경우 중국 측 참여가 철회될 가능성은 없는가, 중국 기관과 예정된 협력사업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까, 중국 작가들의 출품이나 후원이 중단될 가능성은 없는가, 대사관이나 외교당국이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을까, 지자체와 정부기관이 외교적 부담을 이유로 우려를 나타내지는 않을까 하는 계산이 큐레토리얼 판단보다 먼저 작동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질문들을 누군가 반드시 직접 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관은 위험을 학습한다. 한 번의 충돌을 목격하면 다음번에는 충돌이 발생하기 전에 스스로 선택지를 줄인다. 어떤 이름을 지우라는 공문이 오기도 전에 이름을 축약하고, 누군가를 초청하지 말라는 요구를 받기도 전에 초청 명단에서 제외하고, 작품을 철거하라는 명령을 받기도 전에 ‘불필요한 논란’을 이유로 작품을 선택하지 않는다. 정치학과 법학에서 표현의 자유를 논할 때 사용하는 ‘위축효과(chilling effect)’라는 개념이 문화예술의 영역에서도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권력이 모든 사람에게 일일이 침묵을 명령할 필요는 없다. 특정한 표현이 상당한 비용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사실만 충분히 각인시키면, 사람들은 그 비용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표현의 범위를 조정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기검열은 외부 검열보다 효율적일 수도 있다. 명령한 사람이 없으므로 책임자를 찾기 어렵고, 삭제된 문서가 없으므로 검열을 입증하기 어렵고, 최종적인 결정은 언제나 기관 내부의 ‘자율적인 판단’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광주비엔날레의 사태를 단순히 중국과 대만 사이의 외교적 갈등이 한국의 국제미술행사로 옮겨온 사건 정도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국제미술계가 국가권력과 거대한 문화시장의 압력 앞에서 어떻게 자신의 언어를 결정하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특히 여기서 ‘명칭’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현대미술은 오랫동안 누가 누구를 호명할 권리를 갖는지, 정체성은 누가 규정하는지, 국가와 제도가 개인과 공동체를 어떤 이름으로 분류하는지를 중요한 정치적 문제로 다루어왔다. 그런데 정작 국제미술제 내부에서 참여자가 자신을 어떤 이름으로 부를 것인가를 둘러싼 문제가 발생하는 순간, 예술계가 평소 작품 속에서 지지해왔던 자기결정, 정체성,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가 실제 제도 운영에서는 얼마나 쉽게 행정과 외교의 언어에 밀려날 수 있는지가 드러났다. 광주비엔날레재단은 9월 2일 공식 입장을 통해 국립대만미술관과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명칭 사용과 홍보물 표기를 둘러싼 ‘행정적·협약적 이견’이 발생했다고 설명했고, 참여기관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향후 추진 과정을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재단의 설명대로 초기 명칭 변경 과정에 행정적·협약적 문제가 존재했을 수 있다. 그러나 문화기관에게 행정은 정치와 분리된 중성적인 영역이 아니다. 특히 국제비엔날레에서 참가자의 국가명과 기관명을 어떻게 표기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행정적인 표기 원칙인 동시에 정체성과 외교적 승인, 국제정치의 힘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판단에는 처음부터 명확하고 일관된 원칙이 필요했다. 논란이 발생한 뒤 행정적 판단이었다고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이번 사태는 문화기관이 정치적 문제를 피하기 위해 행정의 언어를 사용할 때조차 그 행정 자체가 얼마나 정치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사건이 다른 장소가 아닌 광주비엔날레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은 문제를 훨씬 무겁게 만든다. 광주비엔날레는 스스로 자신의 기원을 단순한 국제미술행사의 창설에서 찾지 않는다. 재단의 공식 기록에서도 광주비엔날레는 1995년 광주의 민주적 시민정신과 예술적 전통을 바탕으로 출범했으며, 5·18민주화운동의 문화적 가치를 계승하고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라는 광주의 정체성을 국제적인 예술언어로 확장해온 기관으로 자신을 설명해왔다. 창설 선언문은 서로 다른 민족문화의 고유한 생산방식을 존중한다고 천명했고, 광주비엔날레는 이후 수십 년 동안 국가폭력, 군국주의, 식민주의, 젠더, 소수자, 이주, 기후위기와 같은 정치적 문제를 동시대 미술의 언어로 다루면서 자신을 사회적 논쟁이 가능한 국제 플랫폼으로 구축해왔다. 광주비엔날레가 국제적인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도 단순히 세계적인 작가를 많이 불러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국가폭력에 저항했던 광주의 역사와 그 기억이 비엔날레라는 형식에 일종의 윤리적 정당성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재단 스스로도 광주비엔날레가 혁명, 민주주의, 공동체라는 ‘광주정신’을 구현한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표현과 정체성을 둘러싼 국제적 압력이 실제로 행사되는 순간 광주비엔날레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는 다른 국제미술행사보다 더 엄격하게 평가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를 주제로 한 작품을 전시하는 것과 민주주의적 원칙에 따라 기관을 운영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표현의 자유를 다룬 전시를 만드는 것과 자신의 조직이 외교적 압력에 직면했을 때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것도 다른 문제다. 광주비엔날레가 지난 30여 년 동안 축적해온 ‘광주정신’이 단지 전시의 콘텐츠가 아니라 기관의 운영 원칙이라면, 그 정신은 안전한 상황에서 선언되는 가치가 아니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순간 작동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전시장에서 설명하기 가장 쉬운 가치이면서 동시에 기관이 실제로 실행하기 가장 어려운 가치다.

중국 측의 선택 역시 동일한 기준에서 비평할 필요가 있다. 중국 파빌리온 참여자들에게는 자신들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조건 아래 전시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전시 철수 역시 표현의 한 방식이며, 참여를 거부하는 행위 자체를 금지할 수는 없다. 대만 측이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명칭으로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힐 수 있었던 것처럼 중국 측 역시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참여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문제는 개인이나 전시팀의 철수권이 아니라 그 행위가 놓여 있는 권력의 비대칭성이다. 한쪽에는 세계 두 번째 규모의 경제와 거대한 미술시장, 광범위한 공공문화기관 네트워크를 가진 국가가 있고, 그 국가의 대사관과 외교부가 거의 동시에 명칭 문제를 공식적인 외교언어로 다루기 시작했다. 중국 외교부는 광주비엔날레 주최 측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위반했다고 주장하면서 한국 측에 잘못된 방식을 시정할 것을 요구했고, 주한 중국대사관 역시 해당 문제가 한중관계의 정치적 기반을 훼손한다고 주장했다. 이 순간 문제는 더 이상 몇 명의 예술가가 참가를 취소한 사건에 머물지 않는다. 국제미술기관 하나의 명칭 선택이 국가 간 관계의 문제로 확대되고, 문화기관이 자신의 큐레토리얼·행정적 결정을 유지하는 데 외교적 비용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권력의 비대칭성을 외면한 채 모든 참가자의 철수를 동일한 ‘표현의 자유’로만 설명하면 중요한 구조를 놓친다. 한 개인이 전시에서 빠지는 것과 거대한 국가의 공식적인 외교적 항의가 동반된 상태에서 국가 파빌리온이 철수하는 것은 주변 기관들에게 전달되는 신호의 크기가 다르다. 바로 그 차이 때문에 중국관의 철수는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하나의 압력으로 읽힌다.

그렇다고 한국 정부의 입장을 단순히 중국의 압력에 굴복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현재까지 공개된 사실을 기준으로 보면 한국 외교부는 오히려 대만 파빌리온 명칭 결정과 정부의 외교정책을 분리했다. 외교부는 한국 정부의 기존 대만 관련 입장에는 변화가 없지만, 이번 사안은 문화예술 영역에서 민간이 자체적으로 판단한 것이며 정부의 대만 관련 입장과 무관하다고 밝혔다. 이것은 적어도 정부가 광주비엔날레의 명칭 결정을 직접 수정하겠다는 태도와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한 단계 더 질문할 필요가 있다. 정부가 문화예술기관의 결정에 개입하지 않는 것과 문화예술기관의 자율성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것은 동일한가. 외국 정부가 한국의 문화기관을 상대로 특정 명칭의 사용을 문제 삼고 이를 양국 관계의 정치적 기반과 연결하여 공식적인 시정을 요구한다면,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말은 단지 “민간이 결정한 일”이라는 거리두기뿐인가. 문화기관의 독립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정부가 문화기관에 명령하지 않는 소극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다. 필요할 경우 외부의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그 기관이 스스로 판단할 공간을 보장한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정부가 예술의 자율성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문화기관이 외국의 국가권력과 직접 협상하도록 내버려둔다면 그 자율성은 형식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자율적인 판단에는 그 판단의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국제문화교류가 국가의 소프트파워 전략과 결합되고 정부와 지자체의 재정이 대규모 국제미술행사를 떠받치는 현실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만 갑자기 문화예술을 완전히 독립적인 ‘민간 영역’으로 분리하는 태도 역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번 사건이 앞으로 더 중요해지는 지점은 중국관의 빈 공간이 아니라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다음 전시들이다. 검열의 가장 오래가는 결과는 삭제된 한 작품이 아니라 이후 제작되지 않은 작품일 수 있다. 우리는 철거된 작품을 볼 수 있지만 처음부터 제안되지 않은 작품은 볼 수 없다. 금지된 전시는 기록할 수 있지만 논란을 우려해 기획단계에서 폐기된 전시는 기록조차 남지 않는다. 바로 그래서 자기검열은 직접 검열보다 발견하기 어렵다. 이번 사건 이후 어떤 국제전시의 실무자가 홍보물에서 ‘Taiwan’을 사용하려다가 다시 생각하게 된다면, 어떤 큐레이터가 중국과의 협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만 기관 초청 자체를 피한다면, 어떤 기관이 국가명을 둘러싼 논란이 생길 가능성이 있는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기획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중국 정부의 직접적인 검열이라고 입증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회의록에는 ‘외교적 리스크 관리’, ‘참가 기관 간 형평성’, ‘행정적 표기 통일’, ‘불필요한 논란 방지’ 같은 합리적인 언어가 남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검열은 바로 그렇게 제도 안으로 흡수될 수 있다. 정치적 요구가 조직 내부의 위험관리 언어로 번역되는 순간 외부의 압력은 더 이상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관의 판단기준 자체가 된다. 누군가 전화를 걸지 않아도 되고, 항의문을 보내지 않아도 되고, 작품을 내리라고 요구하지 않아도 된다. 기관 내부의 사람들이 과거의 사례를 기억하고 스스로 위험을 제거한다. 검열자가 사라졌는데 검열은 계속되는 역설이다.

그런 점에서 중국관의 철수는 실패한 압력으로만 볼 수도 없다. 광주비엔날레는 결국 ‘대만 파빌리온’ 명칭을 승인했고, 중국 측은 이에 반발해 떠났다. 표면적인 결과만 보면 중국 측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권력의 효과는 당장의 승패만으로 측정할 수 없다. 중국의 반발과 철수가 세계의 문화기관들에게 ‘이 선택에는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면 이미 다른 종류의 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국제문화기관은 이상만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예산과 후원, 외교관계, 관객시장, 작품운송, 작가 교류, 국제 네트워크를 유지해야 한다. 특히 중국은 동시대 미술에서 무시하기 어려운 작가와 컬렉터, 미술관, 비엔날레, 갤러리, 시장을 가진 국가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 철회의 가능성 자체가 협상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직접적인 금지보다 훨씬 현대적인 권력의 방식이다. 과거의 검열관이 빨간 펜을 들고 문장을 지웠다면 오늘의 검열은 계약의 취소, 참가의 철회, 교류의 중단, 시장 접근의 제한, 외교적 항의 가능성이라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압력은 국경 밖에서도 작동한다. 한 국가의 법률이 다른 국가의 미술관에 직접 적용되지 않더라도, 그 국가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행동을 조정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무조건 중국만의 특수한 행태라고 생각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미국과 유럽을 포함한 강대국과 거대 자본 역시 문화교류, 후원, 시장 접근, 비자, 기관 협력 등을 통해 예술계에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중요한 것은 어느 국가가 선하고 어느 국가가 악한지를 결정하는 일이 아니다. 국제문화기관이 국가와 자본의 힘 앞에서 자신의 판단을 어디까지 지킬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다만 이번 광주비엔날레 사건에서는 그 질문을 중국이라는 구체적인 권력 앞에서 피할 이유도 없다.

광주비엔날레재단 역시 이번 사건을 단순한 행정 착오나 파빌리온 운영상의 미숙함으로 정리해서는 안 된다. 윤범모 대표가 파빌리온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은 필요한 출발이지만, 필요한 것은 단순히 계약서를 더 정교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앞으로 참여기관이 사용하는 명칭을 누가 결정할 것인지, 국가와 기관을 어떤 기준으로 구분할 것인지, 참여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할 권리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지, 외국 정부나 대사관이 전시에 문제를 제기했을 때 어떤 원칙으로 대응할 것인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외교적 압력을 공개할 것인지에 대한 제도적 원칙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논란에서도 실무자는 다시 임기응변으로 결정하고, 논란이 커지면 명칭을 변경하고, 다른 국가가 반발하면 다시 협상하는 일이 반복될 수 있다. 국제주의는 많은 국가를 초청한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국가와 정치적 입장, 정체성이 충돌할 때도 각자의 발언권을 유지할 수 있는 규칙을 만드는 것이 국제주의다. 갈등이 없는 국제전시는 국제주의의 성과를 증명하지 못한다. 오히려 갈등이 발생했을 때 기관이 어떤 원칙을 적용하는지가 그 기관의 국제주의를 증명한다. 광주비엔날레가 이번 일을 계기로 파빌리온 제도를 개선한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정치적 논쟁을 없애는 장치가 아니라 정치적 논쟁이 발생해도 기관의 자율성이 흔들리지 않게 만드는 장치일 것이다.

예술의 자율성은 정치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예술은 언제나 정치와 만난다. 국가가 예산을 제공하고, 도시가 비엔날레를 만들고, 외교관이 개막식에 참석하며, 국가 이름이 파빌리온의 입구에 적히는 순간 이미 정치가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정치가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정치적 권력이 예술기관의 판단을 어디까지 결정할 수 있느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건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중국 파빌리온의 철수 그 자체가 아니다. 철수 이후 남겨진 학습이다. ‘Taiwan이라는 이름을 선택하면 이런 일이 발생한다’, ‘중국이 반대하는 문제를 다루면 국제교류에 비용이 생긴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정체성 문제는 처음부터 피하는 편이 안전하다’는 학습이 한국과 아시아의 문화기관 내부에 축적되기 시작한다면 중국관은 광주에서 사라졌지만 그 영향력은 오히려 더 넓은 공간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검열을 작품이 사라지는 사건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검열은 선택 가능한 언어의 범위를 좁히는 과정이며, 말할 수 있음에도 말하지 않게 만드는 힘이고, 허가받지 않아도 되지만 스스로 허가를 구하게 만드는 구조다. 가장 강력한 검열은 모든 전시장에 검열관을 배치하는 체제가 아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검열관을 한 명씩 배치하는 체제다.

그래서 광주비엔날레에 남은 가장 중요한 과제는 중국관을 다시 채우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광주비엔날레재단은 9월 2일 공식 입장에서 중국관의 참여가 다시 이어지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국제적인 문화행사가 참여자의 이탈을 아쉬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조건에서도 참여를 유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원칙 아래 참여를 지속시킬 것인지다. 중국관이 돌아오기 위해 다른 참여자의 이름이 다시 지워져야 한다면 그것은 해결이 아니다. 반대로 대만관을 유지하는 대신 중국과의 모든 문화교류를 적대시하는 방향 역시 예술의 자율성과는 거리가 있다. 필요한 것은 어느 국가의 정치적 입장을 비엔날레가 대신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충돌하는 정치적 입장이 존재하더라도 전시기관이 자신의 원칙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칙의 중심에는 참여자의 자기호명, 표현의 자유, 큐레토리얼 독립성, 절차의 투명성이 있어야 한다. 중국과 교류하면서 중국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하고, 대만을 초청하면서 대만의 모든 정치적 주장을 승인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하며,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정부의 입장과 다른 작품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국제문화기관이 국가의 외교행사와 구별되는 이유다.

광주는 검열의 역사를 모르는 도시가 아니다. 국가가 어떤 기록을 지우고, 어떤 목소리를 불온한 것으로 규정하고, 어떤 사건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때 그것이 한 사회에 얼마나 오래 남는지를 기억하는 도시다. 광주비엔날레가 그 기억에서 출발했다면 이번 사건을 단순한 국제외교상의 해프닝으로 넘길 수 없다. 오늘날의 검열은 과거와 같은 얼굴을 하고 찾아오지 않는다. 작품을 압수하는 경찰이 없을 수도 있고, 전시장 문을 잠그는 공무원이 없을 수도 있으며, 금지목록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대신 협력 중단의 가능성이 있고, 시장을 잃을 위험이 있고, 외교적 불이익에 대한 우려가 있고, 기관 스스로 논란을 피하려는 욕망이 있다. 권력은 명령하지 않고도 작동하며, 검열은 검열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도 완성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필요한 것은 중국관의 철수를 두고 누가 이겼고 누가 졌는지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켜봐야 하는 것은 그 철수 이후 한국의 문화기관들이 무엇을 말하기 어려워졌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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