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테르 범일가옥의 브리꼴라주 실천
— 부산 원도심 기반 contemporary art platform의 구조와 가능성 —
학술 연구 보고서
2026
목차
서론: 플랫폼 시대 동시대 미술과 아이테르 범일가옥이라는 질문
1장. 이론적 배경: 브리꼴라주에서 contemporary art platform으로
2장. 부산 원도심 범일동의 도시성과 장소적 조건
3장.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구조와 운영 모델
4장. 브리꼴라주 실천 ①: 도시-담론-아카이브의 접합
5장. 브리꼴라주 실천 ②: 비즈니스 모델과 상징자본의 다층적 구축
6장. 디지털 인프라와 제도 네트워크의 확장성
7장. 한계와 비교 분석, 그리고 장기 전망
결론: 한국 큐레이토리얼 플랫폼 모델로서의 아이테르 범일가옥
서론: 플랫폼 시대 동시대 미술과 아이테르 범일가옥이라는 질문
1. 변화하는 미술 생태계와 새로운 질문
오늘날 동시대 미술 생태계(contemporary art ecosystem)는 더 이상 단일한 구조로 설명되지 않는다. 한때 미술시장은 갤러리, 미술관, 컬렉터, 비평이라는 비교적 폐쇄적이고 위계적인 회로 안에서 움직였다. 작품은 작가의 손에서 갤러리로, 갤러리에서 컬렉터와 미술관으로 흘러갔고, 그 전 과정은 비평과 학술 담론(discourse)이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디지털 플랫폼 경제와 콘텐츠 산업의 성장, 글로벌 비엔날레의 확산, 사회관계망(SNS, Social Network Service) 기반의 작가 자기-전시, NFT와 디지털 아카이브(digital archive)의 부상 이후 미술 생태계는 더 이상 단순한 전시 산업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늘의 미술 생태계는 플랫폼화(platformization)되고 있으며, 담론·아카이브·네트워크·도시 내러티브(urban narrative)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무엇이 전시되는가만큼이나 어떤 관계망(network)이 구축되는가, 어떤 도시성(urbanity)과 결부되는가, 어떤 담론이 생산되는가가 미술 작업의 가치를 결정하는 핵심 변수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독립예술공간(independent art space)이라는 범주에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한국에서 독립예술공간 혹은 대안공간(alternative space)은 1990년대 후반 이래 동시대 미술의 실험적 거점 역할을 담당해 왔다. 대안공간 풀, 사루비아다방, 쌈지스페이스, 루프(LOOP) 등 1세대 대안공간들은 갤러리와 미술관이 다루지 못한 영역을 채우며 한국 동시대 미술의 비판적 담론을 생산해 왔다. 그러나 이들 공간이 직면한 가장 큰 구조적 한계는 분명했다. 프로젝트가 종료되면 담론과 네트워크가 함께 단절된다는 점이다. 전시는 일정 기간 운영되다 끝나고, 기록은 SNS 이미지 몇 장과 짧은 도록으로 흩어지며, 축적된 관계망은 다음 프로젝트로 자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많은 독립예술공간들은 생존형 자원 운용에 매달리는 동안 자신이 만들어낸 담론적 자산을 플랫폼 자산(platform asset)으로 전환하지 못한 채 소진되었다.
이러한 한계가 가시화될수록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는 "공간이 아닌 플랫폼", "전시가 아닌 담론적 인프라(discursive infrastructure)", "일회적 이벤트가 아닌 지속적 관계망"이라는 새로운 모델에 대한 요청이 강해졌다. 본 보고서가 주목하는 아이테르 범일가옥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한 부산 원도심 기반의 동시대 미술 플랫폼(contemporary art platform)이다. 아이테르 범일가옥은 단순한 전시 공간(exhibition venue)이 아니다.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이라는 원도심의 구체적 도시성과, 동시대 미술 담론, 세미나 구조(seminar structure), 디지털 아카이브, 제도적 네트워크(institutional network)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새로운 형태의 문화 인프라(cultural infrastructure)를 구축해 가고 있다.
2. 왜 "브리꼴라주"인가
본 연구는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실천을 설명하는 핵심 분석틀로 "브리꼴라주(bricolage)"를 제안한다. 브리꼴라주는 프랑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가 『야생의 사고』(*La Pensée sauvage*, 1962)에서 정식화한 개념으로, 손에 닿는 자원들을 즉각적으로 결합해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내는 사유 방식과 실천 양식을 가리킨다. 레비스트로스는 브리꼴뢰르(bricoleur, 손재주꾼)를 엔지니어(engineer)와 대비시키며, 후자가 추상적 설계와 표준화된 자원에 기반해 정형화된 결과를 산출한다면, 전자는 이미 존재하는 이질적 요소들을 우발적으로 재조합하면서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는 구조를 만들어낸다고 설명했다.
브리꼴라주는 흔히 "부족한 자원을 임시로 끼워 맞추는 방식" 정도로 좁게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1966년 강연 「인문과학 담론에서의 구조, 기호, 놀이」("Structure, Sign and Play in the Discourse of the Human Sciences")에서 지적했듯이, 브리꼴라주는 결핍의 미학이 아니라 모든 담론이 처해 있는 일반적 조건에 가깝다. 데리다는 "모든 담론은 브리꼴뢰르적이다"라고 말하며,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과 언어는 이미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유산을 차용하고 변형해 다시 조립하는 작업이라는 점을 환기시켰다.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는 『일상의 발명』(*L'Invention du quotidien*, 1980)에서 브리꼴라주를 도시 거주자들의 일상적 전술(tactics)과 연결시켰다. 거대한 전략적 체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체계의 틈새를 비집고 자신만의 의미와 경로를 만들어내는 방식이야말로 브리꼴라주적이라는 것이다.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실천을 브리꼴라주로 설명할 때, 그것은 결코 자원 부족을 미화하기 위한 수사가 아니다. 오히려 아이테르가 부산 원도심이라는 구체적 장소, 한국 동시대 미술의 담론적 유산, 제도 미술관과 독립 공간 사이의 회색지대, 디지털 아카이브의 기술적 가능성, 작가-비평가-컬렉터-기관이라는 이질적 행위자 네트워크(actor network)를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접합하여 플랫폼 정체성(platform identity)으로 전환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분석틀로 기능한다. 즉, 본 보고서가 사용하는 브리꼴라주는 도시와 사람, 담론과 제도, 아카이브와 디지털 네트워크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새로운 문화 인프라를 구축하는 전략적·구성적 실천(constructive practice)을 의미한다.
3. 연구의 목적과 방법
본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목적을 갖는다.
첫째,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실천을 한국 동시대 미술 생태계의 구조적 전환 속에 위치시키고, 이를 단순한 사례 소개가 아닌 이론적 분석의 대상으로 다룬다. 즉, 아이테르 범일가옥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어떤 모델적 가능성을 시사하는가를 묻는다.
둘째, 브리꼴라주라는 개념을 통해 동시대 미술 플랫폼의 실천 양식을 새롭게 설명한다. 본 연구는 브리꼴라주를 단순한 자원 결합의 기술이 아니라 도시성·담론·제도·디지털을 가로지르는 구성적 전략(constructive strategy)으로 재정의한다.
셋째, 부산 원도심이라는 비-수도권 지역에서 가능한 동시대 미술 플랫폼 모델의 의의를 검토하고, 한국 미술 생태계가 직면한 서울 중심성과 제도/독립의 이분법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방법론적으로 본 연구는 문헌 연구, 사례 분석, 비교 분석을 결합한다. 첫째, 브리꼴라주와 관련된 인류학·문화이론 문헌, 동시대 미술 플랫폼 및 큐레이토리얼 실천(curatorial practice)에 관한 학술 문헌, 부산 도시사 및 문화정책 자료를 검토한다. 둘째,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운영 구조, 프로그램, 디지털 아카이브, 제도적 협업 사례를 분석한다. 셋째, 한국 내 다른 독립예술공간(루프, 아마도예술공간, 사루비아 등) 및 부산의 다른 문화 거점들과 비교하여 아이테르의 위치와 차별성을 드러낸다.
4. 보고서의 구성
본 보고서는 서론과 결론을 제외하고 총 일곱 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1장에서는 이론적 배경을 정리한다. 레비스트로스의 브리꼴라주,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상징자본(symbolic capital)·문화장(field of cultural production) 이론, 부리오(Nicolas Bourriaud)의 관계미학(relational aesthetics), 포스터(Hal Foster)의 아카이브적 충동(archival impulse), 그리고 플랫폼 자본주의(platform capitalism) 논의를 종합하여 "브리꼴라주를 통한 플랫폼 구축"이라는 분석틀을 정립한다. 2장에서는 부산 원도심 범일동의 도시적 조건을 다룬다. 부산의 항만도시(port city)·산업도시 정체성, 범일동의 역사적 층위, 그리고 부산 미술 생태계의 구조를 살핀다. 3장에서는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공간적·운영적 구조를 상세히 분석한다.
4장과 5장은 본 보고서의 핵심에 해당한다. 4장에서는 아이테르가 도시-담론-아카이브를 어떻게 접합하는가를, 5장에서는 이러한 접합이 어떻게 비즈니스 모델(business model)과 상징자본의 형성으로 이어지는가를 다룬다. 6장에서는 디지털 인프라와 제도 네트워크가 아이테르의 확장성에 미치는 역할을 분석하고, 7장에서는 한계와 비교 분석을 통해 장기 전망을 검토한다. 결론에서는 아이테르 범일가옥이 한국 큐레이토리얼 플랫폼 모델(Korean curatorial platform model)로 갖는 의미를 종합한다.
본 보고서가 그리고자 하는 그림은 아이테르 범일가옥이라는 하나의 공간을 통해 한국 동시대 미술이 어떤 다음 단계로 이동하고 있는가에 대한 풍경이다. 그것은 단순히 한 공간의 성장기가 아니라, 도시·담론·아카이브·제도·디지털을 유기적으로 엮어내는 새로운 문화 인프라가 부산이라는 지역에서 어떻게 가능해지고 있는가에 대한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보고서이다.
1장. 이론적 배경: 브리꼴라주에서 동시대 미술 플랫폼으로
1.1 레비스트로스의 브리꼴라주: 야생의 사고와 즉흥의 논리
브리꼴라주(bricolage) 개념의 출발점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La Pensée sauvage*, 1962)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책의 첫 장에서 '신화적 사고(mythical thought)'와 '과학적 사고(scientific thought)'를 구별하기 위해 두 가지 형상을 대비시킨다. 한편에는 엔지니어(engineer, 공학자)가 있다. 엔지니어는 추상적 설계를 먼저 세우고, 그 설계에 부합하는 표준화된 자원을 동원해, 정형화된 결과물을 산출한다. 그의 작업은 미래를 향해 있으며, 그가 사용하는 도구와 재료는 그 작업을 위해 특정하게 준비된 것이다. 다른 한편에 브리꼴뢰르(bricoleur, 손재주꾼)가 있다. 브리꼴뢰르는 설계도가 아니라 손에 닿는 자원들의 목록에서 출발한다. 그의 작업장에는 이전 작업들의 잔여물, 우연히 모아진 부속품, 다른 용도에서 떼어낸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그는 이러한 자원들의 한계 안에서 출발해, 그것들이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구조를 즉흥적으로 만들어낸다.
레비스트로스에게 이 대비는 단순한 기술적 분류가 아니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인식론적 양식(epistemological mode)의 대비였다. 엔지니어가 세계를 미리 설계된 개념의 격자에 맞추어 다룬다면, 브리꼴뢰르는 이미 존재하는 기호와 사물의 조각들을 재배열하며 의미를 생산한다. 신화적 사고가 작동하는 방식이 바로 이러하다. 신화는 새로운 개념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유산 속에 이미 존재하는 모티프, 인물, 사건, 상징을 새로운 조합으로 재구성한다. 레비스트로스의 표현을 빌리면, "브리꼴라주는 우연적 사건을 매개로 구조를 만들어내며, 동시에 그 구조 안에서 우연적 사건을 의미 있게 만든다."
이 정의가 중요한 이유는 브리꼴라주가 결핍의 미학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브리꼴라주는 자원이 부족할 때 임시방편으로 끼워 맞추는 작업, 혹은 영어로 DIY(Do-It-Yourself, 스스로 만들기) 정도로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가 강조한 것은 자원의 양이 아니라 자원과 구조의 관계 방식이었다. 브리꼴뢰르는 자원을 충분히 가질 수도 있고 부족할 수도 있다. 핵심은 그가 그 자원들을 미리 정해진 설계에 종속시키지 않고, 자원의 이질성과 우연성을 출발점으로 삼아 의미 있는 구조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1.2 데리다와 드 세르토: 일반화된 브리꼴라주
레비스트로스의 개념은 1960년대 후반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에 의해 한 단계 더 확장된다. 데리다는 1966년 존스홉킨스 대학 강연 「인문과학 담론에서의 구조, 기호, 놀이」에서 레비스트로스의 브리꼴라주 개념을 양가적으로 평가했다. 한편으로 그는 레비스트로스가 브리꼴라주를 엔지니어와 대비시킨 점을 비판했다. 데리다가 보기에 엔지니어 역시 "어디에서도 출발하지 않는" 신화적 존재일 뿐, 실제로는 모든 사상가, 모든 담론이 이미 존재하는 개념과 언어의 유산을 빌려 쓰는 브리꼴뢰르이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의 개념을 다소 일관되거나 다소 파편화된 유산의 텍스트에서 빌려야 하는 필연성을 브리꼴라주라고 부른다면, 모든 담론은 브리꼴뢰르적이다"라는 그의 진술은 브리꼴라주를 인류학적 호기심의 대상에서 일반 인식론(general epistemology)의 조건으로 격상시켰다.
데리다의 일반화된 브리꼴라주는 본 보고서에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그것은 브리꼴라주를 "원주민적", "전근대적", "비-과학적" 사고로 가두는 위계를 해체한다. 동시대 미술 큐레이팅(curating)과 같이 가장 첨단의 담론을 다루는 실천도 본질적으로는 이미 존재하는 개념·이미지·관계망의 재조합이라는 점이 인정된다. 둘째, 데리다는 브리꼴라주를 결핍이 아닌 가능성의 양식으로 재정위한다. 모든 사유는 이미 누군가가 만든 유산 위에서 시작되므로, 그 유산을 의식적이고 창의적으로 재배열하는 능력이야말로 사유와 실천의 핵심이다.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는 『일상의 발명』(*L'Invention du quotidien*, 1980)에서 이 개념을 도시 거주자의 일상적 실천으로 확장했다. 드 세르토는 도시를 운영하는 거대한 전략적 체계(strategy)와 그 체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전술(tactics)을 구분한다. 전략은 자기 자신의 장소를 가진 자, 즉 권력의 자리에서 작동한다. 전술은 자기 장소를 갖지 못한 자, 즉 타자의 장소 안에서 그 장소의 빈틈을 이용해 살아가는 자의 작동 방식이다. 보행자가 도시 계획자의 격자 위에서 자신만의 경로를 만들어내는 것, 노동자가 작업장의 시간 속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빼내는 것이 전술의 대표적 사례이다. 드 세르토는 이 전술이 본질적으로 브리꼴라주적이라고 본다. 자원도 권력도 자기 장소도 없는 자가 주어진 환경의 파편들을 재조합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도시 일상의 핵심이다.
드 세르토의 시각은 부산 원도심이라는 특정 도시 공간에서 작동하는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실천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다. 아이테르는 거대한 미술관·갤러리·미술시장의 격자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갖지 못한 채, 그 격자의 빈틈—범일동의 가옥, 부산 원도심의 도시성, 디지털 네트워크의 여백, 제도와 독립의 경계—을 전술적으로 활용하여 자신만의 문화 인프라(cultural infrastructure)를 구축한다. 그러나 이 전술은 단순한 임시방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내는 구성적(constructive) 실천이다.
1.3 부르디외의 문화장과 상징자본
브리꼴라주가 실천의 양식이라면,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문화장(field of cultural production, 文化場)과 상징자본(symbolic capital) 개념은 그 실천이 작동하는 사회적 구조를 설명해 준다. 부르디외는 『예술의 규칙』(*Les Règles de l'art*, 1992)과 『문화 생산의 장』(*The Field of Cultural Production*, 1993)에서 예술 세계를 자율적인 사회적 장(field)으로 분석했다. 이 장에서 행위자들은 단순히 작품을 만들고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진정한 예술가인가", "무엇이 좋은 작품인가"를 결정하는 인정 투쟁(struggle for recognition)을 벌인다. 이 인정 투쟁의 결과로 축적되는 것이 바로 상징자본이다. 상징자본은 명성, 권위, 정당성과 같이 가시적인 경제자본(economic capital)으로 환원되지 않는 자본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제자본보다 더 강력하게 행위자의 위치를 결정한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문화장은 두 가지 원리에 의해 구조화된다. 한편에는 단기적·상업적 성공의 원리가 있다. 이 원리에 따르면 작품의 가치는 즉각적 판매와 시장에서의 인정으로 측정된다. 다른 한편에는 장기적·상징적 성공의 원리가 있다. 이 원리에 따르면 작품의 가치는 동료 예술가, 비평가, 큐레이터, 학자 같은 장 내부 행위자들의 인정으로 측정된다. 부르디외는 후자를 "이해관계에 대한 무이해관계"(interest in disinterestedness)라는 역설적 표현으로 설명한다. 즉, 상업적 이해관계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 자체가 상징자본을 축적하는 전략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는 동시대 미술 플랫폼(contemporary art platform)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아이테르 범일가옥과 같은 플랫폼은 단순히 작품을 판매하는 시장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작가가, 어떤 도시가, 어떤 담론이 동시대 미술의 정당한 의제로 인정받을 만한지를 결정하는 인정 투쟁의 장이다. 세미나, 비평 텍스트, 디지털 아카이브, 제도적 협업은 이 인정 투쟁의 인프라이다. 그것들은 직접적인 매출을 만들지 않지만, 작품과 작가와 도시에 상징자본을 부여하며, 그 결과로 작품 판매·전시기획 용역·교육 사업의 신뢰 기반을 형성한다.
1.4 관계미학과 아카이브적 충동
1990년대 이후 동시대 미술 담론에서 두드러진 두 가지 흐름은 본 연구의 분석틀에 직접적으로 기여한다. 첫째는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의 관계미학(relational aesthetics)이다. 부리오는 1996년 보르도 CAPC 미술관에서 큐레이팅한 전시 《트래픽》(*Traffic*)과 1998년 출간된 동명의 책에서 1990년대 이후 등장한 일군의 작가들의 실천을 설명하기 위해 이 개념을 제안했다. 그에 따르면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은 더 이상 자율적 예술 오브제(autonomous art object)를 만들지 않는다. 그들이 만드는 것은 인간 관계의 형식 그 자체이다. 리크리트 티라바닛(Rirkrit Tiravanija)이 갤러리에서 관객에게 요리를 제공하는 작업, 카르스텐 휠러(Carsten Höller)가 미술관에 미끄럼틀을 설치하는 작업처럼, 관객의 참여와 상호작용 자체가 작품의 형식이 된다.
관계미학은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을 비롯한 비평가들로부터 비판도 받았다. 비숍은 부리오의 관계미학이 갈등과 적대(antagonism)를 회피하고 미시 유토피아(micro-utopia)적 화합에 머무른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미학이 던진 핵심 질문—예술 작업의 형식이 인간 관계 그 자체로 확장될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은 동시대 미술 플랫폼을 사유하는 데 여전히 유효하다. 아이테르 범일가옥이 만들어내는 가치의 상당 부분은 작품과 전시뿐 아니라 작가-비평가-큐레이터-컬렉터-기관 사이의 관계망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할 포스터(Hal Foster)가 2004년 《옥토버》(*October*) 학술지에 발표한 「아카이브적 충동」(An Archival Impulse) 논문이 정식화한 흐름이다. 포스터는 1990년대 후반 이후 토마스 허쉬호른(Thomas Hirschhorn), 타시타 딘(Tacita Dean), 샘 듀란트(Sam Durant) 같은 작가들이 작업의 출발점으로 아카이브를 채택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들은 잊혀진 자료, 분실된 이미지, 미완의 프로젝트, 거부된 모더니즘의 유산을 발굴해 새로운 의미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낸다. 포스터에 따르면 아카이브적 충동(archival impulse)은 단순한 노스탤지어(nostalgia)나 자료의 수집이 아니라, "발견되었으나 동시에 구성된, 사실적이지만 동시에 허구적인, 공적이지만 동시에 사적인" 아카이브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적 의미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실천이다.
아카이브적 충동은 자크 데리다의 『기록열』(*Mal d'archive*, 1995)과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아카이브 개념에 이론적 기반을 둔다. 푸코에게 아카이브(archive, 기록보존소)는 단순히 저장된 자료가 아니라 "무엇이 말해질 수 있고 말해질 수 없는가"를 결정하는 담론적 규칙의 체계이다. 데리다에게 아카이브는 사회적 기억(social memory)의 장소이자 동시에 그 기억이 누락·왜곡되는 장소이며, 누가 아카이브를 통제하는가는 누가 사회적 기억을 통제하는가와 직결된다. 두 사상가의 시각에서 아카이브는 단지 과거의 보관소가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조직하는 인프라이다.
아이테르 범일가옥이 디지털 아카이브(digital archive), 세미나 기록, 비평 텍스트, 인터뷰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축적해가는 실천은 바로 이러한 아카이브적 충동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아이테르의 경우 아카이브는 작품의 소재가 아니라 플랫폼(platform) 그 자체의 인프라이다. 다음 장들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아이테르의 아카이브는 부산 원도심의 도시적 기억과 동시대 미술 담론, 작가의 작업, 제도적 협업의 흔적을 하나의 연속적 네트워크로 엮어내는 핵심 메커니즘이다.
1.5 플랫폼 자본주의와 문화 인프라
마지막으로 본 연구의 분석틀은 플랫폼 자본주의(platform capitalism) 논의로부터 빌려온다. 닉 서르닉(Nick Srnicek)의 『플랫폼 자본주의』(*Platform Capitalism*, 2017)는 21세기 자본주의의 핵심 구조 변화를 플랫폼의 부상으로 진단했다. 플랫폼은 단순한 시장이나 매개자(intermediary)가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행위자들이 만나는 디지털 인프라이자, 그 만남에서 발생하는 데이터를 수집·분석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메커니즘이다. 데이비드 니보르그(David Nieborg)와 토마스 푀엘(Thomas Poell)은 이 분석을 문화 생산의 영역으로 확장하여 "문화 생산의 플랫폼화"(platformization of cultural production) 개념을 제안했다. 그들에 따르면 오늘의 문화 산업은 더 이상 콘텐츠 기획-제작-유통의 선형적 구조가 아니라, 플랫폼이 콘텐츠의 형식·접근성·가시성·수익화 방식 자체를 구조화하는 다층적 시스템 위에서 움직인다.
플랫폼 자본주의 논의는 동시대 미술 플랫폼이 갖는 양가적 위치를 드러낸다. 한편으로 미술 영역의 플랫폼화는 작가와 관객, 큐레이터와 컬렉터, 도시와 담론을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하는 가능성을 연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알고리즘 가시성(algorithmic visibility), 데이터 수집, 콘텐츠의 표준화·상품화 같은 새로운 리스크를 동반한다. 아이테르 범일가옥과 같은 독립적·지역적 플랫폼이 갖는 의의는, 거대 디지털 플랫폼의 논리에 매몰되지 않으면서도 플랫폼의 구조적 이점—반복 참여(repeat engagement), 아카이브 축적, 다층적 행위자 네트워크의 연결—을 활용한다는 점에 있다.
1.6 분석틀: "브리꼴라주를 통한 플랫폼 구축"
지금까지 살펴본 이론적 자원을 종합하여, 본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분석틀을 정립한다.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실천은 "브리꼴라주를 통한 플랫폼 구축"이라는 명제로 요약된다. 이 명제는 다음 네 가지 차원을 포함한다.
첫째, 자원의 차원이다. 아이테르는 부산 원도심의 도시적 자원(범일동의 가옥, 시장경제의 흔적, 항만도시의 이동성), 한국 동시대 미술의 담론적 자원(독립예술공간의 역사, 큐레이토리얼 실험의 유산), 제도적 자원(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과의 협업 가능성), 디지털 자원(웹사이트, 아카이브, 소셜 미디어)을 브리꼴라주적으로 결합한다. 이 결합은 사전 설계가 아니라 사용 가능한 자원의 한계 안에서 출발한다.
둘째, 구조의 차원이다. 그러나 이 결합은 임시적이지 않다. 그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축적되어 플랫폼 인프라(platform infrastructure)를 만들어낸다. 각각의 프로젝트, 세미나, 전시, 비평이 다음 프로젝트의 자원이 되며, 디지털 아카이브로 결합된다. 이 점에서 아이테르의 브리꼴라주는 데리다적·드 세르토적 의미에서 구성적이다.
셋째, 가치의 차원이다. 이렇게 축적된 인프라는 부르디외적 의미의 상징자본을 생산한다. 작가의 작품, 도시의 내러티브(narrative), 큐레이토리얼 실천 자체에 정당성과 권위를 부여하며, 이는 다시 작품 판매, 전시기획 용역, 교육 사업의 신뢰 기반으로 전환된다.
넷째, 확장의 차원이다. 이러한 플랫폼은 공간 규모가 아니라 관계 밀도(relationship density)와 담론 연속성(discourse continuity)에 의해 확장된다. 부산이라는 지역적 거점에서 시작해 한국, 아시아,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도시 담론 네트워크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여기에서 열린다.
다음 장에서는 이 분석틀을 적용할 구체적 맥락—부산 원도심 범일동의 도시성—을 다룬다.
2장. 부산 원도심 범일동의 도시성과 장소적 조건
2.1 항만도시 부산이라는 좌표
아이테르 범일가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산이라는 도시 자체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부산은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지만, 단순히 인구 규모로 환원되지 않는 독특한 도시적 정체성을 가진다. 부산은 항만도시(port city)이다. 그것은 단지 항구가 있는 도시라는 의미가 아니라, 도시의 형성과 변형 자체가 바다와 항만의 리듬에 의해 규정되어 왔다는 의미이다. 19세기 후반 개항기 이래 부산은 일본, 동남아시아, 그리고 그 너머 세계와 한국을 연결하는 관문(gateway)으로 기능해 왔다. 일제 강점기에는 식민지 무역의 거점이었고, 한국전쟁기에는 임시수도로서 전 국토의 피난민과 자원을 흡수하는 항구였다. 1960~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는 신발·섬유·합판 등 경공업의 중심지였으며, 동시에 컨테이너 항만의 확장과 함께 동북아시아 물류 허브(logistics hub)로 기능했다.
이러한 역사적 층위는 부산의 도시 형태에 깊이 새겨져 있다. 부산은 단일한 중심을 가진 도시가 아니다. 그것은 항구를 중심으로 한 원도심(중구, 동구, 서구), 산업화 과정에서 확장된 사상·사하 일대, 1990년대 이후 신도시로 개발된 해운대·센텀시티 일대, 그리고 외곽의 기장·강서 지역이 각기 다른 시간성을 가지고 공존하는 도시이다. 특히 원도심—중구, 동구를 중심으로 한 구도심권—은 부산의 가장 오래된 시간이 가장 가시적으로 남아 있는 영역이다. 시청이 1999년 연제구로 이전한 이후 원도심은 행정·상업·정치적 중심성을 상실했지만, 그 결과 역설적으로 부산의 산업적·이주적·생활사적 기억이 가장 짙게 축적된 장소가 되었다.
2.2 범일동: 시장, 산업, 이동성의 중첩
범일동(凡一洞)은 부산광역시 동구에 속하는 지역으로, 부산진 시장과 자유시장, 평화시장 등 부산을 대표하는 도매·소매 시장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동시에 범일동은 한국전쟁 이래 형성된 피난민 주거지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으며, 일제 강점기 이래 부산의 산업적 기반—특히 신발 산업과 섬유 산업—이 집적되었던 곳이다. 범일동의 지명이 갖는 일상성과 보편성("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곳"으로 해석되기도 하는)은 우연이 아니다. 이곳은 부산의 다양한 시간과 사람과 산업이 교차하는 결절점(node)이었다.
범일동의 도시적 조직은 몇 가지 특징적 요소로 이루어진다. 첫째, 시장경제(market economy)의 흔적이다. 부산진 시장은 도매업과 소매업이 결합된 전통 시장으로, 의류·잡화·식품 등 다양한 상품이 거래된다. 이 시장은 단지 상거래 장소가 아니라 부산이라는 도시의 일상 경제가 가장 밀도 높게 작동하는 공간이다. 시장 골목의 동선, 상점의 진열 방식, 상인과 손님의 관계, 골목 위의 간판과 호객 소리 모두가 부산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미시적 텍스처(micro-texture)이다.
둘째, 산업의 기억이다. 1960~70년대 범일동을 포함한 부산 원도심에는 신발 공장, 섬유 공장, 합판 공장 등이 밀집해 있었다. 이 공장들은 1980년대 이후 해외 이전과 산업 구조 재편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건물의 형태, 거리의 구조, 노동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F1963이라는 폐 와이어 공장이 문화 복합시설로 재생된 사례에서 보듯, 부산의 산업적 유산(industrial heritage)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적 의미로 재구성될 수 있는 자원으로 잠재해 있다.
셋째, 이동성(mobility)과 이주(migration)의 층위이다. 범일동은 한국전쟁기 피난민들이 정착했던 곳이며, 1960~70년대에는 부산의 산업 노동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유입된 이주노동자들이 모여든 곳이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동남아시아·중앙아시아 출신 이주민들의 생활권으로 확장되었다. 범일동은 한국 사회의 이주와 이동, 노동과 생활의 역사가 농축된 장소이다.
이 세 가지 층위—시장경제, 산업, 이동성—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중첩되어 있다. 시장은 산업과 이주민 노동의 결과물이 거래되는 장소이며, 산업은 이주민의 노동에 의해 가능했고, 이동성은 시장과 산업의 리듬을 따라 형성되었다. 범일동은 이 세 층위가 교차하는 결절점이며, 그 자체로 부산이라는 도시의 압축된 초상이라 할 수 있다.
2.3 원도심 도시재생과 예술의 결합
1999년 시청 이전 이후 부산 원도심은 인구 감소, 상권 침체, 건물 노후화 같은 전형적 도심 공동화(urban hollowing) 현상을 겪었다. 부산광역시는 2009년 이후 원도심 재생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해 왔는데, 그중 문화·예술을 매개로 한 재생 사업이 두드러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또따또가(TOTATOGA)이다. 또따또가는 중구 동광동, 광복동 일대의 공실 사무실들을 예술가 작업실로 전환하여 운영하는 레지던시(residency) 프로그램으로, 부산광역시가 지원하고 예술가들이 운영 주체로 참여하는 협력 모델이다. 또따또가는 부산 원도심에 다수의 예술가들을 다시 불러들이며, 도시 공간의 미적 변형과 함께 시민과 예술가의 만남을 조직하는 데 기여했다.
또 다른 대표적 사례는 감천문화마을이다. 사하구 감천동의 산복도로 마을은 한국전쟁 직후 피난민들이 형성한 주거지로, 2009년 마을미술 프로젝트(community art project)를 통해 골목과 벽면이 예술 작품으로 채워지면서 관광 명소로 부상했다. 감천문화마을은 주민·예술가·지방정부의 협업으로 진행된 참여형 예술 프로젝트(participatory art project)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지만, 동시에 관광 상품화에 따른 주민 생활 침해,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임대료 상승에 의한 원주민 이탈)의 부작용 같은 비판도 받아왔다.
영도구 흰여울문화마을 역시 비슷한 궤적을 그렸다. 절벽 위에 형성된 이 작은 마을은 영화 촬영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2010년대 들어 카페와 갤러리, 작은 예술공간들이 들어서며 도시재생(urban regeneration)의 사례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흰여울문화마을의 변화도 역시 관광 산업과 주민 삶의 긴장을 동반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부산 원도심의 도시재생이 예술과 결합되는 방식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한편으로 예술은 쇠퇴한 도심에 새로운 활력과 가시성을 부여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활력은 종종 도시 공간을 관광 상품으로 전환하면서 원래 주민의 생활 기반을 침식한다. 예술이 도시를 "구원"하는 단순한 도구가 될 수 없다는 점, 도시와 예술의 관계는 더 복잡한 윤리적·정치적 문제를 동반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2.4 부산 미술 생태계의 구조
부산은 한국에서 서울 다음으로 큰 미술 생태계(art ecosystem)를 가진 도시이다. 이 생태계는 몇 가지 주요 거점과 사건들로 구성된다.
첫째, 부산비엔날레(Busan Biennale)이다. 1981년 부산청년비엔날레로 시작된 이 행사는 1998년 PICAF(Pusan International Contemporary Art Festival, 부산국제현대미술축제)를 거쳐 2002년부터 부산비엔날레라는 이름으로 정식 출범했다. 부산비엔날레는 부산이라는 도시의 항만적·산업적·이주적 정체성을 동시대 미술 담론과 결합하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해왔다. 특히 2022년 김해주 예술감독이 기획한 부산비엔날레는 "물결 위 우리"라는 주제 아래 이주, 여성과 여성 노동자, 도시의 생태계, 기술 변화와 지역성이라는 네 가지 축으로 부산의 도시 내러티브(urban narrative)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부산비엔날레는 부산 미술 생태계가 글로벌 동시대 미술 담론과 어떻게 접속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사건이다.
둘째, 부산현대미술관(MOCA Busan, Museum of Contemporary Art Busan)이다. 2018년 을숙도에 개관한 이 미술관은 부산광역시 산하의 공공 미술관으로, 부산 동시대 미술의 제도적 거점으로 기능한다. MOCA Busan은 부산비엔날레의 주 전시장이기도 하다.
셋째, F1963이다. 영도구에 위치한 이 복합문화공간은 1963년부터 가동된 와이어 제조 공장 고려제강 수영공장을 리모델링한 공간으로, 갤러리·도서관·카페·공연장 등이 결합되어 있다. F1963은 부산의 산업적 유산이 문화 공간으로 전환된 대표적 사례이며, 부산비엔날레의 위성 전시장(satellite venue)으로도 활용된다.
넷째, 아트부산(Art Busan)이다. 2012년 시작된 이 아트페어(art fair)는 부산을 거점으로 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주요 미술시장 행사로 성장했다. 2025년 기준 17개국 109개 갤러리가 참가하는 규모로 확장되었으며, 부산이 단지 비엔날레 도시일 뿐 아니라 미술시장 도시로도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섯째, 다수의 사립 갤러리와 독립예술공간들이다. 조현화랑, 갤러리이배, 부산프랑스문화원 등 사립 갤러리들이 부산 미술의 시장 측면을 담당해 왔다면, 신생공간·오픈스페이스배·갤러리분도 등 독립·실험 공간들이 비평적·실험적 담론을 생산해 왔다.
이러한 부산 미술 생태계의 구조 속에서 아이테르 범일가옥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한편으로 아이테르는 부산비엔날레나 MOCA Busan 같은 대형 제도와는 규모와 자원이 비교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아이테르는 통상적 의미의 "독립예술공간"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미술시장의 한 갤러리도 아니고, 공공 미술관도 아니며, 비엔날레 같은 대형 행사도 아니다. 아이테르는 부산이라는 도시의 미술 생태계 안에서 새로운 범주의 위치—원도심 기반의 동시대 미술 플랫폼—를 구축하고 있다.
2.5 범일동이라는 장소의 잠재력
마지막으로 본 장은 범일동이라는 특정 장소가 동시대 미술 플랫폼에 제공하는 잠재력을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범일동은 부산의 도시 내러티브가 가장 압축적으로 응축된 장소이다. 시장경제, 산업, 이동성이라는 세 가지 층위가 한 동네 안에서 만나며, 이는 동시대 미술이 다루는 핵심 의제들—이주, 노동, 도시화, 글로벌화, 생활세계(life-world)—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다시 말해 범일동은 동시대 미술 언어(contemporary art language)로 번역될 수 있는 가장 풍부한 자원을 보유한 도시 공간 중 하나이다.
둘째, 범일동은 이미 충분히 의미화된 관광지나 미술 거점이 아니라는 점에서 새로운 큐레이토리얼 실천의 가능성을 연다. 감천문화마을이나 또따또가가 이미 의미의 격자에 포섭된 장소라면, 범일동은 그러한 포섭이 덜 진행된 상태로 남아 있다. 이는 새로운 의미 생산의 여백이 더 크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도시 공간과 예술의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설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셋째, 범일동은 일상성(everydayness)의 도시이다. 감천문화마을이 산복도로의 풍경, 흰여울문화마을이 절벽 위 풍경처럼 "이미지로 소비될 만한" 미적 특이성을 가진 장소들이라면, 범일동은 그러한 표면적 미적 매력이 강하지 않다. 이는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다. 범일동의 예술적 실천은 표면의 미적 소비가 아니라 도시의 일상적 텍스처와 깊이 결합된 의미 생산을 요청한다.
이러한 장소적 조건 위에서 아이테르 범일가옥은 어떻게 운영되며, 어떤 구조를 갖추고 있는가? 다음 장에서 이를 상세히 다룬다.
3장.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구조와 운영 모델
3.1 가옥이라는 공간성: 백색의 큐브를 벗어난 큐레이토리얼의 조건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이름 자체가 그 공간성을 시사한다. "아이테르(Aether/Aither)"는 그리스 신화에서 하늘의 가장 높은 곳, 신들이 호흡하는 맑고 빛나는 공기를 뜻하는 단어이며, 동시에 19세기 물리학에서 빛이 전파되는 매질(medium)로 가설되었던 개념이기도 하다. 그것은 비어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매개하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모든 흐름을 가능하게 하는 매질이다. "범일가옥"은 부산 동구 범일동의 가옥(家屋), 즉 일상적 주거 공간으로서의 집을 의미한다. 두 단어의 결합은 평범한 가옥이 어떻게 동시대 미술 담론의 매질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이미 함축한다.
이 공간성은 통상적인 화이트 큐브(white cube)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화이트 큐브는 모더니즘(modernism) 미술관과 갤러리가 정립한 전시 공간의 표준으로, 흰 벽과 균일한 조명, 외부와 차단된 중립적 환경을 통해 작품을 그 자체로 자율적인 미적 대상으로 제시한다. 브라이언 오도허티(Brian O'Doherty)가 1976년 《아트포럼》(*Artforum*)에 연재한 「화이트 큐브의 내부」(Inside the White Cube) 연작에서 분석했듯이, 화이트 큐브는 단순한 건축적 형식이 아니라 작품의 자율성과 보편성을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적 장치(ideological apparatus)이다. 화이트 큐브 안에서 작품은 시간과 장소의 구체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어디서 어떤 맥락에서 보아도 동일한 미적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제시된다.
가옥은 이와 정반대의 공간 논리를 갖는다. 가옥에는 두꺼운 벽이 있고, 좁은 복도가 있고, 천장의 높낮이가 다르고, 창문의 위치가 정해져 있으며, 바닥의 재질이 변한다. 가옥은 누군가가 살았던 흔적, 시간이 새긴 자국, 일상의 동선을 그대로 간직한다. 작품은 이러한 공간의 구체성에 흡수되거나 부딪히거나 협상하며 의미를 만들어낸다.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공간은 이 점에서 미원 권(Miwon Kwon)이 『장소 이후의 장소』(*One Place After Another*, 2002)에서 분석한 사이트-스페시픽 아트(site-specific art, 장소 특정 미술)의 조건을 일상적 수준에서 구현한다.
권은 이 책에서 사이트-스페시픽 아트가 세 가지 모델로 발전해 왔다고 설명한다. 첫째는 현상학적 모델(phenomenological model)로, 작품과 장소의 물리적·감각적 결합에 초점을 둔다. 둘째는 제도적 모델(institutional model)로, 미술관·갤러리 같은 제도 자체를 작품의 장소로 삼는다. 셋째는 담론적 모델(discursive model)로, 장소를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라 그 공간을 둘러싼 사회적·역사적·정치적 담론의 네트워크로 이해한다.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공간 실천은 이 세 모델을 중첩시킨다. 가옥의 물리적 조건은 작품의 현상학적 경험을 형성하고, 가옥-갤러리라는 형식 자체가 제도적 질문을 환기시키며, 범일동이라는 장소는 부산 원도심의 역사·노동·이주·산업이라는 담론적 네트워크 안에서만 온전히 이해된다.
3.2 플랫폼 정체성: 단일한 운영 주체에서 분산된 큐레이토리얼로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운영은 단일한 갤러리 디렉터나 큐레이터의 개인 비전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큐레이터, 작가, 비평가, 연구자, 디자이너, 디지털 콘텐츠 제작자 등 다수의 행위자가 협업하는 분산된 큐레이토리얼(distributed curatorial) 구조 위에서 운영된다. 이러한 운영 방식은 1990년대 이후 동시대 큐레이팅 담론이 강조해 온 "분산된 저자성"(distributed authorship) 혹은 "집단적 큐레이팅"(collective curating)의 흐름과 맞닿아 있다.
폴 오닐(Paul O'Neill)은 『큐레이팅의 문화와 문화의 큐레이팅』(*The Culture of Curating and the Curating of Culture(s)*, 2012)에서 1990년대 이후 큐레이터의 역할이 "전시 기획자"에서 "담론 생산자"(discourse producer)로 확장되어 왔다고 분석했다. 큐레이터는 더 이상 미술관 내부에서 작품을 선별하고 배치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비엔날레·아트페어·출판·세미나·디지털 플랫폼을 가로지르며 동시대 미술 담론의 형식 자체를 생산하는 행위자가 되었다. 그러나 오닐이 동시에 지적했듯이, 이러한 확장은 큐레이터 개인의 "스타화"(stardom)라는 부작용을 동반했다.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 오쿠이 엔웨조(Okwui Enwezor), 마시밀리아노 지오니(Massimiliano Gioni) 같은 인물이 보여주듯, 일부 스타 큐레이터(star curator)는 작가보다 더 큰 가시성을 가지며 동시대 미술 담론을 좌우한다.
아이테르 범일가옥은 이러한 스타 큐레이터 모델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영국의 퍼더필드(Furtherfield), 인도네시아의 루앙루파(ruangrupa), 일본의 옐로우 펜 클럽(Yellow Pen Club)과 같은 집단적·플랫폼적 큐레이토리얼 실천에 가깝다. 운영진 개인의 이름이 전면에 부각되기보다, 플랫폼 자체의 정체성과 담론적 입장이 전면화된다. 이는 단순한 운영 방식의 선택이 아니라, 동시대 미술 플랫폼의 정당성과 지속성에 관한 전략적 결정이다.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지 않는 플랫폼 정체성(platform identity)은 장기적으로 더 안정적으로 작동하며, 다수의 행위자가 참여할 수 있는 열린 구조를 만들어낸다.
3.3 3축 비즈니스 모델의 구조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운영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비즈니스 모델(business model)은 세 가지 축으로 구성된다. 본 절에서는 각 축의 작동 원리를 차례로 살펴본다.
첫 번째 축: 전시기획 용역 사업
첫 번째 축은 전시기획 용역 사업이다. 아이테르는 병원, 호텔, 기업, 공공기관 등 외부 기관을 대상으로 그들의 공간에 전시를 기획하고 설치하는 사업을 수행한다. 이는 통상적 의미의 "기업 미술 컨설팅"(corporate art consulting)이나 "호텔 아트 어드바이저리"(hotel art advisory)와 유사해 보일 수 있지만, 본질적 차이가 있다.
통상적 기업 미술 컨설팅은 의뢰 기관의 공간을 미적으로 장식하기 위해 작품을 선별·구매·설치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 핵심은 "장식적 가치"의 제공이다. 반면 아이테르의 전시기획 용역은 의뢰 기관의 공간을 문화적 맥락(cultural context)으로 재설계하는 작업에 가깝다. 즉, 어떤 작품을 어디에 거는가 이전에, 그 공간이 어떤 도시적·역사적·문화적 맥락 위에 위치하는가, 그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어떤 경험을 통해 작품과 만나는가, 그 만남이 어떤 의미의 네트워크를 생성하는가를 설계한다.
이러한 접근은 부르디외적 의미에서 상징자본(symbolic capital)의 작동을 활용한다. 의뢰 기관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문화적 브랜딩(cultural branding)을 원한다. 그들의 공간이 미적·지적·사회적으로 어떤 정당성을 가지는가는 단순히 비싼 작품을 거는 것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 공간이 어떤 담론과 연결되어 있는가, 어떤 큐레이토리얼 사유에 의해 매개되어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아이테르가 제공하는 것은 바로 이 매개의 정당성이다.
또한 전시기획 용역 사업은 단순히 일회적 매출 발생원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테르의 큐레이토리얼 실천을 외부 공간으로 확장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병원·호텔·기업·공공기관의 공간에서 아이테르가 큐레이팅한 전시가 진행될 때, 그것은 아이테르의 담론적 영토를 물리적으로 확장한다. 또한 이러한 외부 프로젝트는 자체 공간에서 진행하기 어려운 규모의 작가 협업, 새로운 형식의 실험을 가능하게 한다.
두 번째 축: 작품 판매
두 번째 축은 작품 판매이다. 그러나 아이테르의 작품 판매는 일반적 갤러리 비즈니스와 차별화되는 구조를 갖는다.
통상적 갤러리는 작가의 작품을 위탁받아 전시하고, 컬렉터에게 판매하는 중개 역할(intermediary role)을 한다. 작품의 가격은 작가의 시장적 명성, 작품의 크기와 매체, 갤러리의 위치와 명성 등에 의해 결정되며, 판매 수익은 작가와 갤러리가 일정 비율로 분배한다. 이 구조 안에서 갤러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작품의 시장 가격을 만들고 유지하는 일이다.
아이테르는 이러한 통상적 갤러리 모델과 거리를 둔다. 아이테르가 작품 판매에서 추구하는 것은 단순한 시장 가격의 형성이 아니라, 작품의 상징자본을 구축하는 일이다. 즉, 작품이 동시대 미술 담론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어떤 비평적·학술적·제도적 인정을 받는가를 우선적으로 다룬다. 작품 판매는 이 상징자본의 축적 위에서 부차적으로, 그러나 신뢰성 있게 일어난다.
이러한 접근의 핵심에는 컬렉터 신뢰(collector trust)의 형성이라는 메커니즘이 있다. 컬렉터는 단순히 작품을 사는 사람이 아니다. 컬렉터는 자신의 컬렉션을 통해 자신이 어떤 동시대 미술 담론과 연결되는가, 어떤 큐레이토리얼 시야와 미적 판단에 동조하는가를 표현한다. 아이테르가 작품을 판매할 때 함께 제공하는 것은 작품에 대한 비평적 텍스트, 작가 인터뷰, 작품의 전시 이력(exhibition history), 관련 세미나의 기록, 도시적 맥락에 대한 큐레이토리얼 노트 등이다. 즉, 작품은 그 자체로 판매되는 것이 아니라 담론적 네트워크와 함께 판매된다.
이는 작품의 가격 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단기적 시장 변동성에 좌우되는 가격이 아니라, 장기적 담론적 가치 위에서 형성되는 가격이 추구된다. 이러한 가격 구조는 컬렉터에게도 안정적이며, 작가에게도 자신의 작업이 단기 시장에 휘둘리지 않고 장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세 번째 축: 교육 및 연구 프로젝트
세 번째 축은 교육 및 연구 프로젝트이다. 큐레이터 교육, 세미나, 출판, 연구 협업 등이 이 축에 포함된다. 표면적으로 이는 일종의 "부가 사업"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아이테르의 운영 구조에서 교육과 연구는 플랫폼의 가장 중심적인 엔진(platform engine)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동시대 미술 플랫폼은 그 자체로 새로운 참여자를 지속적으로 생성해야 작동한다. 새로운 작가, 새로운 큐레이터, 새로운 비평가, 새로운 컬렉터가 끊임없이 플랫폼 안으로 진입해야 한다. 교육 프로그램은 이러한 진입의 통로이다. 큐레이터 교육 과정에 참여한 신진 큐레이터들은 미래의 협업자가 되고, 세미나에 참여한 연구자들은 미래의 비평적 동맹(critical ally)이 되며, 출판물에 글을 쓴 필자들은 플랫폼의 담론적 자산으로 누적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육·연구는 단순한 강의 사업이 아니라 미래 생태계(future ecosystem)를 구축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즉각적 매출을 만들기보다 장기적 관계망을 구축하며, 이 관계망은 다시 플랫폼의 지속성과 확장성의 토대가 된다.
또한 교육과 연구는 아이테르의 담론적 정당성을 형성하는 핵심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학술적 깊이를 갖춘 세미나, 연구 기반의 출판물, 큐레이터 교육 프로그램은 아이테르가 단순한 상업 갤러리나 일회적 독립 공간이 아니라 동시대 미술 담론의 진지한 생산자임을 입증하는 인프라이다.
3.4 시간적 누적의 구조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운영을 일반 독립예술공간과 가장 명확하게 구별짓는 특징은 시간적 누적(temporal accumulation)의 구조이다. 통상적 독립예술공간에서 하나의 프로젝트는 기획-전시-종료의 선형적 시간 구조를 따른다. 전시가 끝나면 프로젝트는 종료되며, 다음 프로젝트는 새롭게 시작된다. 프로젝트 사이의 연속성은 운영 주체의 기억과 인적 네트워크 안에 비공식적으로만 존재한다.
아이테르의 시간 구조는 이와 다르다. 전시는 종료되지 않는다. 전시는 다음 단계로 이어진다. 전시 이후에는 비평 텍스트가 생산되고, 세미나가 열리고, 디지털 콘텐츠가 제작되며, 작가 인터뷰가 아카이브에 추가된다. 이러한 후속 작업들은 단순한 기록 보존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새로운 의미 생산이다. 그리고 이 후속 작업들은 다시 다음 프로젝트의 기획에 영향을 미친다. 한 작가의 전시에서 제기된 의제가 세미나에서 심화되고, 그 세미나의 논의가 다음 전시의 기획으로 이어지며, 그 전시가 다시 출판으로 이어지는 순환 구조(circular structure)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시간적 누적은 디지털 아카이브(digital archive)에 의해 가시화되고 안정화된다. 아카이브는 단순한 보관소가 아니라, 흩어진 시간들을 하나의 연속체로 재구성하는 인프라이다. 6장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아이테르의 디지털 아카이브는 이 시간적 누적을 외부에 보여주는 동시에, 내부적으로 다음 프로젝트의 자원이 되는 이중적 기능을 수행한다.
3.5 위치: 생존형 공간과 제도적 미술관 사이
마지막으로 본 장은 아이테르 범일가옥이 한국 미술 생태계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정리한다. 아이테르는 두 가지 기존 범주의 사이에 위치한다.
한편으로 아이테르는 통상적 "독립예술공간"(independent art space) 혹은 "대안공간"(alternative space)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1세대 대안공간들이 자원 부족과 지속성 위기에 시달리며 생존형 운영에 머물렀다면, 아이테르는 명확한 비즈니스 모델, 안정적 운영 구조, 장기적 담론 축적을 갖춘 플랫폼으로 성장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아이테르는 국공립 미술관이나 대형 사립 미술관과도 다르다. 거대 자본과 행정 인프라에 기반한 제도적 미술관(institutional museum)과 달리, 아이테르는 작은 규모로 출발해 관계망과 담론의 밀도로 확장되는 모델을 추구한다.
이 사이의 위치는 단순히 중간자적 위치가 아니라, 새로운 범주의 위치이다. 그것은 부르디외가 말한 "이중 구조의 장"—단기적 시장 성공과 장기적 상징적 성공이 별개의 원리로 작동하는 장—에서 두 원리를 동시에 활용하는 위치이며, 푸코적 의미에서 새로운 담론적 형성(discursive formation)을 만들어내는 위치이다. 다음 두 장(4장, 5장)은 이 위치에서 아이테르가 어떻게 브리꼴라주적 실천을 전개하는가를 상세히 분석한다.
4장. 브리꼴라주 실천 ①: 도시-담론-아카이브의 접합
4.1 도시를 동시대 미술 언어로 번역하기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첫 번째 브리꼴라주적 실천은 부산 원도심이라는 도시 공간을 동시대 미술 언어(contemporary art language)로 번역하는 작업이다. 이 번역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구체적인 큐레이토리얼 작업이다.
도시를 미술의 소재로 다루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표면적인 방식은 도시의 풍경을 회화나 사진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좀 더 진전된 방식은 도시의 건축물, 거리, 사람들을 작품의 모티프(motif)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깊이 있는 방식은 도시 자체를 하나의 텍스트로 읽어내고, 그 텍스트가 동시대 미술의 언어 안에서 어떻게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아이테르가 시도하는 것은 바로 이 세 번째 방식이다.
이 작업의 출발점은 도시를 "배경"으로 소비하지 않는 것이다. 많은 도시 기반 예술 프로젝트들은 도시의 특정 장면이나 분위기를 차용하여 작품의 미적 매력을 강화하는 데 머문다. 부산을 다룬 일부 예술 프로젝트들이 자갈치 시장의 활기, 산복도로의 풍경, 영도다리의 노스탤지어(nostalgia)를 표면적 이미지로 활용한 것이 그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도시를 시각적 상품으로 환원하며, 도시의 복잡한 역사적·사회적 층위를 평면화한다. 미원 권(Miwon Kwon)의 표현을 빌리면, 이는 "사이트(site, 장소)를 로케이션(location, 위치)으로 축소시키는" 작업이다.
아이테르의 접근은 다르다. 범일동이라는 장소는 미적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동시대 미술이 다루어야 할 의제이다. 시장경제와 산업의 흔적, 이주민의 노동과 생활, 항만도시의 이동성과 글로벌리티(globality)는 단순히 부산이라는 지역의 특수성이 아니라, 동시대 미술이 전 지구적으로 다루는 핵심 주제들—이주(migration), 노동(labor), 식민성(coloniality), 글로벌화(globalization), 생활세계(life-world)—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범일동을 큐레이팅한다는 것은 따라서 부산이라는 지역을 글로벌 동시대 미술 담론에 접속시키는 작업이다.
이 점에서 아이테르의 실천은 부산비엔날레의 어떤 측면들과 공명하지만, 동시에 결정적인 차이를 가진다. 부산비엔날레는 글로벌 큐레이터의 시각을 부산에 들여와 부산을 그 시각의 한 장으로 다룬다. 반면 아이테르는 부산이라는 도시의 일상적 텍스처에서 출발해 그것을 글로벌 담론과 접속시킨다. 비엔날레가 외부에서 내부로 향하는 운동(outside-in movement)이라면, 아이테르는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는 운동(inside-out movement)이다. 두 운동은 상호 보완적일 수 있지만, 그 구조는 명확히 다르다.
4.2 담론적 연속성: 담론의 시간적 흐름
아이테르의 두 번째 핵심 실천은 담론의 시간적 연속성(discourse continuity)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3장에서 언급한 시간적 누적 구조가 이를 가능하게 한다.
담론의 연속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 차례의 전시나 세미나에서 어떤 의제가 제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산 원도심의 산업적 기억과 노동에 관한 의제, 혹은 항만도시의 이주민 노동에 관한 의제가 제기될 수 있다. 통상적 운영에서 이 의제는 그 전시·세미나의 기간 동안만 가시화되고, 행사가 끝나면 의제도 함께 잊혀진다. 다음 행사는 또 다른 의제로 시작되며, 의제들 사이의 연결은 운영진의 내적 기억에만 존재한다.
아이테르의 시간 구조는 이 의제들을 단절시키지 않는다. 한 전시에서 제기된 의제는 후속 세미나에서 심화되고, 비평 텍스트로 정리되고, 디지털 아카이브에 기록되며, 다음 전시의 기획에 다시 영향을 미친다. 동일한 의제가 다른 작가, 다른 형식, 다른 맥락에서 반복적으로 다뤄지면서 점점 더 풍부하고 정교한 담론적 망(discursive web)을 형성한다.
이러한 연속성은 부르디외가 말한 문화장(field of cultural production)의 자율성을 만들어내는 핵심 메커니즘이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문화장이 외부 경제·정치 권력으로부터 자율성(autonomy)을 갖는 것은, 그 장 내부에서 작동하는 담론의 누적과 인정의 게임이 단기 시장 논리와 독립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한 작가나 한 작품의 가치를 인정하는 일은 단발적 평가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담론적 검증의 결과이다. 아이테르가 만들어내는 담론의 연속성은 이러한 자율적 가치 평가의 기반이 된다.
또한 담론의 연속성은 아이테르의 플랫폼 정체성(platform identity)을 시간 속에서 안정화시킨다. 단일한 전시나 프로젝트가 플랫폼의 정체성을 결정하지 않는다. 5년, 10년에 걸쳐 누적된 담론적 흔적의 집적이 플랫폼이 무엇을 하는 곳인가를 외부에 가시화한다. 작가, 큐레이터, 비평가, 컬렉터, 기관이 아이테르와 협업할지 결정할 때, 그들이 보는 것은 한 차례의 전시가 아니라 누적된 담론적 정체성이다.
4.3 관계 밀도: 깊이 있는 결속의 구축
세 번째 핵심 실천은 관계 밀도(relationship density)를 높이는 작업이다. 아이테르의 전략은 단순히 많은 사람을 플랫폼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행위자들 사이에서 깊은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점은 플랫폼 자본주의의 일반적 논리와 차별화된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같은 대형 디지털 플랫폼은 가능한 한 많은 사용자를 확보하고, 가능한 한 많은 콘텐츠를 생산·소비하게 하는 양적 확장 전략을 추구한다. 이러한 플랫폼에서 한 사용자가 다른 사용자와 맺는 관계의 깊이는 매우 얕다. 알고리즘(algorithm)은 표면적 상호작용(좋아요, 댓글, 공유)을 측정할 뿐 깊이 있는 담론적 관계는 측정하지 않는다.
아이테르의 플랫폼 논리는 이와 반대 방향을 향한다. 적은 수의 작가, 비평가, 큐레이터, 컬렉터, 연구자가 플랫폼 안에서 반복적으로 만나며, 시간이 갈수록 더 깊은 협업과 신뢰 관계를 만든다. 한 작가가 아이테르와 한 차례의 전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속 세미나에서 자신의 작업을 더 깊이 논의하고, 비평 텍스트의 대상이 되며, 디지털 인터뷰로 기록되고, 다음 협업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한 비평가는 일회적 도록 텍스트를 쓰는 것이 아니라 아이테르의 다양한 프로젝트에 지속적으로 글을 기고하면서 플랫폼의 담론적 정체성에 깊이 관여한다.
이러한 관계의 밀도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이 강조하는 "결속의 강도"(strength of ties)와 관련된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사회적 현상을 이해할 때 개별 행위자의 본질보다는 행위자들 사이의 결속이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고 유지되는가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한 결속(strong ties)은 사회적 현실을 안정화하며, 새로운 가능성의 기반이 된다. 아이테르가 만들어내는 관계의 밀도는 플랫폼이 단순한 행사 진행자가 아니라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사회적 현실을 만들어내는 행위자임을 보여준다.
4.4 세미나 구조: 세미나의 인프라적 기능
아이테르의 운영에서 세미나(seminar)는 부수적 프로그램이 아니라 핵심 인프라이다. 세미나는 무엇을 하는가? 표면적으로는 작가와 비평가, 학자들이 모여 동시대 미술의 의제들을 논의하는 자리이다. 그러나 플랫폼의 관점에서 세미나는 그 이상의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 세미나는 담론 생산(discourse production)의 직접적 메커니즘이다. 학술적 깊이를 갖춘 세미나는 그 자체로 동시대 미술 담론의 한 부분을 구성한다. 발표자들이 제출하는 텍스트, 토론에서 오가는 논의, 청중의 질문이 모여 새로운 의미가 생산된다. 이 의미는 발표 행위 자체에서 그치지 않고 기록되고, 출판되고, 디지털 아카이브에 누적된다.
둘째, 세미나는 관계망 형성의 결절점(node)이다. 한 차례의 세미나에는 작가, 비평가, 큐레이터, 학자, 연구자, 컬렉터, 일반 관객이 함께 모인다. 이들이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의제를 논의하는 경험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신뢰와 협업의 토대를 만든다. 부르디외가 말한 사회자본(social capital)이 형성되는 구체적 장면이 바로 여기에 있다.
셋째, 세미나는 플랫폼의 학술적·비평적 정당성을 가시화한다. 아이테르가 단순한 갤러리나 이벤트 공간이 아니라 동시대 미술의 진지한 담론 생산자임을 외부에 입증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 중 하나가 깊이 있는 세미나의 지속적 운영이다. 이 정당성은 다시 작가, 비평가, 기관, 컬렉터의 신뢰로 이어진다.
넷째, 세미나는 플랫폼의 미래 인적 자원을 발굴하는 통로이다. 신진 큐레이터, 연구자, 비평가가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플랫폼과 관계를 맺는다. 이들은 미래의 협업자, 연구자, 글쓴이가 될 잠재적 파트너이다.
세미나의 인프라적 기능은 단순한 행사 운영을 넘어선다. 그것은 아이테르 플랫폼의 정체성과 지속성을 만들어내는 핵심 메커니즘이다.
4.5 디지털 아카이브: 흩어진 시간의 재구성
아이테르의 디지털 아카이브(digital archive)는 단순한 기록 보관소가 아니다. 그것은 플랫폼이 자기 자신을 가시화하고, 외부에 자신의 정체성을 제시하며, 내부적으로 새로운 의미 생산의 자원을 만들어내는 인프라이다.
푸코의 아카이브 개념을 다시 환기하자. 푸코에게 아카이브는 "특정 시기에 무엇이 말해질 수 있고 말해질 수 없는가를 결정하는 담론적 규칙의 체계"이다. 즉, 아카이브는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일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현재의 가능성을 구조화하는 인프라이다. 아이테르의 디지털 아카이브는 이러한 푸코적 의미의 아카이브에 가깝다.
구체적으로 아이테르의 디지털 아카이브는 다음과 같은 자료들로 구성된다. 첫째, 전시 기록(exhibition record)이다. 전시 도록, 작품 이미지, 설치 사진, 전시 텍스트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보관된다. 둘째, 세미나 기록이다. 세미나의 발표 자료, 토론 내용, 참여 학자와 비평가의 텍스트가 누적된다. 셋째, 작가 인터뷰와 작품 노트(artist interview and work note)이다. 작가의 작업 과정과 사유를 담은 콘텐츠가 정기적으로 생산된다. 넷째, 큐레이토리얼 노트와 도시 연구 자료(curatorial note and urban research)이다. 부산 원도심의 역사, 범일동의 도시적 텍스처, 동시대 미술 담론과의 접점에 관한 연구 자료가 축적된다. 다섯째, 글로벌 동시대 미술 뉴스와 비평이다. 아이테르가 자체적으로 큐레이팅한 글로벌 미술 담론의 흐름이 정리된다.
이 다섯 가지 자료의 집적은 단순한 양적 누적이 아니라 구조적 변환을 만들어낸다. 각각의 자료는 다른 자료와 연결될 때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한 작가의 인터뷰는 그 작가의 전시 기록과 연결되어 더 풍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고, 그 전시는 그것이 다뤘던 의제에 관한 세미나 기록과 연결되어 더 깊은 담론적 위치를 갖는다. 디지털 아카이브의 하이퍼링크적 구조(hyperlinked structure)는 이러한 연결을 가시화하고 항시적으로 작동하게 만든다.
또한 디지털 아카이브는 시간성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통상적 전시는 시작과 끝이 있는 단속적(discrete) 시간 구조를 갖지만, 디지털 아카이브는 모든 과거의 프로젝트를 현재의 시점에서 동시에 접근 가능하게 만든다. 5년 전의 전시 기록과 어제의 비평 텍스트가 같은 페이지에서 함께 보일 수 있다. 이는 단순한 검색 편의성을 넘어, 플랫폼의 시간성 자체를 재구성한다.
4.6 제도적 담론: 제도와의 매개
마지막으로 본 장은 아이테르가 제도 미술관 및 학술 기관과 맺는 관계를 다룬다. 아이테르는 단순한 독립예술공간으로 머무르지 않고, 국립현대미술관(MMCA,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서울시립미술관(SeMA, Seoul Museum of Art) 등 한국의 주요 제도 미술관들과 세미나 협업, 담론 협력을 통해 제도적 담론(institutional discourse)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적 관계는 양가적 의미를 갖는다. 한편으로 제도와의 협업은 플랫폼의 정당성을 강화하고, 자원과 기회를 확대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플랫폼의 자율성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과 안드레아 프레이저(Andrea Fraser)가 지적했듯이, 제도 비판(institutional critique)의 역사는 제도 외부에 있던 비판적 실천이 어떻게 제도 내부로 흡수되어 결국 제도의 한 형식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이기도 하다.
아이테르의 전략은 이러한 양가성을 의식적으로 다룬다. 제도와의 협업은 일방적 흡수가 아니라 상호적 매개 관계(mutual mediation)로 설정된다. 아이테르는 제도 미술관이 자체적으로 다루기 어려운 의제, 형식, 관계망을 제공하며, 제도 미술관은 아이테르가 자체적으로 도달하기 어려운 규모, 자원, 가시성을 제공한다. 이러한 상호성 위에서 양측은 각각의 자율성을 유지하며 공동의 담론적 영토를 확장한다.
이러한 하이브리드 모델(hybrid model)의 의의는 적지 않다. 한국 미술 생태계는 오랫동안 "제도 vs 독립", "공공 vs 민간", "중심 vs 주변"이라는 이분법으로 구조화되어 왔다. 아이테르의 실천은 이러한 이분법을 넘어선 새로운 위치를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제도의 자원을 활용하면서도 독립적 비평성을 유지하고, 부산이라는 지역적 거점에서 출발하면서도 서울·국제적 담론과 접속하는 모델이다.
4.7 종합: 도시-담론-아카이브의 브리꼴라주적 접합
본 장에서 살펴본 다섯 가지 실천—도시 번역, 담론 연속성, 관계 밀도, 세미나 인프라, 디지털 아카이브, 제도 매개—은 각기 다른 영역에서 작동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통합적 브리꼴라주 실천의 다양한 측면들이다. 이 실천의 핵심은 부산 원도심이라는 도시적 자원, 동시대 미술의 담론적 자원, 디지털 기술의 인프라적 자원, 제도 미술관의 정당성 자원을 이질적으로 결합하여 새로운 문화 인프라(cultural infrastructure)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이 결합은 사전 설계가 아니라 사용 가능한 자원의 한계 안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브리꼴라주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임시적 결합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축적되어 플랫폼의 구조적 인프라가 된다는 점에서 구성적(constructive)이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도시-담론-아카이브의 접합이 어떻게 구체적인 비즈니스 모델과 상징자본의 형성으로 이어지는가를 분석한다.
5장. 브리꼴라주 실천 ②: 비즈니스 모델과 상징자본의 다층적 구축
5.1 두 가지 경제의 동시적 작동
부르디외는 문화장을 분석하면서, 그 장이 두 가지 상이한 경제 원리에 의해 동시적으로 작동한다고 보았다. 한편에는 단기적·상업적 경제(short-term commercial economy)가 있다. 이 경제에서는 작품과 서비스가 시장에서 가격을 통해 거래되고, 즉각적 수익을 발생시킨다. 다른 한편에는 장기적·상징적 경제(long-term symbolic economy)가 있다. 이 경제에서는 작품과 작가, 큐레이터와 플랫폼이 동료들의 인정, 비평적 평가, 학술적 정당성을 통해 상징자본(symbolic capital)을 축적한다. 부르디외는 이 두 경제가 서로 독립적이지만 동시에 깊이 얽혀 있다고 보았다. 단기 시장에서의 성공이 곧 장기 상징적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으며, 때로는 정반대로 작용한다. 그러나 장기 상징적 성공은 결국 안정적인 단기 시장 성공의 기반이 된다.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비즈니스 모델(business model)은 이 두 경제의 동시적 작동을 의식적으로 설계한다. 3장에서 살펴본 세 가지 축—전시기획 용역 사업, 작품 판매, 교육 및 연구 프로젝트—은 각기 두 경제에 서로 다른 비중으로 관여한다. 본 장에서는 이 세 축이 어떻게 단기 경제와 장기 상징적 경제를 결합하며 작동하는가를 더 깊이 분석한다.
5.2 전시기획 용역 사업의 이중 작동
전시기획 용역 사업은 표면적으로 보면 가장 명확한 단기 경제 활동이다. 외부 의뢰 기관(병원, 호텔, 기업, 공공기관)으로부터 비용을 받고 전시 기획과 설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일종의 B2B(Business-to-Business, 기업 간 거래) 서비스 사업이다. 그러나 이 사업이 플랫폼 전체의 작동 구조 안에서 갖는 의미는 단순한 매출 발생을 넘어선다.
첫째, 전시기획 용역은 플랫폼의 담론적 영토를 외부 공간으로 확장하는 통로이다. 의뢰 기관의 공간—병원 로비(hospital lobby), 호텔 라운지(hotel lounge), 기업 본사, 공공기관 전시실—은 아이테르의 큐레이토리얼 사유가 실제로 작동하는 공간이 된다. 이 공간들은 단순히 전시가 진행되는 외부 장소가 아니라, 아이테르가 다루는 의제가 새로운 맥락에서 검증되고 변형되는 장소이다.
예를 들어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동시대 미술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를 묻는 일은 단순한 장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의료 공간(medical space)의 권력 구조, 환자와 의료진의 관계, 치유의 미학(aesthetics of healing), 도시 안에서 병원이라는 시설이 갖는 사회적 위치 같은 복합적 질문을 동반한다. 아이테르가 병원 전시를 기획할 때 그 기획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큐레이토리얼 답변이며, 이 답변은 다시 아이테르의 담론적 정체성을 풍부하게 만든다.
둘째, 전시기획 용역은 작가와의 새로운 협업 가능성을 연다. 자체 공간(범일가옥)의 물리적·재정적 제약 안에서 진행하기 어려운 규모와 형식의 협업이 외부 공간 프로젝트를 통해 가능해진다. 큰 규모의 설치 작업(installation work), 장기간의 사이트-스페시픽 작업, 다수 작가의 공동 작업이 이러한 외부 프로젝트에서 시도될 수 있다. 이는 작가에게도 플랫폼에도 자산이 된다.
셋째, 전시기획 용역은 의뢰 기관 자체를 플랫폼의 확장된 행위자 네트워크(extended actor network)로 편입시킨다. 한 차례의 용역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뢰 기관이 지속적인 컬렉터, 후원자, 협업 파트너로 발전할 가능성이 열린다. 부르디외가 강조한 사회자본의 축적이 이 통로를 통해 일어난다.
이러한 다층적 작동 덕분에 전시기획 용역은 단순한 외주 사업이 아니라, 플랫폼의 핵심 운영 구조에 통합된 활동이 된다. 매출은 발생하지만 그 매출은 플랫폼의 담론적 정당성과 행위자 네트워크의 확장 위에서만 안정적으로 발생한다. 즉, 단기 경제는 장기 상징적 경제 위에서 작동한다.
5.3 작품 판매의 상징자본 메커니즘
작품 판매 역시 유사한 이중 작동 구조를 갖는다. 아이테르의 작품 판매는 두 가지 점에서 통상적 갤러리 판매와 구분된다.
첫째, 판매되는 것이 작품만이 아니라 작품의 담론적 네트워크 전체라는 점이다. 컬렉터가 아이테르를 통해 작품을 구매할 때, 그 컬렉터는 단순히 미적 오브제(aesthetic object) 하나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둘러싼 비평적 텍스트, 작가 인터뷰, 전시 이력, 큐레이토리얼 노트, 도시적 맥락 연구, 관련 세미나 기록의 네트워크에 접근하게 된다. 이 네트워크는 작품의 의미를 풍부하게 만들고, 시간이 갈수록 그 의미가 확장된다.
이는 부르디외적 의미에서 작품에 부가되는 상징자본을 가시화하고 안정화한다. 작품의 가치는 시장에서의 가격 변동에만 의존하지 않고, 그 작품이 위치한 담론적 네트워크의 깊이와 안정성에 의해 뒷받침된다. 컬렉터에게 이는 안정적 가치 보장의 의미를 갖는다. 한 작품을 소유한다는 것은 단기 시장 변동에 노출되는 일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누적되는 담론적 가치(discursive value)에 참여하는 일이 된다.
둘째, 판매 과정 자체가 컬렉터 신뢰(collector trust)의 형성 과정이다. 컬렉터는 일회적 구매자가 아니라 플랫폼의 장기적 동맹자(long-term ally)로 설정된다. 작품을 구매한 컬렉터는 그 작가의 후속 전시에 초대되고, 관련 세미나에 참여할 수 있으며, 평론과 인터뷰의 우선 수신자가 된다. 이러한 지속적 관계는 컬렉터에게 단순한 소유자가 아니라 플랫폼의 행위자라는 위치를 부여한다.
이러한 컬렉터 신뢰 모델은 한국 미술시장의 일반적 구조와 비교할 때 차별성을 갖는다. 한국 미술시장은 비교적 단기적 거래 중심으로 작동하는 경향이 있으며, 컬렉터와 갤러리의 관계는 종종 일회적 거래에 머문다. 아이테르는 이러한 구조와 다른 모델—장기적 동맹과 신뢰 위에 작동하는 컬렉터 관계—을 추구한다. 이는 단순히 윤리적 선택이 아니라 플랫폼의 지속성을 위한 전략적 결정이다.
또한 이러한 모델은 작가에게도 의미가 있다. 작가의 작품이 단기 시장의 변동에 휘둘리지 않고 장기적 담론적 가치 위에서 평가되는 환경은, 작가가 더 실험적이고 비평적인 작업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작가는 다음 작품이 즉시 팔리지 않을 것에 대한 불안 없이 작업에 집중할 수 있고, 플랫폼은 그 작업의 담론적 가치를 장기적으로 축적해 간다.
5.4 교육의 플랫폼 엔진 기능
교육 및 연구 프로젝트가 플랫폼의 엔진(platform engine)이 되는 메커니즘은 이미 3장에서 개괄적으로 언급했지만, 본 장에서는 그 구체적 작동 방식을 더 깊이 분석한다.
큐레이터 교육 프로그램의 작동을 보자. 표면적으로 큐레이터 교육은 학습자에게 큐레이팅(curating)의 이론과 실무를 가르치는 교육 서비스이다. 학습자는 수강료를 지불하고 일정 기간 동안 강의, 워크숍(workshop), 현장 실습에 참여한다. 이는 단순한 평생 교육 사업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러나 플랫폼의 관점에서 큐레이터 교육은 다음과 같은 다층적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 학습자들이 플랫폼의 미래 협업자 풀(future collaborator pool, 미래 협업자 모음)을 형성한다. 교육 과정에 참여한 신진 큐레이터들 중 일부는 졸업 후 아이테르의 보조 큐레이터(assistant curator), 객원 큐레이터(guest curator), 협업 큐레이터로 발전한다. 둘째, 학습자들은 플랫폼의 담론을 외부로 확산시키는 매개자(mediator)가 된다. 이들은 졸업 후 다른 미술기관, 갤러리, 매체에서 일하면서 자신이 아이테르에서 학습한 큐레이토리얼 사유를 적용한다. 이는 아이테르의 담론적 영향력을 플랫폼 외부로 확장한다.
셋째, 교육 과정 자체가 플랫폼의 담론 생산 메커니즘이 된다. 학습자들이 진행하는 큐레이토리얼 프로젝트, 연구 발표, 워크숍 결과물은 플랫폼의 디지털 아카이브에 누적되며, 새로운 의미 생산의 자원이 된다.
연구 프로젝트와 출판 사업도 유사한 다층 기능을 수행한다. 학술적 깊이를 갖춘 출판물은 플랫폼의 정당성을 외부에 입증하는 인프라이며, 동시에 플랫폼의 담론이 학술 영역으로 확장되는 통로이다. 출판물의 필자들은 미래의 협업자이며, 출판물의 독자들은 플랫폼의 잠재적 행위자 네트워크이다.
이러한 작동을 통해 교육·연구 프로젝트는 단순한 부가 사업이 아니라 플랫폼의 미래를 만드는 엔진으로 기능한다. 즉각적 매출은 다른 두 축(전시기획 용역, 작품 판매)에 비해 작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플랫폼의 지속성과 확장성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활동이다.
5.5 자본 다층화 전략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가지 축의 운영을 종합하면, 아이테르 범일가옥은 의식적으로 자본 다층화 전략(capital diversification strategy)을 추구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부르디외는 자본을 경제자본(economic capital), 문화자본(cultural capital), 사회자본(social capital), 상징자본(symbolic capital)의 네 가지로 구분하면서, 이 네 가지 자본이 상호 전환 가능하지만 동시에 각자 독자적 논리를 갖는다고 분석했다. 아이테르의 운영 구조는 이 네 가지 자본 모두를 의식적으로 축적하고 활용한다.
경제자본은 세 축의 활동을 통해 직접적으로 생성된다. 전시기획 용역, 작품 판매, 교육 사업이 매출을 만들고, 이 매출은 플랫폼의 운영 비용을 충당하며 새로운 프로젝트의 자원이 된다.
문화자본은 세미나, 출판, 연구, 디지털 아카이브를 통해 축적된다. 동시대 미술 담론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비평적 사유, 학술적 정당성, 도시 연구의 전문성이 플랫폼에 누적되며, 이는 다른 행위자들이 플랫폼과 협업하고자 하는 이유가 된다.
사회자본은 작가, 비평가, 큐레이터, 컬렉터, 기관, 학자의 네트워크를 통해 형성된다. 이 네트워크는 아이테르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 새로운 협업을 모색할 때, 자원을 조달할 때 핵심적 기반이 된다.
상징자본은 위 세 자본의 누적 위에서 형성된다. 그것은 아이테르라는 플랫폼이 동시대 미술 담론 안에서 차지하는 정당한 위치, 권위, 명성이며, 다른 행위자들이 아이테르와의 협업을 매력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자산이다.
이러한 네 가지 자본의 다층적 축적은 플랫폼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단일 자본에 의존하지 않게 만든다. 경제자본이 일시적으로 부족해도 다른 세 자본이 플랫폼의 작동을 지탱하고, 사회자본의 한 노드(node)가 약화되어도 다른 노드들이 플랫폼을 유지한다. 이는 1세대 대안공간들이 종종 경제자본 부족만으로 폐쇄되었던 구조적 취약성과 극명히 대비된다.
5.6 브리꼴라주적 자본 운용
본 장의 결론으로, 아이테르의 자본 운용 방식 자체가 브리꼴라주적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통상적 사업 모델은 자본의 종류를 명확히 분리하고 각각을 독립적으로 관리한다. 경제자본은 회계상의 매출과 비용으로, 문화자본은 콘텐츠 제작으로, 사회자본은 네트워킹(networking) 활동으로, 상징자본은 홍보와 평판 관리(reputation management)로 별도로 다뤄진다.
아이테르의 운용은 이와 다르다. 하나의 활동—예를 들어 하나의 전시—이 동시에 네 가지 자본을 모두 만들어낸다. 전시는 매출을 발생시키고(경제자본), 담론을 생산하며(문화자본), 행위자 네트워크를 강화하고(사회자본), 플랫폼의 권위를 누적시킨다(상징자본). 이 네 가지 차원은 분리되지 않고 통합적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통합적 운용은 사전 설계가 아니라 사용 가능한 자원의 유기적 결합 위에서 형성된다는 점에서 브리꼴라주적이다. 각각의 프로젝트는 자체의 즉각적 목적을 가지지만, 동시에 플랫폼 전체의 다층적 자본 축적에 기여한다. 한 활동이 어떤 자본을 어떻게 만들어내는가는 사전에 완전히 예측할 수 없으며, 활동의 전개 과정에서 새로운 자본 형태와 결합이 발견된다.
이 점에서 아이테르의 비즈니스 모델은 단순한 "수익 다각화"(revenue diversification) 전략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동시대 미술 플랫폼이 어떻게 지속 가능하면서도 비평적 자율성(critical autonomy)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구조적 답변이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플랫폼의 디지털 인프라와 제도 네트워크가 어떻게 확장성을 만들어내는가를 분석한다.
6장. 디지털 인프라와 제도 네트워크의 확장성
6.1 디지털은 홍보 수단이 아니라 인프라이다
오늘날 동시대 미술 플랫폼(contemporary art platform)에서 디지털은 가장 빈번하게 오해되는 영역이다. 많은 미술 공간들은 디지털을 "홍보 수단"으로 이해한다. 즉, 인스타그램(Instagram)에 전시 사진을 올리고, 페이스북(Facebook) 페이지를 운영하며, 웹사이트(website)에 행사 소식을 게시하는 활동을 디지털 전략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이해 위에서 디지털은 오프라인 활동의 부수적·보조적 도구로 위치된다.
아이테르 범일가옥이 채택하는 디지털 접근은 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디지털은 홍보 수단이 아니라 문화 인프라(cultural infrastructure) 그 자체이다. 그것은 아카이브(archive)를 작동시키는 기술적 기반이며, 담론 순환(discourse circulation)의 매질이며, 관계 연속성(relational continuity)의 토대이며, 플랫폼 자체가 자기 자신을 가시화하는 매체이다. 디지털은 오프라인 활동의 보조가 아니라, 오프라인 활동과 동등하거나 때로는 그 이상의 무게를 갖는 플랫폼의 한 차원이다.
이러한 이해는 데이비드 니보르그(David Nieborg)와 토마스 푀엘(Thomas Poell)이 분석한 "문화 생산의 플랫폼화"(platformization of cultural production)가 갖는 양가성을 의식적으로 다루는 방식이다. 거대 디지털 플랫폼(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유튜브 등)은 콘텐츠의 가시성(visibility)을 알고리즘(algorithm)으로 통제하며, 사용자의 데이터를 수익화하고, 콘텐츠의 형식을 표준화한다. 한 미술 공간이 인스타그램에만 의존할 때, 그 공간의 가시성과 담론은 결국 거대 플랫폼의 알고리즘에 종속된다.
아이테르의 전략은 자체 디지털 인프라—웹사이트와 자체 아카이브 시스템(archive system)—를 구축하는 데 무게를 둔다. 이는 거대 플랫폼을 거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여전히 외부 접점(external touchpoint)으로 활용된다. 그러나 플랫폼의 핵심 자산인 아카이브와 담론은 자체 인프라 위에 축적되며, 그 통제권이 플랫폼에 남는다.
6.2 반복 참여: 광고가 아닌 관계 기반 성장
아이테르의 디지털 성장 구조는 통상적 디지털 마케팅(digital marketing) 모델과 차별화된다. 일반적인 디지털 성장은 광고를 통한 도달(reach) 확대를 핵심 지표로 삼는다. 더 많은 사람에게 콘텐츠가 노출될수록, 더 많은 클릭(click)과 방문이 발생할수록 성공으로 측정된다. 이러한 모델에서 사용자는 일회적 방문자이며, 광고 비용을 지불해야만 지속적 도달이 가능하다.
아이테르의 성장은 이와 다른 구조를 갖는다. 핵심 지표는 도달이 아니라 반복 참여(repeat engagement), 즉 같은 사용자가 반복적으로 플랫폼에 접속하고 깊이 있게 콘텐츠를 소비하는 정도이다. 이러한 성장은 광고 비용에 의존하지 않고, 콘텐츠 자체의 질과 깊이에 의해 추동된다.
이러한 차이는 플랫폼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광고 기반 성장(advertising-based growth)에서 사용자는 콘텐츠 소비자이며, 그 관계는 일회적·표면적이다. 반복 참여 기반 성장에서 사용자는 플랫폼의 행위자 네트워크에 점진적으로 편입되는 잠재적 협업자이며, 그 관계는 지속적·심층적이다. 한 연구자가 아이테르의 디지털 아카이브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면서 플랫폼의 담론에 익숙해진다면, 그 연구자는 미래에 플랫폼의 협업 학자, 세미나 발표자, 출판 필자가 될 잠재적 가능성을 가진다.
이러한 성장 구조는 시간이 갈수록 안정성이 높아진다. 광고 기반 성장은 광고 비용 투입이 중단되면 즉시 감소하지만, 반복 참여 기반 성장은 콘텐츠 자산(content asset)이 누적될수록 자체적인 성장 모멘텀(growth momentum)을 갖는다. 디지털 아카이브에 축적된 자료들은 시간이 지나도 가치를 잃지 않으며, 오히려 다른 자료들과의 연결을 통해 의미가 더해진다.
또한 이러한 성장은 플랫폼의 비평적 자율성(critical autonomy)을 보호한다. 광고 알고리즘에 종속된 콘텐츠는 알고리즘이 선호하는 형식—짧고 자극적이고 즉각적인—으로 점차 수렴할 위험이 있다. 반복 참여 기반 콘텐츠는 깊이와 복잡성을 유지할 수 있으며, 이는 플랫폼이 진지한 동시대 미술 담론을 다루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6.3 "읽히는 플랫폼"으로의 이동
아이테르의 디지털 전략의 한 가지 특징적 표현은 플랫폼이 단순한 SNS 계정이 아니라 "읽히는 플랫폼"(readable platform)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표현은 디지털 콘텐츠의 성격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함축한다.
SNS 콘텐츠의 일반적 특성은 짧음, 즉각성, 시각성이다. 사용자는 빠르게 스크롤(scroll)하면서 콘텐츠를 소비하며, 깊이 있는 텍스트는 환영받지 못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미술 콘텐츠는 종종 작품 이미지의 시각적 매력에 의존하게 되며, 비평적 깊이는 줄어든다.
"읽히는 플랫폼"은 이러한 환경의 반대편을 향한다. 그것은 긴 호흡의 비평 텍스트(long-form critical text), 학술적 깊이를 갖춘 큐레이토리얼 노트, 깊이 있는 작가 인터뷰, 도시 연구 자료가 진지하게 읽히는 디지털 공간을 만든다. 이는 단순히 콘텐츠를 길게 쓴다는 의미가 아니라, 콘텐츠의 형식 자체가 깊은 읽기를 가능하게 하도록 설계된다는 의미이다. 폰트(font), 레이아웃(layout), 하이퍼링크(hyperlink) 구조, 검색 시스템, 큐레이션 방식이 모두 깊이 있는 읽기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조직된다.
이러한 디지털 환경은 플랫폼의 사용자를 단순한 소비자가 아닌 독자(reader)로 위치시킨다. 독자는 콘텐츠를 시간을 들여 읽고, 그 의미를 곱씹고, 다른 독자들과 그 의미를 공유한다. 이러한 독자 공동체(reader community)가 디지털 플랫폼의 핵심 자산이며, 광고 모델에 의존하지 않는 지속 가능한 성장의 토대이다.
6.4 제도적 신뢰성의 형성
디지털 인프라와 함께 아이테르의 확장성을 결정하는 또 다른 축은 제도적 신뢰성(institutional credibility)의 형성이다. 동시대 미술 생태계에서 제도와의 관계는 플랫폼의 정당성과 영향력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이다.
아이테르는 국립현대미술관(MMCA,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서울시립미술관(SeMA, Seoul Museum of Art)과 같은 한국의 주요 제도 미술관(institutional museum)들과 세미나 협업, 담론 협력의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협업은 일회적 행사가 아니라 장기적 관계의 형성으로 설정된다. 한 차례의 세미나가 다음 협업의 기반이 되고, 한 명의 큐레이터·학자가 다른 협업의 매개자가 되며, 한 출판 프로젝트가 다음 프로젝트의 모델이 된다.
이러한 제도적 관계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첫째, 그것은 아이테르의 담론적 정당성(discursive legitimacy)을 외부에 입증한다. 국립현대미술관과 협업하는 플랫폼은 단순한 지역 독립 공간이 아니라 한국 동시대 미술 담론의 진지한 참여자임을 보여준다. 이 정당성은 다른 행위자들(작가, 비평가, 컬렉터, 외부 기관)이 플랫폼과 협업할지 결정할 때 중요한 신호(signal)가 된다.
둘째, 제도적 관계는 플랫폼이 활용할 수 있는 자원과 가시성의 폭을 확대한다. 제도 미술관과의 공동 세미나는 플랫폼 단독으로 도달하기 어려운 청중과 학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출판 협업은 플랫폼의 출판 자원과 배포 채널을 확대한다. 이러한 자원 확장은 플랫폼의 자체 운영 비용을 줄이면서도 활동의 규모를 확대할 수 있게 한다.
셋째,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제도적 관계가 플랫폼의 자율성을 침식하지 않는 방식으로 설계된다는 점이다. 이는 4장에서 언급한 하이브리드 모델(hybrid model)의 핵심이다. 제도 미술관은 아이테르의 의제와 큐레이토리얼 시각을 자신의 프로그램에 흡수하지 않으며, 아이테르는 제도 미술관의 운영 논리에 종속되지 않는다. 두 행위자는 각자의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공동의 담론적 영토를 형성한다.
6.5 네트워크 확장성: 공간이 아닌 관계로 확장하기
아이테르의 장기 성장 전략은 공간 확대 중심이 아니다. 통상적 미술 공간의 성장은 더 큰 갤러리로 이전하거나, 분점(branch)을 늘리거나, 더 많은 전시를 하는 방식으로 가시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 중심 성장(space-centered growth)은 종종 부채와 운영 비용의 증가로 이어지며, 플랫폼의 비평적 자율성을 위협할 수 있다.
아이테르의 성장 전략은 네트워크 확장성(network scalability)에 무게를 둔다. 즉, 공간의 물리적 규모가 아니라 플랫폼이 관여하는 행위자 네트워크의 밀도와 폭을 확대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성장은 다음과 같은 구체적 차원에서 일어난다.
첫째, 작가 네트워크의 확대이다. 한 차례의 전시로 끝나는 일회적 작가가 아니라, 플랫폼과 장기적 협업 관계를 갖는 작가들의 수가 늘어난다. 이 작가들은 플랫폼의 다양한 프로젝트(전시, 세미나, 출판, 외부 기관 협업)에 참여하면서 플랫폼의 담론적 자산을 풍부하게 만든다.
둘째, 비평가·학자 네트워크의 확대이다. 플랫폼의 출판물에 글을 쓰는 필자들, 세미나에서 발표하는 학자들, 디지털 콘텐츠를 제작하는 비평가들의 수가 늘어난다. 이들은 플랫폼의 학술적·비평적 깊이를 강화한다.
셋째, 기관 네트워크의 확대이다. 국내외 미술관, 대학, 문화 재단(cultural foundation), 연구 기관과의 협업 관계가 확대된다. 이는 플랫폼의 활동 영역을 부산에서 서울로, 그리고 국제로 확장시킨다.
넷째, 컬렉터·후원자 네트워크의 확대이다. 플랫폼과 장기적 신뢰 관계를 갖는 컬렉터와 후원자(patron)의 수가 늘어나며, 이는 플랫폼의 경제적 안정성을 강화한다.
이러한 네트워크 확장은 공간 확장과 달리 한계 비용(marginal cost)이 낮다. 새로운 갤러리를 여는 데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지만, 새로운 작가나 학자와 협업을 시작하는 데는 그러한 비용이 들지 않는다. 또한 네트워크는 시간이 갈수록 자체적인 성장 모멘텀을 가진다. 한 명의 협업자가 다른 협업자를 매개하고, 한 프로젝트가 다음 프로젝트를 유도한다. 이는 부르디외가 말한 사회자본의 자기 강화적 성격(self-reinforcing nature)이다.
6.6 지역에서 글로벌로: 확장의 경로
네트워크 확장성의 가장 흥미로운 가능성은 지역에서 글로벌로의 확장이다. 부산 원도심이라는 거점에서 시작한 플랫폼이 어떻게 한국, 아시아,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글로벌 남반구)의 도시 담론 네트워크로 확장될 수 있는가?
이 확장의 경로는 단순한 규모 확대가 아니라, 도시 내러티브(urban narrative)의 보편성과 연결성 위에서 작동한다. 범일동이라는 장소가 다루는 의제—항만도시의 이동성, 산업적 노동의 기억, 이주민의 생활세계, 시장경제의 일상—은 부산만의 특수한 의제가 아니다. 그것은 홍콩, 카오슝(Kaohsiung), 호치민(Ho Chi Minh City), 마닐라(Manila), 다카(Dhaka), 부산, 그리고 더 나아가 라고스(Lagos), 다카르(Dakar), 아비장(Abidjan) 같은 글로벌 사우스의 항만도시들이 공유하는 의제이다.
천관흥(Chen Kuan-Hsing)이 『방법으로서의 아시아』(*Asia as Method*, 2010)에서 제안했듯이, 아시아의 도시들은 서구 중심의 글로벌 담론을 우회하여 서로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비교될 수 있는 자체적 담론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다. 아이테르의 부산 원도심 큐레이팅은 이러한 아시아 도시 담론 네트워크(Asian urban discourse network)의 한 노드(node)가 될 잠재력을 가진다.
또한 이러한 확장은 글로벌 사우스 담론과의 접속을 통해 더 넓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식민지적 유산(colonial legacy), 산업화 이후의 도시 재편(post-industrial urban reconfiguration), 글로벌화 속의 지역적 노동, 이주와 디아스포라(diaspora, 이산)—이러한 의제들은 부산이라는 도시에 깊이 새겨져 있으며, 동시에 글로벌 사우스 전체가 다루는 핵심 의제이기도 하다. 아이테르가 부산을 큐레이팅하는 작업은 이러한 글로벌 담론과의 직접적 접속의 가능성을 연다.
이러한 확장은 즉각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플랫폼의 초기 단계부터 구조적으로 내장되어 있다. 부산 원도심을 큐레이팅하는 작업이 단순히 지역 미술 활동이 아니라 글로벌 동시대 미술 담론의 한 부분으로 설계되는 것, 그것이 네트워크 확장성의 핵심이다.
이 장에서 살펴본 디지털 인프라와 제도 네트워크의 확장성은 아이테르 범일가옥이 단순한 지역 공간이 아니라 한국과 아시아, 그리고 잠재적으로 글로벌 사우스를 잇는 문화 인프라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가능성과 함께 그것이 직면한 한계와 도전을 비교 분석을 통해 살펴본다.
7장. 한계와 비교 분석, 그리고 장기 전망
7.1 비교의 좌표: 한국 독립예술공간들과의 차별성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의의를 정확히 평가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다른 독립예술공간(independent art space) 및 대안공간(alternative space)들과의 비교가 필요하다. 본 절은 몇 가지 주요 사례와의 비교를 통해 아이테르의 차별성을 명확히 한다.
알트스페이스 LOOP(Alternative Space LOOP)는 1999년 개관한 한국 최초의 비영리(non-profit) 독립예술공간이다. LOOP는 25년 이상 운영되며 한국 동시대 미술의 실험적 거점 역할을 해왔다. 신진 작가(emerging artist) 발굴, 큐레이터 공모(curator open call), 미디어 아트(media art) 실험 등 LOOP의 활동은 한국 미술 생태계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양지윤 디렉터는 인터뷰에서 25년 된 "대안공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매 순간 실천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점이 도전적이지만 동시에 즐겁다고 밝힌 바 있다. LOOP의 성과는 분명하지만, 그 성장 모델은 여전히 서울 홍대 일대라는 지역적 거점과 신진 작가 지원이라는 핵심 미션 위에 있다.
아마도예술공간(Amado Art Space)은 2013년 한남동에 개관한 비영리 예술공간이다. 아마도는 한국 동시대 미술 담론을 생산하는 핵심 독립공간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연례 큐레이터·작가 지원 프로그램(annual support program), 사진상(photography award), 전시상(exhibition award) 등을 운영해 왔다. 아마도의 강점은 비평적 깊이와 큐레이토리얼 실험(curatorial experimentation)이며, 1970~80년대 주거용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는 공간의 물리적 특성도 그 정체성의 일부를 이룬다.
사루비아다방(Project Space SARUBIA)은 1999년 인사동에서 시작된 비영리 갤러리로, 미술·건축·음악·무용·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실험적 작업을 지원해 왔다. 사루비아는 매년 공모를 통해 발굴된 신진 작가들을 지원하며, 오랜 시간 동안 한국 실험예술(experimental art)의 한 축을 담당해 왔다.
이러한 1세대·2세대 독립예술공간들과 비교했을 때 아이테르 범일가옥은 몇 가지 점에서 차별화된다. 첫째, 지역적 거점이다. LOOP, 아마도, 사루비아가 모두 서울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아이테르는 부산 원도심에 위치한다. 이는 단순한 지리적 차이가 아니라 플랫폼이 다루는 의제와 담론적 영토의 차이를 만든다. 둘째, 운영 모델이다. 위 공간들이 기본적으로 비영리 모델 위에서 작가 지원을 핵심 미션으로 삼는다면, 아이테르는 전시기획 용역, 작품 판매, 교육·연구의 3축 비즈니스 모델(three-axis business model) 위에서 운영된다. 셋째, 도시성과의 결합이다. 아이테르는 부산 원도심이라는 도시적 자원을 플랫폼의 핵심 콘텐츠로 통합하며, 이는 다른 공간들이 작가나 작품 중심으로 운영되는 것과 구별된다.
이러한 비교는 우열의 평가가 아니다. 각 공간은 자신의 시기, 지역, 미션에 맞는 형식을 발전시켜 왔으며, 아이테르의 모델 역시 부산이라는 지역과 현재의 시기적 조건 위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비교를 통해 분명해지는 것은, 아이테르가 한국 독립예술공간의 역사에서 새로운 범주의 위치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7.2 한계 ①: 자원과 인적 인프라의 제약
아이테르가 직면한 첫 번째 구조적 한계는 자원과 인적 인프라(human infrastructure)의 제약이다. 부산이라는 지역에서 운영되는 독립적 플랫폼이 도달할 수 있는 자원의 절대량은 서울 중심의 대형 기관에 비해 작다. 후원자(patron), 컬렉터(collector), 협업 기관, 인재 풀(talent pool) 모두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이러한 한계는 플랫폼의 운영에 여러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첫째, 인적 자원의 측면에서 플랫폼의 운영을 담당하는 핵심 인력의 수가 제한적이다. 큐레이터, 코디네이터(coordinator), 비평가, 디지털 콘텐츠 제작자(digital content producer) 같은 다양한 역할이 종종 소수의 인력에게 중첩되며, 이는 운영의 강도를 높이고 번아웃(burnout, 소진)의 위험을 키운다.
둘째, 재정적 자원의 측면에서 플랫폼이 동원할 수 있는 자본의 규모가 제한적이다. 대규모 작가 협업, 국제 전시(international exhibition), 출판 프로젝트(publication project) 같은 활동을 위해서는 상당한 자본이 필요하지만, 자체 수익만으로 이를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공공 지원금(public funding), 기업 후원(corporate sponsorship), 컬렉터 후원 등 외부 자원에 의존해야 하지만, 부산 지역에서 동원 가능한 외부 자원의 규모도 한정적이다.
셋째, 인재 풀의 측면에서 플랫폼과 협업할 수 있는 큐레이터, 비평가, 학자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다. 서울과 달리 부산에는 동시대 미술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인력 풀이 두텁지 않다. 이는 플랫폼이 진행할 수 있는 프로젝트의 다양성과 깊이를 일정 부분 제약한다.
이러한 한계에 대응하는 아이테르의 전략은 부분적으로 이미 6장에서 다룬 네트워크 확장성(network scalability)의 논리에 기반한다. 즉, 부산이라는 지역에 갇히지 않고 서울, 그리고 국제 네트워크와 연결됨으로써 자원과 인적 인프라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확장은 시간이 걸리며, 그 사이의 운영 압박은 플랫폼이 직면한 실제적 도전이다.
7.3 한계 ②: 모델의 재현 가능성과 의존성
두 번째 한계는 아이테르 모델의 재현 가능성(replicability)에 관한 질문이다. 아이테르가 보여주는 플랫폼 모델이 한국 동시대 미술 생태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모델이 다른 지역, 다른 운영진, 다른 조건에서 재현될 수 있는가는 별개의 질문이다.
아이테르의 운영은 부산 원도심이라는 특수한 도시 조건, 운영진의 특정한 학술적·큐레이토리얼 배경, 한국 동시대 미술 생태계의 현 단계라는 시기적 조건 위에서 가능했다. 이러한 조건들이 다른 시공간에서 동일하게 갖춰지기는 어렵다. 또한 아이테르의 성공이 운영진 개인의 역량과 헌신에 의존하는 부분이 크다면, 그 개인이 플랫폼을 떠날 때 플랫폼의 지속성이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가의 질문이 제기된다.
이는 모든 플랫폼이 직면하는 보편적 도전이다. 하워드 베커(Howard Becker)가 『예술 세계』(*Art Worlds*, 1982)에서 강조했듯이, 예술 세계는 다수 행위자들의 협업으로 작동하지만, 그 협업을 조직하고 유지하는 핵심 행위자—그가 "지원 인력"(support personnel)이라 부른—에 종종 과도하게 의존한다. 이러한 의존성을 어떻게 분산시키고, 운영진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가는 플랫폼의 장기적 과제이다.
아이테르가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분산된 큐레이토리얼(distributed curatorial) 구조, 디지털 아카이브를 통한 지식의 외부화(externalization of knowledge), 다층적 행위자 네트워크의 형성은 이러한 의존성을 줄이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산이 충분히 진행되었는가, 그것이 플랫폼의 정체성과 비평적 깊이를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가능한가는 지속적으로 검증되어야 할 질문이다.
7.4 한계 ③: 제도화의 위험
세 번째 한계는 플랫폼의 성장이 가져올 수 있는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의 위험이다. 안드레아 프레이저(Andrea Fraser)가 「제도 비판에서 비판의 제도로」("From the Critique of Institutions to an Institution of Critique", 2005)에서 분석했듯이, 동시대 미술의 비판적 실천은 종종 자신이 비판하던 제도의 한 형식으로 흡수되는 역사적 운동을 보여준다.
아이테르가 제도 미술관과의 협업, 디지털 인프라의 안정화, 비즈니스 모델의 성숙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것 자체가 새로운 제도로 굳어질 위험이 있다. 초기의 실험성과 비평적 자율성(critical autonomy)이 운영의 안정성을 위한 절차와 형식으로 대체되고, 새로운 행위자의 진입이 어려워지며, 플랫폼이 자신의 역사를 반복하는 보수적 구조(conservative structure)로 변할 가능성이다.
이러한 위험은 아이테르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성공적 플랫폼이 직면하는 보편적 위험이다. 부르디외가 분석했듯이, 한 행위자가 문화장 안에서 상징자본을 누적할수록 그 행위자는 점차 자신이 누적한 자본을 보호하는 보수적 위치로 이동하는 경향을 갖는다. 새로운 실험과 비평을 가능하게 했던 한계의 위치에서 점차 새로운 한계를 지키는 정통(orthodoxy)의 위치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 위험에 대한 의식적 대응으로 플랫폼은 지속적인 자기 비판(self-critique)과 재구성의 메커니즘을 내장해야 한다. 새로운 행위자의 진입을 의식적으로 조직하고, 기존 형식을 정기적으로 재검토하며, 외부 비판에 열려 있는 구조를 유지하는 일이다. 이는 어렵고 지속적인 작업이지만, 플랫폼이 자기 자신의 성공에 의해 침몰하지 않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7.5 글로벌 사우스 도시 담론으로의 확장 가능성
이러한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아이테르 범일가옥은 장기적으로 의미 있는 확장 가능성을 가진다. 특히 6장에서 언급한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도시 담론 네트워크로의 확장은 플랫폼의 가장 흥미로운 잠재적 경로이다.
부산이라는 도시는 이러한 확장에 적합한 위치를 가진다. 첫째, 부산은 항만도시이자 산업도시이며 동시에 이주의 도시로서, 글로벌 사우스 다수의 항만도시들과 구조적 유사성을 가진다. 호치민, 마닐라, 카오슝, 자카르타(Jakarta), 콜롬보(Colombo) 같은 도시들이 직면한 의제—식민지 유산(colonial legacy), 산업적 변형, 노동 이주(labor migration), 글로벌 자본과 지역 생활의 충돌—는 부산이 다뤄온 의제와 깊이 공명한다.
둘째, 부산은 동아시아 비엔날레 네트워크(East Asian biennial network)의 한 축을 형성한다.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타이베이비엔날레(Taipei Biennial), 요코하마트리엔날레(Yokohama Triennale), 후쿠오카아시아미술트리엔날레(Fukuoka Asian Art Triennale) 같은 행사들은 동아시아의 도시들이 서로 연결되며 글로벌 동시대 미술 담론에 참여하는 통로이다. 아이테르는 이러한 비엔날레 네트워크의 공식적 구성원이 아니지만, 그 네트워크와 평행한 독립적 플랫폼 네트워크(parallel independent platform network)를 형성할 가능성을 가진다.
셋째, 글로벌 사우스 큐레이토리얼 담론의 흐름이 이러한 확장에 우호적이다. 발터 미뇰로(Walter Mignolo), 오쿠이 엔웨조(Okwui Enwezor) 등이 발전시킨 탈식민주의·디콜로니얼(decolonial) 큐레이토리얼 담론은 서구 중심의 미술 담론을 우회하여 글로벌 사우스 도시들이 직접 연결되는 새로운 네트워크의 가능성을 제시해 왔다. 인도네시아 콜렉티브(collective) 루앙루파(ruangrupa)가 2022년 도큐멘타 15(Documenta 15)의 예술감독을 맡으며 글로벌 사우스 큐레이토리얼 모델의 가능성을 입증한 사건은 이러한 흐름의 분명한 신호였다.
아이테르가 이러한 글로벌 흐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다면, 부산 원도심이라는 거점에서 시작한 플랫폼이 한국, 아시아, 그리고 글로벌 사우스를 잇는 문화 인프라(cultural infrastructure)의 한 노드로 성장할 가능성이 열린다. 이는 한국 미술 생태계가 서울 중심성(Seoul-centrism)과 서구 종속성(Western dependency)을 동시에 넘어서는 새로운 경로를 의미한다.
7.6 정책·지원 환경의 변수
마지막으로 본 장은 플랫폼의 지속성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 정책·지원 환경의 변수를 짚는다. 한국의 문화예술 지원 정책, 부산광역시의 문화도시(cultural city) 정책, 국립·시립 미술관의 협업 정책, 사립 재단의 후원 환경은 모두 플랫폼의 운영 조건을 형성하는 외부 변수들이다.
이러한 외부 환경은 플랫폼의 직접적 통제 영역 밖에 있지만, 플랫폼의 지속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한국 정부의 문화예술 지원 예산이 축소되거나, 지원 방향이 변화하거나, 부산광역시의 문화 정책이 다른 우선순위로 이동할 때, 플랫폼의 운영 조건도 함께 변화한다.
이러한 외부 의존성을 줄이는 한 가지 방식이 자체 비즈니스 모델(self-sustaining business model)의 강화이다. 전시기획 용역, 작품 판매, 교육·연구의 3축 비즈니스 모델은 플랫폼이 외부 지원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운영비를 충당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그러나 동시대 미술 플랫폼의 활동이 순수하게 시장 논리만으로 운영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하다. 비평적 깊이를 갖춘 세미나, 학술적 출판(academic publication), 신진 작가 지원 같은 활동은 즉각적 수익을 발생시키지 않으면서도 플랫폼의 핵심 활동이다. 이러한 활동을 위한 외부 지원의 확보는 플랫폼의 지속성에 여전히 중요하다.
따라서 플랫폼의 장기 전망은 자체 수익 모델의 강화와 외부 지원 환경의 적극적 활용 사이의 균형 위에서 결정된다. 이 균형은 시기마다 다르게 조정되어야 하며, 플랫폼이 운영 방향의 자율성을 유지하면서도 외부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유연성(flexibility)이 요구된다.
이상의 한계와 가능성에 대한 검토는 아이테르 범일가옥이 한국 미술 생태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그 미래를 균형 있게 평가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다음 결론에서는 이러한 분석을 종합하여 아이테르가 한국 큐레이토리얼 플랫폼 모델로 갖는 의미를 정리한다.
결론: 한국 큐레이토리얼 플랫폼 모델로서의 아이테르 범일가옥
종합
본 보고서는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실천을 "브리꼴라주(bricolage)를 통한 플랫폼 구축"이라는 분석틀로 검토해 왔다. 일곱 개 장에 걸친 분석을 통해 도달한 결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아이테르 범일가옥은 한국 동시대 미술 생태계(contemporary art ecosystem)의 구조적 전환 속에서 등장한 새로운 형식의 문화 인프라(cultural infrastructure)이다. 그것은 1세대 대안공간(alternative space)의 생존형 운영과 제도 미술관(institutional museum)의 거대 행정 구조 사이의 회색지대에서, 부산 원도심이라는 지역적 거점을 활용해 새로운 플랫폼(platform) 모델을 구축하고 있다. 이 모델은 단순한 절충이나 중간자가 아니라 새로운 범주의 위치이다.
둘째, 이 플랫폼의 실천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개념은 브리꼴라주이다. 그러나 본 보고서가 사용한 브리꼴라주는 자원 부족의 미학이 아니라 도시, 담론(discourse), 아카이브(archive), 제도, 디지털이라는 이질적 자원들을 시간 속에서 누적적으로 결합하여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내는 구성적 실천(constructive practice)을 의미한다. 레비스트로스(Lévi-Strauss)의 원형적 개념, 데리다(Derrida)의 일반화, 드 세르토(de Certeau)의 일상적 전술(tactics), 그리고 부르디외(Bourdieu)의 자본 다층화, 부리오(Bourriaud)의 관계미학(relational aesthetics), 포스터(Foster)의 아카이브적 충동(archival impulse), 서르닉(Srnicek)의 플랫폼 자본주의(platform capitalism) 논의가 이 분석틀을 함께 떠받친다.
셋째, 아이테르의 비즈니스 모델(business model)은 단기 경제(short-term economy)와 장기 상징적 경제(long-term symbolic economy)를 동시에 작동시키는 다층적 구조를 갖는다. 전시기획 용역, 작품 판매, 교육 및 연구 프로젝트라는 세 축은 각기 경제자본(economic capital), 문화자본(cultural capital), 사회자본(social capital), 상징자본(symbolic capital)을 동시에 축적하며, 이 다층적 자본은 플랫폼의 지속성과 비평적 자율성(critical autonomy)을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
넷째, 아이테르의 확장성은 공간 규모가 아니라 네트워크 확장성(network scalability)—관계 네트워크의 밀도와 폭—위에서 작동한다. 디지털 인프라(digital infrastructure)는 단순한 홍보 수단이 아니라 아카이브, 담론, 관계의 인프라로 기능하며, 제도 미술관과의 협업은 플랫폼의 자율성을 침식하지 않는 하이브리드 모델(hybrid model)로 설계된다.
다섯째, 이러한 플랫폼 모델은 부산이라는 지역적 거점에서 시작해 한국, 아시아, 그리고 잠재적으로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도시 담론 네트워크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다. 부산이라는 항만도시(port city)의 내러티브(narrative)는 글로벌 사우스 도시들이 공유하는 의제와 깊이 공명하며, 아이테르는 이 공명을 플랫폼 자산(platform asset)으로 전환할 잠재력을 가진다.
학술적 기여
본 연구가 갖는 학술적 기여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 브리꼴라주 개념을 동시대 미술 플랫폼(contemporary art platform)의 분석틀로 정식화했다. 기존의 브리꼴라주 논의는 주로 인류학(anthropology), 문화이론(cultural theory), 디자인, 일상생활 연구에 집중되어 왔으며, 동시대 미술 플랫폼의 운영 양식을 분석하는 데는 충분히 활용되지 못해 왔다. 본 연구는 레비스트로스, 데리다, 드 세르토, 부르디외, 부리오, 포스터, 서르닉의 이론적 자원을 종합하여 "브리꼴라주를 통한 플랫폼 구축"이라는 분석틀을 제안했다.
둘째, 한국 동시대 미술 생태계의 구조적 전환에 대한 새로운 사례 연구(case study)를 제공했다. 1세대 대안공간 연구가 1990년대 후반~2000년대의 한국 미술 생태계를 다뤘다면, 본 연구는 2020년대 플랫폼화(platformization)된 미술 생태계의 새로운 사례를 분석함으로써 한국 동시대 미술 연구에 시간적·이론적 갱신을 더한다.
셋째, 부산이라는 비-수도권 지역의 동시대 미술 실천에 학술적 가시성(academic visibility)을 부여했다. 한국 미술 연구는 오랫동안 서울 중심성(Seoul-centrism)에 의해 구조화되어 왔으며, 부산을 포함한 지역의 실천은 충분히 분석되지 못해 왔다. 본 연구는 아이테르 범일가옥을 통해 부산의 동시대 미술 실천이 갖는 의의와 가능성을 학술적으로 검토했다.
넷째, 글로벌 사우스 큐레이토리얼 담론(curatorial discourse)과 한국 미술 생태계의 접속 가능성을 시론적으로 제기했다. 부산이라는 항만도시의 내러티브가 글로벌 사우스 도시 담론과 어떻게 공명할 수 있는가, 그리고 한국 미술 생태계가 서울 중심성과 서구 종속성(Western dependency)을 동시에 넘어설 수 있는 경로가 무엇인가에 대한 시론적 답변을 제시했다.
실천적 시사점
본 연구는 학술적 기여뿐 아니라 실천적 시사점(practical implication)도 갖는다.
첫째, 한국 독립예술공간(independent art space)과 동시대 미술 플랫폼을 운영하거나 기획하는 실무자들에게, 자원 제약 속에서도 지속 가능한 비평적 플랫폼을 구축할 수 있는 모델적 사례를 제공한다. 자체 비즈니스 모델, 디지털 아카이브 인프라, 제도와의 협업 관계의 균형적 조합은 다른 플랫폼들에게도 참고할 만한 전략이 된다.
둘째, 부산 및 다른 비-수도권 지역의 문화 정책 입안자(cultural policy maker)들에게, 지역 기반 미술 플랫폼이 단순한 지역 문화 활성화 도구가 아니라 글로벌 동시대 미술 담론에 참여하는 자율적 인프라(autonomous infrastructure)가 될 수 있다는 시각을 제공한다. 이는 지역 문화 정책이 관광 진흥(tourism promotion)이나 도시 브랜딩(city branding)에 종속되지 않고 비평적 문화 인프라의 구축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방향성을 시사한다.
셋째, 컬렉터, 후원자, 협업 기관에게, 단기적 시장 가치가 아닌 장기적 담론적 가치(discursive value) 위에서 작동하는 미술 플랫폼과의 관계 맺기에 대한 모델을 제공한다. 이러한 관계는 컬렉터와 후원자에게도 단기 거래 이상의 의미—동시대 미술 담론의 한 행위자로서의 위치—를 부여한다.
후속 연구의 방향
본 연구는 시작점이며, 다음과 같은 후속 연구 방향을 제안한다.
첫째,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시계열적 발전에 대한 종단 연구(longitudinal study)가 필요하다. 본 보고서는 현재 시점에서의 플랫폼 구조를 분석했지만, 이 플랫폼이 향후 5년, 10년에 걸쳐 어떻게 변화하는가, 본 보고서가 제기한 한계들이 어떻게 다뤄지는가는 지속적 추적 연구를 통해서만 답할 수 있다.
둘째, 한국 내 다른 플랫폼 모델과의 체계적 비교 연구(comparative study)가 필요하다. 본 연구는 LOOP, 아마도예술공간(Amado Art Space), 사루비아다방(Project Space SARUBIA) 등과의 비교를 간략히 다뤘지만, 더 본격적인 비교 분석—운영 모델, 비즈니스 구조, 담론적 정체성, 디지털 인프라 등의 측면에서—은 한국 동시대 미술 플랫폼의 다양성과 진화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셋째, 글로벌 사우스 플랫폼 네트워크(Global South platform network)와의 비교·접속에 대한 국제적 비교 연구가 필요하다. 인도네시아 루앙루파(ruangrupa), 필리핀 그린 파파야 아트 프로젝트(Green Papaya Art Projects), 베트남 산 아트(Sàn Art), 인도 코지(KHOJ) 같은 플랫폼들과의 비교는 아이테르가 어떻게 글로벌 플랫폼 네트워크에 위치할 수 있는가에 대한 더 명확한 답변을 제공할 것이다.
넷째, 동시대 미술 플랫폼의 디지털 인프라에 대한 기술적·미디어적 분석이 필요하다. 본 연구는 디지털 인프라의 의미와 기능을 다뤘지만, 그 기술적 작동 방식—데이터 구조(data structure), 검색 시스템(search system), 사용자 인터페이스(user interface), 접근성(accessibility) 등—에 대한 더 세밀한 분석은 미디어 연구(media studies)와 디지털 인문학(digital humanities)의 자원을 동원해야 가능하다.
마치며
아이테르 범일가옥은 아직 완성된 기관(institution)이 아니다. 그것은 작동 중인 문화 인프라이며, 매 순간 자기 자신을 재구성하면서 진화하고 있는 플랫폼이다. 본 보고서가 그린 그림은 어떤 종착점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ongoing)의 운동이다.
그러나 바로 이 운동성이 아이테르의 의의이다. 한국 동시대 미술 생태계는 1990년대 후반 1세대 대안공간의 등장 이래 여러 차례 구조적 전환을 경험해 왔으며, 매번 새로운 형식의 플랫폼이 그 전환을 매개해 왔다. 아이테르 범일가옥은 2020년대 플랫폼화된 미술 생태계의 한 답변이며, 부산이라는 지역에서 출발해 한국과 아시아, 그리고 더 넓은 담론 네트워크와 접속하려는 시도이다.
이 시도가 어떻게 전개될지, 그것이 어떤 새로운 가능성과 한계를 드러낼지는 앞으로의 시간이 답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이테르가 보여주는 브리꼴라주적 실천—도시와 사람, 담론과 제도, 아카이브와 디지털을 유기적으로 엮어내는 구성적 실천—이 한국 동시대 미술이 지금 다음 단계로 이동하는 데 필요한 모델적 자원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산 원도심의 한 가옥에서 시작된 이 플랫폼이 만들어갈 문화 인프라는 한 공간의 성장기를 넘어서는, 한국 큐레이토리얼 플랫폼 모델(Korean curatorial platform model)의 새로운 모델로 기록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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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테르 범일가옥의 브리꼴라주 실천
— 부산 원도심 기반 contemporary art platform의 구조와 가능성 —
학술 연구 보고서
2026
목차
서론: 플랫폼 시대 동시대 미술과 아이테르 범일가옥이라는 질문
1장. 이론적 배경: 브리꼴라주에서 contemporary art platform으로
2장. 부산 원도심 범일동의 도시성과 장소적 조건
3장.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구조와 운영 모델
4장. 브리꼴라주 실천 ①: 도시-담론-아카이브의 접합
5장. 브리꼴라주 실천 ②: 비즈니스 모델과 상징자본의 다층적 구축
6장. 디지털 인프라와 제도 네트워크의 확장성
7장. 한계와 비교 분석, 그리고 장기 전망
결론: 한국 큐레이토리얼 플랫폼 모델로서의 아이테르 범일가옥
서론: 플랫폼 시대 동시대 미술과 아이테르 범일가옥이라는 질문
1. 변화하는 미술 생태계와 새로운 질문
오늘날 동시대 미술 생태계(contemporary art ecosystem)는 더 이상 단일한 구조로 설명되지 않는다. 한때 미술시장은 갤러리, 미술관, 컬렉터, 비평이라는 비교적 폐쇄적이고 위계적인 회로 안에서 움직였다. 작품은 작가의 손에서 갤러리로, 갤러리에서 컬렉터와 미술관으로 흘러갔고, 그 전 과정은 비평과 학술 담론(discourse)이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디지털 플랫폼 경제와 콘텐츠 산업의 성장, 글로벌 비엔날레의 확산, 사회관계망(SNS, Social Network Service) 기반의 작가 자기-전시, NFT와 디지털 아카이브(digital archive)의 부상 이후 미술 생태계는 더 이상 단순한 전시 산업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늘의 미술 생태계는 플랫폼화(platformization)되고 있으며, 담론·아카이브·네트워크·도시 내러티브(urban narrative)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무엇이 전시되는가만큼이나 어떤 관계망(network)이 구축되는가, 어떤 도시성(urbanity)과 결부되는가, 어떤 담론이 생산되는가가 미술 작업의 가치를 결정하는 핵심 변수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독립예술공간(independent art space)이라는 범주에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한국에서 독립예술공간 혹은 대안공간(alternative space)은 1990년대 후반 이래 동시대 미술의 실험적 거점 역할을 담당해 왔다. 대안공간 풀, 사루비아다방, 쌈지스페이스, 루프(LOOP) 등 1세대 대안공간들은 갤러리와 미술관이 다루지 못한 영역을 채우며 한국 동시대 미술의 비판적 담론을 생산해 왔다. 그러나 이들 공간이 직면한 가장 큰 구조적 한계는 분명했다. 프로젝트가 종료되면 담론과 네트워크가 함께 단절된다는 점이다. 전시는 일정 기간 운영되다 끝나고, 기록은 SNS 이미지 몇 장과 짧은 도록으로 흩어지며, 축적된 관계망은 다음 프로젝트로 자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많은 독립예술공간들은 생존형 자원 운용에 매달리는 동안 자신이 만들어낸 담론적 자산을 플랫폼 자산(platform asset)으로 전환하지 못한 채 소진되었다.
이러한 한계가 가시화될수록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는 "공간이 아닌 플랫폼", "전시가 아닌 담론적 인프라(discursive infrastructure)", "일회적 이벤트가 아닌 지속적 관계망"이라는 새로운 모델에 대한 요청이 강해졌다. 본 보고서가 주목하는 아이테르 범일가옥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한 부산 원도심 기반의 동시대 미술 플랫폼(contemporary art platform)이다. 아이테르 범일가옥은 단순한 전시 공간(exhibition venue)이 아니다.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이라는 원도심의 구체적 도시성과, 동시대 미술 담론, 세미나 구조(seminar structure), 디지털 아카이브, 제도적 네트워크(institutional network)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새로운 형태의 문화 인프라(cultural infrastructure)를 구축해 가고 있다.
2. 왜 "브리꼴라주"인가
본 연구는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실천을 설명하는 핵심 분석틀로 "브리꼴라주(bricolage)"를 제안한다. 브리꼴라주는 프랑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가 『야생의 사고』(*La Pensée sauvage*, 1962)에서 정식화한 개념으로, 손에 닿는 자원들을 즉각적으로 결합해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내는 사유 방식과 실천 양식을 가리킨다. 레비스트로스는 브리꼴뢰르(bricoleur, 손재주꾼)를 엔지니어(engineer)와 대비시키며, 후자가 추상적 설계와 표준화된 자원에 기반해 정형화된 결과를 산출한다면, 전자는 이미 존재하는 이질적 요소들을 우발적으로 재조합하면서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는 구조를 만들어낸다고 설명했다.
브리꼴라주는 흔히 "부족한 자원을 임시로 끼워 맞추는 방식" 정도로 좁게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1966년 강연 「인문과학 담론에서의 구조, 기호, 놀이」("Structure, Sign and Play in the Discourse of the Human Sciences")에서 지적했듯이, 브리꼴라주는 결핍의 미학이 아니라 모든 담론이 처해 있는 일반적 조건에 가깝다. 데리다는 "모든 담론은 브리꼴뢰르적이다"라고 말하며,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과 언어는 이미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유산을 차용하고 변형해 다시 조립하는 작업이라는 점을 환기시켰다.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는 『일상의 발명』(*L'Invention du quotidien*, 1980)에서 브리꼴라주를 도시 거주자들의 일상적 전술(tactics)과 연결시켰다. 거대한 전략적 체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체계의 틈새를 비집고 자신만의 의미와 경로를 만들어내는 방식이야말로 브리꼴라주적이라는 것이다.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실천을 브리꼴라주로 설명할 때, 그것은 결코 자원 부족을 미화하기 위한 수사가 아니다. 오히려 아이테르가 부산 원도심이라는 구체적 장소, 한국 동시대 미술의 담론적 유산, 제도 미술관과 독립 공간 사이의 회색지대, 디지털 아카이브의 기술적 가능성, 작가-비평가-컬렉터-기관이라는 이질적 행위자 네트워크(actor network)를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접합하여 플랫폼 정체성(platform identity)으로 전환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분석틀로 기능한다. 즉, 본 보고서가 사용하는 브리꼴라주는 도시와 사람, 담론과 제도, 아카이브와 디지털 네트워크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새로운 문화 인프라를 구축하는 전략적·구성적 실천(constructive practice)을 의미한다.
3. 연구의 목적과 방법
본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목적을 갖는다.
첫째,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실천을 한국 동시대 미술 생태계의 구조적 전환 속에 위치시키고, 이를 단순한 사례 소개가 아닌 이론적 분석의 대상으로 다룬다. 즉, 아이테르 범일가옥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어떤 모델적 가능성을 시사하는가를 묻는다.
둘째, 브리꼴라주라는 개념을 통해 동시대 미술 플랫폼의 실천 양식을 새롭게 설명한다. 본 연구는 브리꼴라주를 단순한 자원 결합의 기술이 아니라 도시성·담론·제도·디지털을 가로지르는 구성적 전략(constructive strategy)으로 재정의한다.
셋째, 부산 원도심이라는 비-수도권 지역에서 가능한 동시대 미술 플랫폼 모델의 의의를 검토하고, 한국 미술 생태계가 직면한 서울 중심성과 제도/독립의 이분법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방법론적으로 본 연구는 문헌 연구, 사례 분석, 비교 분석을 결합한다. 첫째, 브리꼴라주와 관련된 인류학·문화이론 문헌, 동시대 미술 플랫폼 및 큐레이토리얼 실천(curatorial practice)에 관한 학술 문헌, 부산 도시사 및 문화정책 자료를 검토한다. 둘째,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운영 구조, 프로그램, 디지털 아카이브, 제도적 협업 사례를 분석한다. 셋째, 한국 내 다른 독립예술공간(루프, 아마도예술공간, 사루비아 등) 및 부산의 다른 문화 거점들과 비교하여 아이테르의 위치와 차별성을 드러낸다.
4. 보고서의 구성
본 보고서는 서론과 결론을 제외하고 총 일곱 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1장에서는 이론적 배경을 정리한다. 레비스트로스의 브리꼴라주,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상징자본(symbolic capital)·문화장(field of cultural production) 이론, 부리오(Nicolas Bourriaud)의 관계미학(relational aesthetics), 포스터(Hal Foster)의 아카이브적 충동(archival impulse), 그리고 플랫폼 자본주의(platform capitalism) 논의를 종합하여 "브리꼴라주를 통한 플랫폼 구축"이라는 분석틀을 정립한다. 2장에서는 부산 원도심 범일동의 도시적 조건을 다룬다. 부산의 항만도시(port city)·산업도시 정체성, 범일동의 역사적 층위, 그리고 부산 미술 생태계의 구조를 살핀다. 3장에서는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공간적·운영적 구조를 상세히 분석한다.
4장과 5장은 본 보고서의 핵심에 해당한다. 4장에서는 아이테르가 도시-담론-아카이브를 어떻게 접합하는가를, 5장에서는 이러한 접합이 어떻게 비즈니스 모델(business model)과 상징자본의 형성으로 이어지는가를 다룬다. 6장에서는 디지털 인프라와 제도 네트워크가 아이테르의 확장성에 미치는 역할을 분석하고, 7장에서는 한계와 비교 분석을 통해 장기 전망을 검토한다. 결론에서는 아이테르 범일가옥이 한국 큐레이토리얼 플랫폼 모델(Korean curatorial platform model)로 갖는 의미를 종합한다.
본 보고서가 그리고자 하는 그림은 아이테르 범일가옥이라는 하나의 공간을 통해 한국 동시대 미술이 어떤 다음 단계로 이동하고 있는가에 대한 풍경이다. 그것은 단순히 한 공간의 성장기가 아니라, 도시·담론·아카이브·제도·디지털을 유기적으로 엮어내는 새로운 문화 인프라가 부산이라는 지역에서 어떻게 가능해지고 있는가에 대한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보고서이다.
1장. 이론적 배경: 브리꼴라주에서 동시대 미술 플랫폼으로
1.1 레비스트로스의 브리꼴라주: 야생의 사고와 즉흥의 논리
브리꼴라주(bricolage) 개념의 출발점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La Pensée sauvage*, 1962)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책의 첫 장에서 '신화적 사고(mythical thought)'와 '과학적 사고(scientific thought)'를 구별하기 위해 두 가지 형상을 대비시킨다. 한편에는 엔지니어(engineer, 공학자)가 있다. 엔지니어는 추상적 설계를 먼저 세우고, 그 설계에 부합하는 표준화된 자원을 동원해, 정형화된 결과물을 산출한다. 그의 작업은 미래를 향해 있으며, 그가 사용하는 도구와 재료는 그 작업을 위해 특정하게 준비된 것이다. 다른 한편에 브리꼴뢰르(bricoleur, 손재주꾼)가 있다. 브리꼴뢰르는 설계도가 아니라 손에 닿는 자원들의 목록에서 출발한다. 그의 작업장에는 이전 작업들의 잔여물, 우연히 모아진 부속품, 다른 용도에서 떼어낸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그는 이러한 자원들의 한계 안에서 출발해, 그것들이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구조를 즉흥적으로 만들어낸다.
레비스트로스에게 이 대비는 단순한 기술적 분류가 아니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인식론적 양식(epistemological mode)의 대비였다. 엔지니어가 세계를 미리 설계된 개념의 격자에 맞추어 다룬다면, 브리꼴뢰르는 이미 존재하는 기호와 사물의 조각들을 재배열하며 의미를 생산한다. 신화적 사고가 작동하는 방식이 바로 이러하다. 신화는 새로운 개념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유산 속에 이미 존재하는 모티프, 인물, 사건, 상징을 새로운 조합으로 재구성한다. 레비스트로스의 표현을 빌리면, "브리꼴라주는 우연적 사건을 매개로 구조를 만들어내며, 동시에 그 구조 안에서 우연적 사건을 의미 있게 만든다."
이 정의가 중요한 이유는 브리꼴라주가 결핍의 미학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브리꼴라주는 자원이 부족할 때 임시방편으로 끼워 맞추는 작업, 혹은 영어로 DIY(Do-It-Yourself, 스스로 만들기) 정도로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가 강조한 것은 자원의 양이 아니라 자원과 구조의 관계 방식이었다. 브리꼴뢰르는 자원을 충분히 가질 수도 있고 부족할 수도 있다. 핵심은 그가 그 자원들을 미리 정해진 설계에 종속시키지 않고, 자원의 이질성과 우연성을 출발점으로 삼아 의미 있는 구조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1.2 데리다와 드 세르토: 일반화된 브리꼴라주
레비스트로스의 개념은 1960년대 후반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에 의해 한 단계 더 확장된다. 데리다는 1966년 존스홉킨스 대학 강연 「인문과학 담론에서의 구조, 기호, 놀이」에서 레비스트로스의 브리꼴라주 개념을 양가적으로 평가했다. 한편으로 그는 레비스트로스가 브리꼴라주를 엔지니어와 대비시킨 점을 비판했다. 데리다가 보기에 엔지니어 역시 "어디에서도 출발하지 않는" 신화적 존재일 뿐, 실제로는 모든 사상가, 모든 담론이 이미 존재하는 개념과 언어의 유산을 빌려 쓰는 브리꼴뢰르이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의 개념을 다소 일관되거나 다소 파편화된 유산의 텍스트에서 빌려야 하는 필연성을 브리꼴라주라고 부른다면, 모든 담론은 브리꼴뢰르적이다"라는 그의 진술은 브리꼴라주를 인류학적 호기심의 대상에서 일반 인식론(general epistemology)의 조건으로 격상시켰다.
데리다의 일반화된 브리꼴라주는 본 보고서에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그것은 브리꼴라주를 "원주민적", "전근대적", "비-과학적" 사고로 가두는 위계를 해체한다. 동시대 미술 큐레이팅(curating)과 같이 가장 첨단의 담론을 다루는 실천도 본질적으로는 이미 존재하는 개념·이미지·관계망의 재조합이라는 점이 인정된다. 둘째, 데리다는 브리꼴라주를 결핍이 아닌 가능성의 양식으로 재정위한다. 모든 사유는 이미 누군가가 만든 유산 위에서 시작되므로, 그 유산을 의식적이고 창의적으로 재배열하는 능력이야말로 사유와 실천의 핵심이다.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는 『일상의 발명』(*L'Invention du quotidien*, 1980)에서 이 개념을 도시 거주자의 일상적 실천으로 확장했다. 드 세르토는 도시를 운영하는 거대한 전략적 체계(strategy)와 그 체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전술(tactics)을 구분한다. 전략은 자기 자신의 장소를 가진 자, 즉 권력의 자리에서 작동한다. 전술은 자기 장소를 갖지 못한 자, 즉 타자의 장소 안에서 그 장소의 빈틈을 이용해 살아가는 자의 작동 방식이다. 보행자가 도시 계획자의 격자 위에서 자신만의 경로를 만들어내는 것, 노동자가 작업장의 시간 속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빼내는 것이 전술의 대표적 사례이다. 드 세르토는 이 전술이 본질적으로 브리꼴라주적이라고 본다. 자원도 권력도 자기 장소도 없는 자가 주어진 환경의 파편들을 재조합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도시 일상의 핵심이다.
드 세르토의 시각은 부산 원도심이라는 특정 도시 공간에서 작동하는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실천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다. 아이테르는 거대한 미술관·갤러리·미술시장의 격자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갖지 못한 채, 그 격자의 빈틈—범일동의 가옥, 부산 원도심의 도시성, 디지털 네트워크의 여백, 제도와 독립의 경계—을 전술적으로 활용하여 자신만의 문화 인프라(cultural infrastructure)를 구축한다. 그러나 이 전술은 단순한 임시방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내는 구성적(constructive) 실천이다.
1.3 부르디외의 문화장과 상징자본
브리꼴라주가 실천의 양식이라면,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문화장(field of cultural production, 文化場)과 상징자본(symbolic capital) 개념은 그 실천이 작동하는 사회적 구조를 설명해 준다. 부르디외는 『예술의 규칙』(*Les Règles de l'art*, 1992)과 『문화 생산의 장』(*The Field of Cultural Production*, 1993)에서 예술 세계를 자율적인 사회적 장(field)으로 분석했다. 이 장에서 행위자들은 단순히 작품을 만들고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진정한 예술가인가", "무엇이 좋은 작품인가"를 결정하는 인정 투쟁(struggle for recognition)을 벌인다. 이 인정 투쟁의 결과로 축적되는 것이 바로 상징자본이다. 상징자본은 명성, 권위, 정당성과 같이 가시적인 경제자본(economic capital)으로 환원되지 않는 자본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제자본보다 더 강력하게 행위자의 위치를 결정한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문화장은 두 가지 원리에 의해 구조화된다. 한편에는 단기적·상업적 성공의 원리가 있다. 이 원리에 따르면 작품의 가치는 즉각적 판매와 시장에서의 인정으로 측정된다. 다른 한편에는 장기적·상징적 성공의 원리가 있다. 이 원리에 따르면 작품의 가치는 동료 예술가, 비평가, 큐레이터, 학자 같은 장 내부 행위자들의 인정으로 측정된다. 부르디외는 후자를 "이해관계에 대한 무이해관계"(interest in disinterestedness)라는 역설적 표현으로 설명한다. 즉, 상업적 이해관계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 자체가 상징자본을 축적하는 전략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는 동시대 미술 플랫폼(contemporary art platform)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아이테르 범일가옥과 같은 플랫폼은 단순히 작품을 판매하는 시장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작가가, 어떤 도시가, 어떤 담론이 동시대 미술의 정당한 의제로 인정받을 만한지를 결정하는 인정 투쟁의 장이다. 세미나, 비평 텍스트, 디지털 아카이브, 제도적 협업은 이 인정 투쟁의 인프라이다. 그것들은 직접적인 매출을 만들지 않지만, 작품과 작가와 도시에 상징자본을 부여하며, 그 결과로 작품 판매·전시기획 용역·교육 사업의 신뢰 기반을 형성한다.
1.4 관계미학과 아카이브적 충동
1990년대 이후 동시대 미술 담론에서 두드러진 두 가지 흐름은 본 연구의 분석틀에 직접적으로 기여한다. 첫째는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의 관계미학(relational aesthetics)이다. 부리오는 1996년 보르도 CAPC 미술관에서 큐레이팅한 전시 《트래픽》(*Traffic*)과 1998년 출간된 동명의 책에서 1990년대 이후 등장한 일군의 작가들의 실천을 설명하기 위해 이 개념을 제안했다. 그에 따르면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은 더 이상 자율적 예술 오브제(autonomous art object)를 만들지 않는다. 그들이 만드는 것은 인간 관계의 형식 그 자체이다. 리크리트 티라바닛(Rirkrit Tiravanija)이 갤러리에서 관객에게 요리를 제공하는 작업, 카르스텐 휠러(Carsten Höller)가 미술관에 미끄럼틀을 설치하는 작업처럼, 관객의 참여와 상호작용 자체가 작품의 형식이 된다.
관계미학은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을 비롯한 비평가들로부터 비판도 받았다. 비숍은 부리오의 관계미학이 갈등과 적대(antagonism)를 회피하고 미시 유토피아(micro-utopia)적 화합에 머무른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미학이 던진 핵심 질문—예술 작업의 형식이 인간 관계 그 자체로 확장될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은 동시대 미술 플랫폼을 사유하는 데 여전히 유효하다. 아이테르 범일가옥이 만들어내는 가치의 상당 부분은 작품과 전시뿐 아니라 작가-비평가-큐레이터-컬렉터-기관 사이의 관계망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할 포스터(Hal Foster)가 2004년 《옥토버》(*October*) 학술지에 발표한 「아카이브적 충동」(An Archival Impulse) 논문이 정식화한 흐름이다. 포스터는 1990년대 후반 이후 토마스 허쉬호른(Thomas Hirschhorn), 타시타 딘(Tacita Dean), 샘 듀란트(Sam Durant) 같은 작가들이 작업의 출발점으로 아카이브를 채택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들은 잊혀진 자료, 분실된 이미지, 미완의 프로젝트, 거부된 모더니즘의 유산을 발굴해 새로운 의미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낸다. 포스터에 따르면 아카이브적 충동(archival impulse)은 단순한 노스탤지어(nostalgia)나 자료의 수집이 아니라, "발견되었으나 동시에 구성된, 사실적이지만 동시에 허구적인, 공적이지만 동시에 사적인" 아카이브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적 의미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실천이다.
아카이브적 충동은 자크 데리다의 『기록열』(*Mal d'archive*, 1995)과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아카이브 개념에 이론적 기반을 둔다. 푸코에게 아카이브(archive, 기록보존소)는 단순히 저장된 자료가 아니라 "무엇이 말해질 수 있고 말해질 수 없는가"를 결정하는 담론적 규칙의 체계이다. 데리다에게 아카이브는 사회적 기억(social memory)의 장소이자 동시에 그 기억이 누락·왜곡되는 장소이며, 누가 아카이브를 통제하는가는 누가 사회적 기억을 통제하는가와 직결된다. 두 사상가의 시각에서 아카이브는 단지 과거의 보관소가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조직하는 인프라이다.
아이테르 범일가옥이 디지털 아카이브(digital archive), 세미나 기록, 비평 텍스트, 인터뷰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축적해가는 실천은 바로 이러한 아카이브적 충동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아이테르의 경우 아카이브는 작품의 소재가 아니라 플랫폼(platform) 그 자체의 인프라이다. 다음 장들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아이테르의 아카이브는 부산 원도심의 도시적 기억과 동시대 미술 담론, 작가의 작업, 제도적 협업의 흔적을 하나의 연속적 네트워크로 엮어내는 핵심 메커니즘이다.
1.5 플랫폼 자본주의와 문화 인프라
마지막으로 본 연구의 분석틀은 플랫폼 자본주의(platform capitalism) 논의로부터 빌려온다. 닉 서르닉(Nick Srnicek)의 『플랫폼 자본주의』(*Platform Capitalism*, 2017)는 21세기 자본주의의 핵심 구조 변화를 플랫폼의 부상으로 진단했다. 플랫폼은 단순한 시장이나 매개자(intermediary)가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행위자들이 만나는 디지털 인프라이자, 그 만남에서 발생하는 데이터를 수집·분석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메커니즘이다. 데이비드 니보르그(David Nieborg)와 토마스 푀엘(Thomas Poell)은 이 분석을 문화 생산의 영역으로 확장하여 "문화 생산의 플랫폼화"(platformization of cultural production) 개념을 제안했다. 그들에 따르면 오늘의 문화 산업은 더 이상 콘텐츠 기획-제작-유통의 선형적 구조가 아니라, 플랫폼이 콘텐츠의 형식·접근성·가시성·수익화 방식 자체를 구조화하는 다층적 시스템 위에서 움직인다.
플랫폼 자본주의 논의는 동시대 미술 플랫폼이 갖는 양가적 위치를 드러낸다. 한편으로 미술 영역의 플랫폼화는 작가와 관객, 큐레이터와 컬렉터, 도시와 담론을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하는 가능성을 연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알고리즘 가시성(algorithmic visibility), 데이터 수집, 콘텐츠의 표준화·상품화 같은 새로운 리스크를 동반한다. 아이테르 범일가옥과 같은 독립적·지역적 플랫폼이 갖는 의의는, 거대 디지털 플랫폼의 논리에 매몰되지 않으면서도 플랫폼의 구조적 이점—반복 참여(repeat engagement), 아카이브 축적, 다층적 행위자 네트워크의 연결—을 활용한다는 점에 있다.
1.6 분석틀: "브리꼴라주를 통한 플랫폼 구축"
지금까지 살펴본 이론적 자원을 종합하여, 본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분석틀을 정립한다.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실천은 "브리꼴라주를 통한 플랫폼 구축"이라는 명제로 요약된다. 이 명제는 다음 네 가지 차원을 포함한다.
첫째, 자원의 차원이다. 아이테르는 부산 원도심의 도시적 자원(범일동의 가옥, 시장경제의 흔적, 항만도시의 이동성), 한국 동시대 미술의 담론적 자원(독립예술공간의 역사, 큐레이토리얼 실험의 유산), 제도적 자원(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과의 협업 가능성), 디지털 자원(웹사이트, 아카이브, 소셜 미디어)을 브리꼴라주적으로 결합한다. 이 결합은 사전 설계가 아니라 사용 가능한 자원의 한계 안에서 출발한다.
둘째, 구조의 차원이다. 그러나 이 결합은 임시적이지 않다. 그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축적되어 플랫폼 인프라(platform infrastructure)를 만들어낸다. 각각의 프로젝트, 세미나, 전시, 비평이 다음 프로젝트의 자원이 되며, 디지털 아카이브로 결합된다. 이 점에서 아이테르의 브리꼴라주는 데리다적·드 세르토적 의미에서 구성적이다.
셋째, 가치의 차원이다. 이렇게 축적된 인프라는 부르디외적 의미의 상징자본을 생산한다. 작가의 작품, 도시의 내러티브(narrative), 큐레이토리얼 실천 자체에 정당성과 권위를 부여하며, 이는 다시 작품 판매, 전시기획 용역, 교육 사업의 신뢰 기반으로 전환된다.
넷째, 확장의 차원이다. 이러한 플랫폼은 공간 규모가 아니라 관계 밀도(relationship density)와 담론 연속성(discourse continuity)에 의해 확장된다. 부산이라는 지역적 거점에서 시작해 한국, 아시아,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도시 담론 네트워크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여기에서 열린다.
다음 장에서는 이 분석틀을 적용할 구체적 맥락—부산 원도심 범일동의 도시성—을 다룬다.
2장. 부산 원도심 범일동의 도시성과 장소적 조건
2.1 항만도시 부산이라는 좌표
아이테르 범일가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산이라는 도시 자체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부산은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지만, 단순히 인구 규모로 환원되지 않는 독특한 도시적 정체성을 가진다. 부산은 항만도시(port city)이다. 그것은 단지 항구가 있는 도시라는 의미가 아니라, 도시의 형성과 변형 자체가 바다와 항만의 리듬에 의해 규정되어 왔다는 의미이다. 19세기 후반 개항기 이래 부산은 일본, 동남아시아, 그리고 그 너머 세계와 한국을 연결하는 관문(gateway)으로 기능해 왔다. 일제 강점기에는 식민지 무역의 거점이었고, 한국전쟁기에는 임시수도로서 전 국토의 피난민과 자원을 흡수하는 항구였다. 1960~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는 신발·섬유·합판 등 경공업의 중심지였으며, 동시에 컨테이너 항만의 확장과 함께 동북아시아 물류 허브(logistics hub)로 기능했다.
이러한 역사적 층위는 부산의 도시 형태에 깊이 새겨져 있다. 부산은 단일한 중심을 가진 도시가 아니다. 그것은 항구를 중심으로 한 원도심(중구, 동구, 서구), 산업화 과정에서 확장된 사상·사하 일대, 1990년대 이후 신도시로 개발된 해운대·센텀시티 일대, 그리고 외곽의 기장·강서 지역이 각기 다른 시간성을 가지고 공존하는 도시이다. 특히 원도심—중구, 동구를 중심으로 한 구도심권—은 부산의 가장 오래된 시간이 가장 가시적으로 남아 있는 영역이다. 시청이 1999년 연제구로 이전한 이후 원도심은 행정·상업·정치적 중심성을 상실했지만, 그 결과 역설적으로 부산의 산업적·이주적·생활사적 기억이 가장 짙게 축적된 장소가 되었다.
2.2 범일동: 시장, 산업, 이동성의 중첩
범일동(凡一洞)은 부산광역시 동구에 속하는 지역으로, 부산진 시장과 자유시장, 평화시장 등 부산을 대표하는 도매·소매 시장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동시에 범일동은 한국전쟁 이래 형성된 피난민 주거지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으며, 일제 강점기 이래 부산의 산업적 기반—특히 신발 산업과 섬유 산업—이 집적되었던 곳이다. 범일동의 지명이 갖는 일상성과 보편성("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곳"으로 해석되기도 하는)은 우연이 아니다. 이곳은 부산의 다양한 시간과 사람과 산업이 교차하는 결절점(node)이었다.
범일동의 도시적 조직은 몇 가지 특징적 요소로 이루어진다. 첫째, 시장경제(market economy)의 흔적이다. 부산진 시장은 도매업과 소매업이 결합된 전통 시장으로, 의류·잡화·식품 등 다양한 상품이 거래된다. 이 시장은 단지 상거래 장소가 아니라 부산이라는 도시의 일상 경제가 가장 밀도 높게 작동하는 공간이다. 시장 골목의 동선, 상점의 진열 방식, 상인과 손님의 관계, 골목 위의 간판과 호객 소리 모두가 부산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미시적 텍스처(micro-texture)이다.
둘째, 산업의 기억이다. 1960~70년대 범일동을 포함한 부산 원도심에는 신발 공장, 섬유 공장, 합판 공장 등이 밀집해 있었다. 이 공장들은 1980년대 이후 해외 이전과 산업 구조 재편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건물의 형태, 거리의 구조, 노동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F1963이라는 폐 와이어 공장이 문화 복합시설로 재생된 사례에서 보듯, 부산의 산업적 유산(industrial heritage)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적 의미로 재구성될 수 있는 자원으로 잠재해 있다.
셋째, 이동성(mobility)과 이주(migration)의 층위이다. 범일동은 한국전쟁기 피난민들이 정착했던 곳이며, 1960~70년대에는 부산의 산업 노동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유입된 이주노동자들이 모여든 곳이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동남아시아·중앙아시아 출신 이주민들의 생활권으로 확장되었다. 범일동은 한국 사회의 이주와 이동, 노동과 생활의 역사가 농축된 장소이다.
이 세 가지 층위—시장경제, 산업, 이동성—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중첩되어 있다. 시장은 산업과 이주민 노동의 결과물이 거래되는 장소이며, 산업은 이주민의 노동에 의해 가능했고, 이동성은 시장과 산업의 리듬을 따라 형성되었다. 범일동은 이 세 층위가 교차하는 결절점이며, 그 자체로 부산이라는 도시의 압축된 초상이라 할 수 있다.
2.3 원도심 도시재생과 예술의 결합
1999년 시청 이전 이후 부산 원도심은 인구 감소, 상권 침체, 건물 노후화 같은 전형적 도심 공동화(urban hollowing) 현상을 겪었다. 부산광역시는 2009년 이후 원도심 재생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해 왔는데, 그중 문화·예술을 매개로 한 재생 사업이 두드러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또따또가(TOTATOGA)이다. 또따또가는 중구 동광동, 광복동 일대의 공실 사무실들을 예술가 작업실로 전환하여 운영하는 레지던시(residency) 프로그램으로, 부산광역시가 지원하고 예술가들이 운영 주체로 참여하는 협력 모델이다. 또따또가는 부산 원도심에 다수의 예술가들을 다시 불러들이며, 도시 공간의 미적 변형과 함께 시민과 예술가의 만남을 조직하는 데 기여했다.
또 다른 대표적 사례는 감천문화마을이다. 사하구 감천동의 산복도로 마을은 한국전쟁 직후 피난민들이 형성한 주거지로, 2009년 마을미술 프로젝트(community art project)를 통해 골목과 벽면이 예술 작품으로 채워지면서 관광 명소로 부상했다. 감천문화마을은 주민·예술가·지방정부의 협업으로 진행된 참여형 예술 프로젝트(participatory art project)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지만, 동시에 관광 상품화에 따른 주민 생활 침해,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임대료 상승에 의한 원주민 이탈)의 부작용 같은 비판도 받아왔다.
영도구 흰여울문화마을 역시 비슷한 궤적을 그렸다. 절벽 위에 형성된 이 작은 마을은 영화 촬영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2010년대 들어 카페와 갤러리, 작은 예술공간들이 들어서며 도시재생(urban regeneration)의 사례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흰여울문화마을의 변화도 역시 관광 산업과 주민 삶의 긴장을 동반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부산 원도심의 도시재생이 예술과 결합되는 방식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한편으로 예술은 쇠퇴한 도심에 새로운 활력과 가시성을 부여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활력은 종종 도시 공간을 관광 상품으로 전환하면서 원래 주민의 생활 기반을 침식한다. 예술이 도시를 "구원"하는 단순한 도구가 될 수 없다는 점, 도시와 예술의 관계는 더 복잡한 윤리적·정치적 문제를 동반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2.4 부산 미술 생태계의 구조
부산은 한국에서 서울 다음으로 큰 미술 생태계(art ecosystem)를 가진 도시이다. 이 생태계는 몇 가지 주요 거점과 사건들로 구성된다.
첫째, 부산비엔날레(Busan Biennale)이다. 1981년 부산청년비엔날레로 시작된 이 행사는 1998년 PICAF(Pusan International Contemporary Art Festival, 부산국제현대미술축제)를 거쳐 2002년부터 부산비엔날레라는 이름으로 정식 출범했다. 부산비엔날레는 부산이라는 도시의 항만적·산업적·이주적 정체성을 동시대 미술 담론과 결합하는 시도를 지속적으로 해왔다. 특히 2022년 김해주 예술감독이 기획한 부산비엔날레는 "물결 위 우리"라는 주제 아래 이주, 여성과 여성 노동자, 도시의 생태계, 기술 변화와 지역성이라는 네 가지 축으로 부산의 도시 내러티브(urban narrative)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부산비엔날레는 부산 미술 생태계가 글로벌 동시대 미술 담론과 어떻게 접속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사건이다.
둘째, 부산현대미술관(MOCA Busan, Museum of Contemporary Art Busan)이다. 2018년 을숙도에 개관한 이 미술관은 부산광역시 산하의 공공 미술관으로, 부산 동시대 미술의 제도적 거점으로 기능한다. MOCA Busan은 부산비엔날레의 주 전시장이기도 하다.
셋째, F1963이다. 영도구에 위치한 이 복합문화공간은 1963년부터 가동된 와이어 제조 공장 고려제강 수영공장을 리모델링한 공간으로, 갤러리·도서관·카페·공연장 등이 결합되어 있다. F1963은 부산의 산업적 유산이 문화 공간으로 전환된 대표적 사례이며, 부산비엔날레의 위성 전시장(satellite venue)으로도 활용된다.
넷째, 아트부산(Art Busan)이다. 2012년 시작된 이 아트페어(art fair)는 부산을 거점으로 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주요 미술시장 행사로 성장했다. 2025년 기준 17개국 109개 갤러리가 참가하는 규모로 확장되었으며, 부산이 단지 비엔날레 도시일 뿐 아니라 미술시장 도시로도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섯째, 다수의 사립 갤러리와 독립예술공간들이다. 조현화랑, 갤러리이배, 부산프랑스문화원 등 사립 갤러리들이 부산 미술의 시장 측면을 담당해 왔다면, 신생공간·오픈스페이스배·갤러리분도 등 독립·실험 공간들이 비평적·실험적 담론을 생산해 왔다.
이러한 부산 미술 생태계의 구조 속에서 아이테르 범일가옥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한편으로 아이테르는 부산비엔날레나 MOCA Busan 같은 대형 제도와는 규모와 자원이 비교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아이테르는 통상적 의미의 "독립예술공간"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미술시장의 한 갤러리도 아니고, 공공 미술관도 아니며, 비엔날레 같은 대형 행사도 아니다. 아이테르는 부산이라는 도시의 미술 생태계 안에서 새로운 범주의 위치—원도심 기반의 동시대 미술 플랫폼—를 구축하고 있다.
2.5 범일동이라는 장소의 잠재력
마지막으로 본 장은 범일동이라는 특정 장소가 동시대 미술 플랫폼에 제공하는 잠재력을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범일동은 부산의 도시 내러티브가 가장 압축적으로 응축된 장소이다. 시장경제, 산업, 이동성이라는 세 가지 층위가 한 동네 안에서 만나며, 이는 동시대 미술이 다루는 핵심 의제들—이주, 노동, 도시화, 글로벌화, 생활세계(life-world)—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다시 말해 범일동은 동시대 미술 언어(contemporary art language)로 번역될 수 있는 가장 풍부한 자원을 보유한 도시 공간 중 하나이다.
둘째, 범일동은 이미 충분히 의미화된 관광지나 미술 거점이 아니라는 점에서 새로운 큐레이토리얼 실천의 가능성을 연다. 감천문화마을이나 또따또가가 이미 의미의 격자에 포섭된 장소라면, 범일동은 그러한 포섭이 덜 진행된 상태로 남아 있다. 이는 새로운 의미 생산의 여백이 더 크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도시 공간과 예술의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설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셋째, 범일동은 일상성(everydayness)의 도시이다. 감천문화마을이 산복도로의 풍경, 흰여울문화마을이 절벽 위 풍경처럼 "이미지로 소비될 만한" 미적 특이성을 가진 장소들이라면, 범일동은 그러한 표면적 미적 매력이 강하지 않다. 이는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다. 범일동의 예술적 실천은 표면의 미적 소비가 아니라 도시의 일상적 텍스처와 깊이 결합된 의미 생산을 요청한다.
이러한 장소적 조건 위에서 아이테르 범일가옥은 어떻게 운영되며, 어떤 구조를 갖추고 있는가? 다음 장에서 이를 상세히 다룬다.
3장.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구조와 운영 모델
3.1 가옥이라는 공간성: 백색의 큐브를 벗어난 큐레이토리얼의 조건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이름 자체가 그 공간성을 시사한다. "아이테르(Aether/Aither)"는 그리스 신화에서 하늘의 가장 높은 곳, 신들이 호흡하는 맑고 빛나는 공기를 뜻하는 단어이며, 동시에 19세기 물리학에서 빛이 전파되는 매질(medium)로 가설되었던 개념이기도 하다. 그것은 비어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매개하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모든 흐름을 가능하게 하는 매질이다. "범일가옥"은 부산 동구 범일동의 가옥(家屋), 즉 일상적 주거 공간으로서의 집을 의미한다. 두 단어의 결합은 평범한 가옥이 어떻게 동시대 미술 담론의 매질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이미 함축한다.
이 공간성은 통상적인 화이트 큐브(white cube)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화이트 큐브는 모더니즘(modernism) 미술관과 갤러리가 정립한 전시 공간의 표준으로, 흰 벽과 균일한 조명, 외부와 차단된 중립적 환경을 통해 작품을 그 자체로 자율적인 미적 대상으로 제시한다. 브라이언 오도허티(Brian O'Doherty)가 1976년 《아트포럼》(*Artforum*)에 연재한 「화이트 큐브의 내부」(Inside the White Cube) 연작에서 분석했듯이, 화이트 큐브는 단순한 건축적 형식이 아니라 작품의 자율성과 보편성을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적 장치(ideological apparatus)이다. 화이트 큐브 안에서 작품은 시간과 장소의 구체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어디서 어떤 맥락에서 보아도 동일한 미적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제시된다.
가옥은 이와 정반대의 공간 논리를 갖는다. 가옥에는 두꺼운 벽이 있고, 좁은 복도가 있고, 천장의 높낮이가 다르고, 창문의 위치가 정해져 있으며, 바닥의 재질이 변한다. 가옥은 누군가가 살았던 흔적, 시간이 새긴 자국, 일상의 동선을 그대로 간직한다. 작품은 이러한 공간의 구체성에 흡수되거나 부딪히거나 협상하며 의미를 만들어낸다.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공간은 이 점에서 미원 권(Miwon Kwon)이 『장소 이후의 장소』(*One Place After Another*, 2002)에서 분석한 사이트-스페시픽 아트(site-specific art, 장소 특정 미술)의 조건을 일상적 수준에서 구현한다.
권은 이 책에서 사이트-스페시픽 아트가 세 가지 모델로 발전해 왔다고 설명한다. 첫째는 현상학적 모델(phenomenological model)로, 작품과 장소의 물리적·감각적 결합에 초점을 둔다. 둘째는 제도적 모델(institutional model)로, 미술관·갤러리 같은 제도 자체를 작품의 장소로 삼는다. 셋째는 담론적 모델(discursive model)로, 장소를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라 그 공간을 둘러싼 사회적·역사적·정치적 담론의 네트워크로 이해한다.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공간 실천은 이 세 모델을 중첩시킨다. 가옥의 물리적 조건은 작품의 현상학적 경험을 형성하고, 가옥-갤러리라는 형식 자체가 제도적 질문을 환기시키며, 범일동이라는 장소는 부산 원도심의 역사·노동·이주·산업이라는 담론적 네트워크 안에서만 온전히 이해된다.
3.2 플랫폼 정체성: 단일한 운영 주체에서 분산된 큐레이토리얼로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운영은 단일한 갤러리 디렉터나 큐레이터의 개인 비전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큐레이터, 작가, 비평가, 연구자, 디자이너, 디지털 콘텐츠 제작자 등 다수의 행위자가 협업하는 분산된 큐레이토리얼(distributed curatorial) 구조 위에서 운영된다. 이러한 운영 방식은 1990년대 이후 동시대 큐레이팅 담론이 강조해 온 "분산된 저자성"(distributed authorship) 혹은 "집단적 큐레이팅"(collective curating)의 흐름과 맞닿아 있다.
폴 오닐(Paul O'Neill)은 『큐레이팅의 문화와 문화의 큐레이팅』(*The Culture of Curating and the Curating of Culture(s)*, 2012)에서 1990년대 이후 큐레이터의 역할이 "전시 기획자"에서 "담론 생산자"(discourse producer)로 확장되어 왔다고 분석했다. 큐레이터는 더 이상 미술관 내부에서 작품을 선별하고 배치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비엔날레·아트페어·출판·세미나·디지털 플랫폼을 가로지르며 동시대 미술 담론의 형식 자체를 생산하는 행위자가 되었다. 그러나 오닐이 동시에 지적했듯이, 이러한 확장은 큐레이터 개인의 "스타화"(stardom)라는 부작용을 동반했다.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 오쿠이 엔웨조(Okwui Enwezor), 마시밀리아노 지오니(Massimiliano Gioni) 같은 인물이 보여주듯, 일부 스타 큐레이터(star curator)는 작가보다 더 큰 가시성을 가지며 동시대 미술 담론을 좌우한다.
아이테르 범일가옥은 이러한 스타 큐레이터 모델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영국의 퍼더필드(Furtherfield), 인도네시아의 루앙루파(ruangrupa), 일본의 옐로우 펜 클럽(Yellow Pen Club)과 같은 집단적·플랫폼적 큐레이토리얼 실천에 가깝다. 운영진 개인의 이름이 전면에 부각되기보다, 플랫폼 자체의 정체성과 담론적 입장이 전면화된다. 이는 단순한 운영 방식의 선택이 아니라, 동시대 미술 플랫폼의 정당성과 지속성에 관한 전략적 결정이다.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지 않는 플랫폼 정체성(platform identity)은 장기적으로 더 안정적으로 작동하며, 다수의 행위자가 참여할 수 있는 열린 구조를 만들어낸다.
3.3 3축 비즈니스 모델의 구조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운영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비즈니스 모델(business model)은 세 가지 축으로 구성된다. 본 절에서는 각 축의 작동 원리를 차례로 살펴본다.
첫 번째 축: 전시기획 용역 사업
첫 번째 축은 전시기획 용역 사업이다. 아이테르는 병원, 호텔, 기업, 공공기관 등 외부 기관을 대상으로 그들의 공간에 전시를 기획하고 설치하는 사업을 수행한다. 이는 통상적 의미의 "기업 미술 컨설팅"(corporate art consulting)이나 "호텔 아트 어드바이저리"(hotel art advisory)와 유사해 보일 수 있지만, 본질적 차이가 있다.
통상적 기업 미술 컨설팅은 의뢰 기관의 공간을 미적으로 장식하기 위해 작품을 선별·구매·설치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 핵심은 "장식적 가치"의 제공이다. 반면 아이테르의 전시기획 용역은 의뢰 기관의 공간을 문화적 맥락(cultural context)으로 재설계하는 작업에 가깝다. 즉, 어떤 작품을 어디에 거는가 이전에, 그 공간이 어떤 도시적·역사적·문화적 맥락 위에 위치하는가, 그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어떤 경험을 통해 작품과 만나는가, 그 만남이 어떤 의미의 네트워크를 생성하는가를 설계한다.
이러한 접근은 부르디외적 의미에서 상징자본(symbolic capital)의 작동을 활용한다. 의뢰 기관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문화적 브랜딩(cultural branding)을 원한다. 그들의 공간이 미적·지적·사회적으로 어떤 정당성을 가지는가는 단순히 비싼 작품을 거는 것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 공간이 어떤 담론과 연결되어 있는가, 어떤 큐레이토리얼 사유에 의해 매개되어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아이테르가 제공하는 것은 바로 이 매개의 정당성이다.
또한 전시기획 용역 사업은 단순히 일회적 매출 발생원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테르의 큐레이토리얼 실천을 외부 공간으로 확장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병원·호텔·기업·공공기관의 공간에서 아이테르가 큐레이팅한 전시가 진행될 때, 그것은 아이테르의 담론적 영토를 물리적으로 확장한다. 또한 이러한 외부 프로젝트는 자체 공간에서 진행하기 어려운 규모의 작가 협업, 새로운 형식의 실험을 가능하게 한다.
두 번째 축: 작품 판매
두 번째 축은 작품 판매이다. 그러나 아이테르의 작품 판매는 일반적 갤러리 비즈니스와 차별화되는 구조를 갖는다.
통상적 갤러리는 작가의 작품을 위탁받아 전시하고, 컬렉터에게 판매하는 중개 역할(intermediary role)을 한다. 작품의 가격은 작가의 시장적 명성, 작품의 크기와 매체, 갤러리의 위치와 명성 등에 의해 결정되며, 판매 수익은 작가와 갤러리가 일정 비율로 분배한다. 이 구조 안에서 갤러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작품의 시장 가격을 만들고 유지하는 일이다.
아이테르는 이러한 통상적 갤러리 모델과 거리를 둔다. 아이테르가 작품 판매에서 추구하는 것은 단순한 시장 가격의 형성이 아니라, 작품의 상징자본을 구축하는 일이다. 즉, 작품이 동시대 미술 담론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어떤 비평적·학술적·제도적 인정을 받는가를 우선적으로 다룬다. 작품 판매는 이 상징자본의 축적 위에서 부차적으로, 그러나 신뢰성 있게 일어난다.
이러한 접근의 핵심에는 컬렉터 신뢰(collector trust)의 형성이라는 메커니즘이 있다. 컬렉터는 단순히 작품을 사는 사람이 아니다. 컬렉터는 자신의 컬렉션을 통해 자신이 어떤 동시대 미술 담론과 연결되는가, 어떤 큐레이토리얼 시야와 미적 판단에 동조하는가를 표현한다. 아이테르가 작품을 판매할 때 함께 제공하는 것은 작품에 대한 비평적 텍스트, 작가 인터뷰, 작품의 전시 이력(exhibition history), 관련 세미나의 기록, 도시적 맥락에 대한 큐레이토리얼 노트 등이다. 즉, 작품은 그 자체로 판매되는 것이 아니라 담론적 네트워크와 함께 판매된다.
이는 작품의 가격 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단기적 시장 변동성에 좌우되는 가격이 아니라, 장기적 담론적 가치 위에서 형성되는 가격이 추구된다. 이러한 가격 구조는 컬렉터에게도 안정적이며, 작가에게도 자신의 작업이 단기 시장에 휘둘리지 않고 장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세 번째 축: 교육 및 연구 프로젝트
세 번째 축은 교육 및 연구 프로젝트이다. 큐레이터 교육, 세미나, 출판, 연구 협업 등이 이 축에 포함된다. 표면적으로 이는 일종의 "부가 사업"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아이테르의 운영 구조에서 교육과 연구는 플랫폼의 가장 중심적인 엔진(platform engine)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동시대 미술 플랫폼은 그 자체로 새로운 참여자를 지속적으로 생성해야 작동한다. 새로운 작가, 새로운 큐레이터, 새로운 비평가, 새로운 컬렉터가 끊임없이 플랫폼 안으로 진입해야 한다. 교육 프로그램은 이러한 진입의 통로이다. 큐레이터 교육 과정에 참여한 신진 큐레이터들은 미래의 협업자가 되고, 세미나에 참여한 연구자들은 미래의 비평적 동맹(critical ally)이 되며, 출판물에 글을 쓴 필자들은 플랫폼의 담론적 자산으로 누적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육·연구는 단순한 강의 사업이 아니라 미래 생태계(future ecosystem)를 구축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즉각적 매출을 만들기보다 장기적 관계망을 구축하며, 이 관계망은 다시 플랫폼의 지속성과 확장성의 토대가 된다.
또한 교육과 연구는 아이테르의 담론적 정당성을 형성하는 핵심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학술적 깊이를 갖춘 세미나, 연구 기반의 출판물, 큐레이터 교육 프로그램은 아이테르가 단순한 상업 갤러리나 일회적 독립 공간이 아니라 동시대 미술 담론의 진지한 생산자임을 입증하는 인프라이다.
3.4 시간적 누적의 구조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운영을 일반 독립예술공간과 가장 명확하게 구별짓는 특징은 시간적 누적(temporal accumulation)의 구조이다. 통상적 독립예술공간에서 하나의 프로젝트는 기획-전시-종료의 선형적 시간 구조를 따른다. 전시가 끝나면 프로젝트는 종료되며, 다음 프로젝트는 새롭게 시작된다. 프로젝트 사이의 연속성은 운영 주체의 기억과 인적 네트워크 안에 비공식적으로만 존재한다.
아이테르의 시간 구조는 이와 다르다. 전시는 종료되지 않는다. 전시는 다음 단계로 이어진다. 전시 이후에는 비평 텍스트가 생산되고, 세미나가 열리고, 디지털 콘텐츠가 제작되며, 작가 인터뷰가 아카이브에 추가된다. 이러한 후속 작업들은 단순한 기록 보존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새로운 의미 생산이다. 그리고 이 후속 작업들은 다시 다음 프로젝트의 기획에 영향을 미친다. 한 작가의 전시에서 제기된 의제가 세미나에서 심화되고, 그 세미나의 논의가 다음 전시의 기획으로 이어지며, 그 전시가 다시 출판으로 이어지는 순환 구조(circular structure)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시간적 누적은 디지털 아카이브(digital archive)에 의해 가시화되고 안정화된다. 아카이브는 단순한 보관소가 아니라, 흩어진 시간들을 하나의 연속체로 재구성하는 인프라이다. 6장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아이테르의 디지털 아카이브는 이 시간적 누적을 외부에 보여주는 동시에, 내부적으로 다음 프로젝트의 자원이 되는 이중적 기능을 수행한다.
3.5 위치: 생존형 공간과 제도적 미술관 사이
마지막으로 본 장은 아이테르 범일가옥이 한국 미술 생태계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정리한다. 아이테르는 두 가지 기존 범주의 사이에 위치한다.
한편으로 아이테르는 통상적 "독립예술공간"(independent art space) 혹은 "대안공간"(alternative space)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1세대 대안공간들이 자원 부족과 지속성 위기에 시달리며 생존형 운영에 머물렀다면, 아이테르는 명확한 비즈니스 모델, 안정적 운영 구조, 장기적 담론 축적을 갖춘 플랫폼으로 성장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아이테르는 국공립 미술관이나 대형 사립 미술관과도 다르다. 거대 자본과 행정 인프라에 기반한 제도적 미술관(institutional museum)과 달리, 아이테르는 작은 규모로 출발해 관계망과 담론의 밀도로 확장되는 모델을 추구한다.
이 사이의 위치는 단순히 중간자적 위치가 아니라, 새로운 범주의 위치이다. 그것은 부르디외가 말한 "이중 구조의 장"—단기적 시장 성공과 장기적 상징적 성공이 별개의 원리로 작동하는 장—에서 두 원리를 동시에 활용하는 위치이며, 푸코적 의미에서 새로운 담론적 형성(discursive formation)을 만들어내는 위치이다. 다음 두 장(4장, 5장)은 이 위치에서 아이테르가 어떻게 브리꼴라주적 실천을 전개하는가를 상세히 분석한다.
4장. 브리꼴라주 실천 ①: 도시-담론-아카이브의 접합
4.1 도시를 동시대 미술 언어로 번역하기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첫 번째 브리꼴라주적 실천은 부산 원도심이라는 도시 공간을 동시대 미술 언어(contemporary art language)로 번역하는 작업이다. 이 번역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구체적인 큐레이토리얼 작업이다.
도시를 미술의 소재로 다루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표면적인 방식은 도시의 풍경을 회화나 사진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좀 더 진전된 방식은 도시의 건축물, 거리, 사람들을 작품의 모티프(motif)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깊이 있는 방식은 도시 자체를 하나의 텍스트로 읽어내고, 그 텍스트가 동시대 미술의 언어 안에서 어떻게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아이테르가 시도하는 것은 바로 이 세 번째 방식이다.
이 작업의 출발점은 도시를 "배경"으로 소비하지 않는 것이다. 많은 도시 기반 예술 프로젝트들은 도시의 특정 장면이나 분위기를 차용하여 작품의 미적 매력을 강화하는 데 머문다. 부산을 다룬 일부 예술 프로젝트들이 자갈치 시장의 활기, 산복도로의 풍경, 영도다리의 노스탤지어(nostalgia)를 표면적 이미지로 활용한 것이 그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도시를 시각적 상품으로 환원하며, 도시의 복잡한 역사적·사회적 층위를 평면화한다. 미원 권(Miwon Kwon)의 표현을 빌리면, 이는 "사이트(site, 장소)를 로케이션(location, 위치)으로 축소시키는" 작업이다.
아이테르의 접근은 다르다. 범일동이라는 장소는 미적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동시대 미술이 다루어야 할 의제이다. 시장경제와 산업의 흔적, 이주민의 노동과 생활, 항만도시의 이동성과 글로벌리티(globality)는 단순히 부산이라는 지역의 특수성이 아니라, 동시대 미술이 전 지구적으로 다루는 핵심 주제들—이주(migration), 노동(labor), 식민성(coloniality), 글로벌화(globalization), 생활세계(life-world)—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범일동을 큐레이팅한다는 것은 따라서 부산이라는 지역을 글로벌 동시대 미술 담론에 접속시키는 작업이다.
이 점에서 아이테르의 실천은 부산비엔날레의 어떤 측면들과 공명하지만, 동시에 결정적인 차이를 가진다. 부산비엔날레는 글로벌 큐레이터의 시각을 부산에 들여와 부산을 그 시각의 한 장으로 다룬다. 반면 아이테르는 부산이라는 도시의 일상적 텍스처에서 출발해 그것을 글로벌 담론과 접속시킨다. 비엔날레가 외부에서 내부로 향하는 운동(outside-in movement)이라면, 아이테르는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는 운동(inside-out movement)이다. 두 운동은 상호 보완적일 수 있지만, 그 구조는 명확히 다르다.
4.2 담론적 연속성: 담론의 시간적 흐름
아이테르의 두 번째 핵심 실천은 담론의 시간적 연속성(discourse continuity)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3장에서 언급한 시간적 누적 구조가 이를 가능하게 한다.
담론의 연속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 차례의 전시나 세미나에서 어떤 의제가 제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산 원도심의 산업적 기억과 노동에 관한 의제, 혹은 항만도시의 이주민 노동에 관한 의제가 제기될 수 있다. 통상적 운영에서 이 의제는 그 전시·세미나의 기간 동안만 가시화되고, 행사가 끝나면 의제도 함께 잊혀진다. 다음 행사는 또 다른 의제로 시작되며, 의제들 사이의 연결은 운영진의 내적 기억에만 존재한다.
아이테르의 시간 구조는 이 의제들을 단절시키지 않는다. 한 전시에서 제기된 의제는 후속 세미나에서 심화되고, 비평 텍스트로 정리되고, 디지털 아카이브에 기록되며, 다음 전시의 기획에 다시 영향을 미친다. 동일한 의제가 다른 작가, 다른 형식, 다른 맥락에서 반복적으로 다뤄지면서 점점 더 풍부하고 정교한 담론적 망(discursive web)을 형성한다.
이러한 연속성은 부르디외가 말한 문화장(field of cultural production)의 자율성을 만들어내는 핵심 메커니즘이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문화장이 외부 경제·정치 권력으로부터 자율성(autonomy)을 갖는 것은, 그 장 내부에서 작동하는 담론의 누적과 인정의 게임이 단기 시장 논리와 독립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한 작가나 한 작품의 가치를 인정하는 일은 단발적 평가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담론적 검증의 결과이다. 아이테르가 만들어내는 담론의 연속성은 이러한 자율적 가치 평가의 기반이 된다.
또한 담론의 연속성은 아이테르의 플랫폼 정체성(platform identity)을 시간 속에서 안정화시킨다. 단일한 전시나 프로젝트가 플랫폼의 정체성을 결정하지 않는다. 5년, 10년에 걸쳐 누적된 담론적 흔적의 집적이 플랫폼이 무엇을 하는 곳인가를 외부에 가시화한다. 작가, 큐레이터, 비평가, 컬렉터, 기관이 아이테르와 협업할지 결정할 때, 그들이 보는 것은 한 차례의 전시가 아니라 누적된 담론적 정체성이다.
4.3 관계 밀도: 깊이 있는 결속의 구축
세 번째 핵심 실천은 관계 밀도(relationship density)를 높이는 작업이다. 아이테르의 전략은 단순히 많은 사람을 플랫폼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행위자들 사이에서 깊은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점은 플랫폼 자본주의의 일반적 논리와 차별화된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같은 대형 디지털 플랫폼은 가능한 한 많은 사용자를 확보하고, 가능한 한 많은 콘텐츠를 생산·소비하게 하는 양적 확장 전략을 추구한다. 이러한 플랫폼에서 한 사용자가 다른 사용자와 맺는 관계의 깊이는 매우 얕다. 알고리즘(algorithm)은 표면적 상호작용(좋아요, 댓글, 공유)을 측정할 뿐 깊이 있는 담론적 관계는 측정하지 않는다.
아이테르의 플랫폼 논리는 이와 반대 방향을 향한다. 적은 수의 작가, 비평가, 큐레이터, 컬렉터, 연구자가 플랫폼 안에서 반복적으로 만나며, 시간이 갈수록 더 깊은 협업과 신뢰 관계를 만든다. 한 작가가 아이테르와 한 차례의 전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속 세미나에서 자신의 작업을 더 깊이 논의하고, 비평 텍스트의 대상이 되며, 디지털 인터뷰로 기록되고, 다음 협업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한 비평가는 일회적 도록 텍스트를 쓰는 것이 아니라 아이테르의 다양한 프로젝트에 지속적으로 글을 기고하면서 플랫폼의 담론적 정체성에 깊이 관여한다.
이러한 관계의 밀도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이 강조하는 "결속의 강도"(strength of ties)와 관련된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사회적 현상을 이해할 때 개별 행위자의 본질보다는 행위자들 사이의 결속이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고 유지되는가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한 결속(strong ties)은 사회적 현실을 안정화하며, 새로운 가능성의 기반이 된다. 아이테르가 만들어내는 관계의 밀도는 플랫폼이 단순한 행사 진행자가 아니라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사회적 현실을 만들어내는 행위자임을 보여준다.
4.4 세미나 구조: 세미나의 인프라적 기능
아이테르의 운영에서 세미나(seminar)는 부수적 프로그램이 아니라 핵심 인프라이다. 세미나는 무엇을 하는가? 표면적으로는 작가와 비평가, 학자들이 모여 동시대 미술의 의제들을 논의하는 자리이다. 그러나 플랫폼의 관점에서 세미나는 그 이상의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 세미나는 담론 생산(discourse production)의 직접적 메커니즘이다. 학술적 깊이를 갖춘 세미나는 그 자체로 동시대 미술 담론의 한 부분을 구성한다. 발표자들이 제출하는 텍스트, 토론에서 오가는 논의, 청중의 질문이 모여 새로운 의미가 생산된다. 이 의미는 발표 행위 자체에서 그치지 않고 기록되고, 출판되고, 디지털 아카이브에 누적된다.
둘째, 세미나는 관계망 형성의 결절점(node)이다. 한 차례의 세미나에는 작가, 비평가, 큐레이터, 학자, 연구자, 컬렉터, 일반 관객이 함께 모인다. 이들이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의제를 논의하는 경험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신뢰와 협업의 토대를 만든다. 부르디외가 말한 사회자본(social capital)이 형성되는 구체적 장면이 바로 여기에 있다.
셋째, 세미나는 플랫폼의 학술적·비평적 정당성을 가시화한다. 아이테르가 단순한 갤러리나 이벤트 공간이 아니라 동시대 미술의 진지한 담론 생산자임을 외부에 입증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 중 하나가 깊이 있는 세미나의 지속적 운영이다. 이 정당성은 다시 작가, 비평가, 기관, 컬렉터의 신뢰로 이어진다.
넷째, 세미나는 플랫폼의 미래 인적 자원을 발굴하는 통로이다. 신진 큐레이터, 연구자, 비평가가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플랫폼과 관계를 맺는다. 이들은 미래의 협업자, 연구자, 글쓴이가 될 잠재적 파트너이다.
세미나의 인프라적 기능은 단순한 행사 운영을 넘어선다. 그것은 아이테르 플랫폼의 정체성과 지속성을 만들어내는 핵심 메커니즘이다.
4.5 디지털 아카이브: 흩어진 시간의 재구성
아이테르의 디지털 아카이브(digital archive)는 단순한 기록 보관소가 아니다. 그것은 플랫폼이 자기 자신을 가시화하고, 외부에 자신의 정체성을 제시하며, 내부적으로 새로운 의미 생산의 자원을 만들어내는 인프라이다.
푸코의 아카이브 개념을 다시 환기하자. 푸코에게 아카이브는 "특정 시기에 무엇이 말해질 수 있고 말해질 수 없는가를 결정하는 담론적 규칙의 체계"이다. 즉, 아카이브는 단순히 과거에 일어난 일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현재의 가능성을 구조화하는 인프라이다. 아이테르의 디지털 아카이브는 이러한 푸코적 의미의 아카이브에 가깝다.
구체적으로 아이테르의 디지털 아카이브는 다음과 같은 자료들로 구성된다. 첫째, 전시 기록(exhibition record)이다. 전시 도록, 작품 이미지, 설치 사진, 전시 텍스트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보관된다. 둘째, 세미나 기록이다. 세미나의 발표 자료, 토론 내용, 참여 학자와 비평가의 텍스트가 누적된다. 셋째, 작가 인터뷰와 작품 노트(artist interview and work note)이다. 작가의 작업 과정과 사유를 담은 콘텐츠가 정기적으로 생산된다. 넷째, 큐레이토리얼 노트와 도시 연구 자료(curatorial note and urban research)이다. 부산 원도심의 역사, 범일동의 도시적 텍스처, 동시대 미술 담론과의 접점에 관한 연구 자료가 축적된다. 다섯째, 글로벌 동시대 미술 뉴스와 비평이다. 아이테르가 자체적으로 큐레이팅한 글로벌 미술 담론의 흐름이 정리된다.
이 다섯 가지 자료의 집적은 단순한 양적 누적이 아니라 구조적 변환을 만들어낸다. 각각의 자료는 다른 자료와 연결될 때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한 작가의 인터뷰는 그 작가의 전시 기록과 연결되어 더 풍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고, 그 전시는 그것이 다뤘던 의제에 관한 세미나 기록과 연결되어 더 깊은 담론적 위치를 갖는다. 디지털 아카이브의 하이퍼링크적 구조(hyperlinked structure)는 이러한 연결을 가시화하고 항시적으로 작동하게 만든다.
또한 디지털 아카이브는 시간성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통상적 전시는 시작과 끝이 있는 단속적(discrete) 시간 구조를 갖지만, 디지털 아카이브는 모든 과거의 프로젝트를 현재의 시점에서 동시에 접근 가능하게 만든다. 5년 전의 전시 기록과 어제의 비평 텍스트가 같은 페이지에서 함께 보일 수 있다. 이는 단순한 검색 편의성을 넘어, 플랫폼의 시간성 자체를 재구성한다.
4.6 제도적 담론: 제도와의 매개
마지막으로 본 장은 아이테르가 제도 미술관 및 학술 기관과 맺는 관계를 다룬다. 아이테르는 단순한 독립예술공간으로 머무르지 않고, 국립현대미술관(MMCA,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서울시립미술관(SeMA, Seoul Museum of Art) 등 한국의 주요 제도 미술관들과 세미나 협업, 담론 협력을 통해 제도적 담론(institutional discourse)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적 관계는 양가적 의미를 갖는다. 한편으로 제도와의 협업은 플랫폼의 정당성을 강화하고, 자원과 기회를 확대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플랫폼의 자율성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과 안드레아 프레이저(Andrea Fraser)가 지적했듯이, 제도 비판(institutional critique)의 역사는 제도 외부에 있던 비판적 실천이 어떻게 제도 내부로 흡수되어 결국 제도의 한 형식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이기도 하다.
아이테르의 전략은 이러한 양가성을 의식적으로 다룬다. 제도와의 협업은 일방적 흡수가 아니라 상호적 매개 관계(mutual mediation)로 설정된다. 아이테르는 제도 미술관이 자체적으로 다루기 어려운 의제, 형식, 관계망을 제공하며, 제도 미술관은 아이테르가 자체적으로 도달하기 어려운 규모, 자원, 가시성을 제공한다. 이러한 상호성 위에서 양측은 각각의 자율성을 유지하며 공동의 담론적 영토를 확장한다.
이러한 하이브리드 모델(hybrid model)의 의의는 적지 않다. 한국 미술 생태계는 오랫동안 "제도 vs 독립", "공공 vs 민간", "중심 vs 주변"이라는 이분법으로 구조화되어 왔다. 아이테르의 실천은 이러한 이분법을 넘어선 새로운 위치를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제도의 자원을 활용하면서도 독립적 비평성을 유지하고, 부산이라는 지역적 거점에서 출발하면서도 서울·국제적 담론과 접속하는 모델이다.
4.7 종합: 도시-담론-아카이브의 브리꼴라주적 접합
본 장에서 살펴본 다섯 가지 실천—도시 번역, 담론 연속성, 관계 밀도, 세미나 인프라, 디지털 아카이브, 제도 매개—은 각기 다른 영역에서 작동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통합적 브리꼴라주 실천의 다양한 측면들이다. 이 실천의 핵심은 부산 원도심이라는 도시적 자원, 동시대 미술의 담론적 자원, 디지털 기술의 인프라적 자원, 제도 미술관의 정당성 자원을 이질적으로 결합하여 새로운 문화 인프라(cultural infrastructure)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이 결합은 사전 설계가 아니라 사용 가능한 자원의 한계 안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브리꼴라주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임시적 결합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축적되어 플랫폼의 구조적 인프라가 된다는 점에서 구성적(constructive)이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도시-담론-아카이브의 접합이 어떻게 구체적인 비즈니스 모델과 상징자본의 형성으로 이어지는가를 분석한다.
5장. 브리꼴라주 실천 ②: 비즈니스 모델과 상징자본의 다층적 구축
5.1 두 가지 경제의 동시적 작동
부르디외는 문화장을 분석하면서, 그 장이 두 가지 상이한 경제 원리에 의해 동시적으로 작동한다고 보았다. 한편에는 단기적·상업적 경제(short-term commercial economy)가 있다. 이 경제에서는 작품과 서비스가 시장에서 가격을 통해 거래되고, 즉각적 수익을 발생시킨다. 다른 한편에는 장기적·상징적 경제(long-term symbolic economy)가 있다. 이 경제에서는 작품과 작가, 큐레이터와 플랫폼이 동료들의 인정, 비평적 평가, 학술적 정당성을 통해 상징자본(symbolic capital)을 축적한다. 부르디외는 이 두 경제가 서로 독립적이지만 동시에 깊이 얽혀 있다고 보았다. 단기 시장에서의 성공이 곧 장기 상징적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으며, 때로는 정반대로 작용한다. 그러나 장기 상징적 성공은 결국 안정적인 단기 시장 성공의 기반이 된다.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비즈니스 모델(business model)은 이 두 경제의 동시적 작동을 의식적으로 설계한다. 3장에서 살펴본 세 가지 축—전시기획 용역 사업, 작품 판매, 교육 및 연구 프로젝트—은 각기 두 경제에 서로 다른 비중으로 관여한다. 본 장에서는 이 세 축이 어떻게 단기 경제와 장기 상징적 경제를 결합하며 작동하는가를 더 깊이 분석한다.
5.2 전시기획 용역 사업의 이중 작동
전시기획 용역 사업은 표면적으로 보면 가장 명확한 단기 경제 활동이다. 외부 의뢰 기관(병원, 호텔, 기업, 공공기관)으로부터 비용을 받고 전시 기획과 설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일종의 B2B(Business-to-Business, 기업 간 거래) 서비스 사업이다. 그러나 이 사업이 플랫폼 전체의 작동 구조 안에서 갖는 의미는 단순한 매출 발생을 넘어선다.
첫째, 전시기획 용역은 플랫폼의 담론적 영토를 외부 공간으로 확장하는 통로이다. 의뢰 기관의 공간—병원 로비(hospital lobby), 호텔 라운지(hotel lounge), 기업 본사, 공공기관 전시실—은 아이테르의 큐레이토리얼 사유가 실제로 작동하는 공간이 된다. 이 공간들은 단순히 전시가 진행되는 외부 장소가 아니라, 아이테르가 다루는 의제가 새로운 맥락에서 검증되고 변형되는 장소이다.
예를 들어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동시대 미술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를 묻는 일은 단순한 장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의료 공간(medical space)의 권력 구조, 환자와 의료진의 관계, 치유의 미학(aesthetics of healing), 도시 안에서 병원이라는 시설이 갖는 사회적 위치 같은 복합적 질문을 동반한다. 아이테르가 병원 전시를 기획할 때 그 기획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큐레이토리얼 답변이며, 이 답변은 다시 아이테르의 담론적 정체성을 풍부하게 만든다.
둘째, 전시기획 용역은 작가와의 새로운 협업 가능성을 연다. 자체 공간(범일가옥)의 물리적·재정적 제약 안에서 진행하기 어려운 규모와 형식의 협업이 외부 공간 프로젝트를 통해 가능해진다. 큰 규모의 설치 작업(installation work), 장기간의 사이트-스페시픽 작업, 다수 작가의 공동 작업이 이러한 외부 프로젝트에서 시도될 수 있다. 이는 작가에게도 플랫폼에도 자산이 된다.
셋째, 전시기획 용역은 의뢰 기관 자체를 플랫폼의 확장된 행위자 네트워크(extended actor network)로 편입시킨다. 한 차례의 용역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뢰 기관이 지속적인 컬렉터, 후원자, 협업 파트너로 발전할 가능성이 열린다. 부르디외가 강조한 사회자본의 축적이 이 통로를 통해 일어난다.
이러한 다층적 작동 덕분에 전시기획 용역은 단순한 외주 사업이 아니라, 플랫폼의 핵심 운영 구조에 통합된 활동이 된다. 매출은 발생하지만 그 매출은 플랫폼의 담론적 정당성과 행위자 네트워크의 확장 위에서만 안정적으로 발생한다. 즉, 단기 경제는 장기 상징적 경제 위에서 작동한다.
5.3 작품 판매의 상징자본 메커니즘
작품 판매 역시 유사한 이중 작동 구조를 갖는다. 아이테르의 작품 판매는 두 가지 점에서 통상적 갤러리 판매와 구분된다.
첫째, 판매되는 것이 작품만이 아니라 작품의 담론적 네트워크 전체라는 점이다. 컬렉터가 아이테르를 통해 작품을 구매할 때, 그 컬렉터는 단순히 미적 오브제(aesthetic object) 하나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둘러싼 비평적 텍스트, 작가 인터뷰, 전시 이력, 큐레이토리얼 노트, 도시적 맥락 연구, 관련 세미나 기록의 네트워크에 접근하게 된다. 이 네트워크는 작품의 의미를 풍부하게 만들고, 시간이 갈수록 그 의미가 확장된다.
이는 부르디외적 의미에서 작품에 부가되는 상징자본을 가시화하고 안정화한다. 작품의 가치는 시장에서의 가격 변동에만 의존하지 않고, 그 작품이 위치한 담론적 네트워크의 깊이와 안정성에 의해 뒷받침된다. 컬렉터에게 이는 안정적 가치 보장의 의미를 갖는다. 한 작품을 소유한다는 것은 단기 시장 변동에 노출되는 일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누적되는 담론적 가치(discursive value)에 참여하는 일이 된다.
둘째, 판매 과정 자체가 컬렉터 신뢰(collector trust)의 형성 과정이다. 컬렉터는 일회적 구매자가 아니라 플랫폼의 장기적 동맹자(long-term ally)로 설정된다. 작품을 구매한 컬렉터는 그 작가의 후속 전시에 초대되고, 관련 세미나에 참여할 수 있으며, 평론과 인터뷰의 우선 수신자가 된다. 이러한 지속적 관계는 컬렉터에게 단순한 소유자가 아니라 플랫폼의 행위자라는 위치를 부여한다.
이러한 컬렉터 신뢰 모델은 한국 미술시장의 일반적 구조와 비교할 때 차별성을 갖는다. 한국 미술시장은 비교적 단기적 거래 중심으로 작동하는 경향이 있으며, 컬렉터와 갤러리의 관계는 종종 일회적 거래에 머문다. 아이테르는 이러한 구조와 다른 모델—장기적 동맹과 신뢰 위에 작동하는 컬렉터 관계—을 추구한다. 이는 단순히 윤리적 선택이 아니라 플랫폼의 지속성을 위한 전략적 결정이다.
또한 이러한 모델은 작가에게도 의미가 있다. 작가의 작품이 단기 시장의 변동에 휘둘리지 않고 장기적 담론적 가치 위에서 평가되는 환경은, 작가가 더 실험적이고 비평적인 작업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작가는 다음 작품이 즉시 팔리지 않을 것에 대한 불안 없이 작업에 집중할 수 있고, 플랫폼은 그 작업의 담론적 가치를 장기적으로 축적해 간다.
5.4 교육의 플랫폼 엔진 기능
교육 및 연구 프로젝트가 플랫폼의 엔진(platform engine)이 되는 메커니즘은 이미 3장에서 개괄적으로 언급했지만, 본 장에서는 그 구체적 작동 방식을 더 깊이 분석한다.
큐레이터 교육 프로그램의 작동을 보자. 표면적으로 큐레이터 교육은 학습자에게 큐레이팅(curating)의 이론과 실무를 가르치는 교육 서비스이다. 학습자는 수강료를 지불하고 일정 기간 동안 강의, 워크숍(workshop), 현장 실습에 참여한다. 이는 단순한 평생 교육 사업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러나 플랫폼의 관점에서 큐레이터 교육은 다음과 같은 다층적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 학습자들이 플랫폼의 미래 협업자 풀(future collaborator pool, 미래 협업자 모음)을 형성한다. 교육 과정에 참여한 신진 큐레이터들 중 일부는 졸업 후 아이테르의 보조 큐레이터(assistant curator), 객원 큐레이터(guest curator), 협업 큐레이터로 발전한다. 둘째, 학습자들은 플랫폼의 담론을 외부로 확산시키는 매개자(mediator)가 된다. 이들은 졸업 후 다른 미술기관, 갤러리, 매체에서 일하면서 자신이 아이테르에서 학습한 큐레이토리얼 사유를 적용한다. 이는 아이테르의 담론적 영향력을 플랫폼 외부로 확장한다.
셋째, 교육 과정 자체가 플랫폼의 담론 생산 메커니즘이 된다. 학습자들이 진행하는 큐레이토리얼 프로젝트, 연구 발표, 워크숍 결과물은 플랫폼의 디지털 아카이브에 누적되며, 새로운 의미 생산의 자원이 된다.
연구 프로젝트와 출판 사업도 유사한 다층 기능을 수행한다. 학술적 깊이를 갖춘 출판물은 플랫폼의 정당성을 외부에 입증하는 인프라이며, 동시에 플랫폼의 담론이 학술 영역으로 확장되는 통로이다. 출판물의 필자들은 미래의 협업자이며, 출판물의 독자들은 플랫폼의 잠재적 행위자 네트워크이다.
이러한 작동을 통해 교육·연구 프로젝트는 단순한 부가 사업이 아니라 플랫폼의 미래를 만드는 엔진으로 기능한다. 즉각적 매출은 다른 두 축(전시기획 용역, 작품 판매)에 비해 작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플랫폼의 지속성과 확장성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활동이다.
5.5 자본 다층화 전략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가지 축의 운영을 종합하면, 아이테르 범일가옥은 의식적으로 자본 다층화 전략(capital diversification strategy)을 추구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부르디외는 자본을 경제자본(economic capital), 문화자본(cultural capital), 사회자본(social capital), 상징자본(symbolic capital)의 네 가지로 구분하면서, 이 네 가지 자본이 상호 전환 가능하지만 동시에 각자 독자적 논리를 갖는다고 분석했다. 아이테르의 운영 구조는 이 네 가지 자본 모두를 의식적으로 축적하고 활용한다.
경제자본은 세 축의 활동을 통해 직접적으로 생성된다. 전시기획 용역, 작품 판매, 교육 사업이 매출을 만들고, 이 매출은 플랫폼의 운영 비용을 충당하며 새로운 프로젝트의 자원이 된다.
문화자본은 세미나, 출판, 연구, 디지털 아카이브를 통해 축적된다. 동시대 미술 담론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비평적 사유, 학술적 정당성, 도시 연구의 전문성이 플랫폼에 누적되며, 이는 다른 행위자들이 플랫폼과 협업하고자 하는 이유가 된다.
사회자본은 작가, 비평가, 큐레이터, 컬렉터, 기관, 학자의 네트워크를 통해 형성된다. 이 네트워크는 아이테르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 새로운 협업을 모색할 때, 자원을 조달할 때 핵심적 기반이 된다.
상징자본은 위 세 자본의 누적 위에서 형성된다. 그것은 아이테르라는 플랫폼이 동시대 미술 담론 안에서 차지하는 정당한 위치, 권위, 명성이며, 다른 행위자들이 아이테르와의 협업을 매력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자산이다.
이러한 네 가지 자본의 다층적 축적은 플랫폼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단일 자본에 의존하지 않게 만든다. 경제자본이 일시적으로 부족해도 다른 세 자본이 플랫폼의 작동을 지탱하고, 사회자본의 한 노드(node)가 약화되어도 다른 노드들이 플랫폼을 유지한다. 이는 1세대 대안공간들이 종종 경제자본 부족만으로 폐쇄되었던 구조적 취약성과 극명히 대비된다.
5.6 브리꼴라주적 자본 운용
본 장의 결론으로, 아이테르의 자본 운용 방식 자체가 브리꼴라주적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통상적 사업 모델은 자본의 종류를 명확히 분리하고 각각을 독립적으로 관리한다. 경제자본은 회계상의 매출과 비용으로, 문화자본은 콘텐츠 제작으로, 사회자본은 네트워킹(networking) 활동으로, 상징자본은 홍보와 평판 관리(reputation management)로 별도로 다뤄진다.
아이테르의 운용은 이와 다르다. 하나의 활동—예를 들어 하나의 전시—이 동시에 네 가지 자본을 모두 만들어낸다. 전시는 매출을 발생시키고(경제자본), 담론을 생산하며(문화자본), 행위자 네트워크를 강화하고(사회자본), 플랫폼의 권위를 누적시킨다(상징자본). 이 네 가지 차원은 분리되지 않고 통합적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통합적 운용은 사전 설계가 아니라 사용 가능한 자원의 유기적 결합 위에서 형성된다는 점에서 브리꼴라주적이다. 각각의 프로젝트는 자체의 즉각적 목적을 가지지만, 동시에 플랫폼 전체의 다층적 자본 축적에 기여한다. 한 활동이 어떤 자본을 어떻게 만들어내는가는 사전에 완전히 예측할 수 없으며, 활동의 전개 과정에서 새로운 자본 형태와 결합이 발견된다.
이 점에서 아이테르의 비즈니스 모델은 단순한 "수익 다각화"(revenue diversification) 전략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동시대 미술 플랫폼이 어떻게 지속 가능하면서도 비평적 자율성(critical autonomy)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구조적 답변이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플랫폼의 디지털 인프라와 제도 네트워크가 어떻게 확장성을 만들어내는가를 분석한다.
6장. 디지털 인프라와 제도 네트워크의 확장성
6.1 디지털은 홍보 수단이 아니라 인프라이다
오늘날 동시대 미술 플랫폼(contemporary art platform)에서 디지털은 가장 빈번하게 오해되는 영역이다. 많은 미술 공간들은 디지털을 "홍보 수단"으로 이해한다. 즉, 인스타그램(Instagram)에 전시 사진을 올리고, 페이스북(Facebook) 페이지를 운영하며, 웹사이트(website)에 행사 소식을 게시하는 활동을 디지털 전략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이해 위에서 디지털은 오프라인 활동의 부수적·보조적 도구로 위치된다.
아이테르 범일가옥이 채택하는 디지털 접근은 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디지털은 홍보 수단이 아니라 문화 인프라(cultural infrastructure) 그 자체이다. 그것은 아카이브(archive)를 작동시키는 기술적 기반이며, 담론 순환(discourse circulation)의 매질이며, 관계 연속성(relational continuity)의 토대이며, 플랫폼 자체가 자기 자신을 가시화하는 매체이다. 디지털은 오프라인 활동의 보조가 아니라, 오프라인 활동과 동등하거나 때로는 그 이상의 무게를 갖는 플랫폼의 한 차원이다.
이러한 이해는 데이비드 니보르그(David Nieborg)와 토마스 푀엘(Thomas Poell)이 분석한 "문화 생산의 플랫폼화"(platformization of cultural production)가 갖는 양가성을 의식적으로 다루는 방식이다. 거대 디지털 플랫폼(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유튜브 등)은 콘텐츠의 가시성(visibility)을 알고리즘(algorithm)으로 통제하며, 사용자의 데이터를 수익화하고, 콘텐츠의 형식을 표준화한다. 한 미술 공간이 인스타그램에만 의존할 때, 그 공간의 가시성과 담론은 결국 거대 플랫폼의 알고리즘에 종속된다.
아이테르의 전략은 자체 디지털 인프라—웹사이트와 자체 아카이브 시스템(archive system)—를 구축하는 데 무게를 둔다. 이는 거대 플랫폼을 거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여전히 외부 접점(external touchpoint)으로 활용된다. 그러나 플랫폼의 핵심 자산인 아카이브와 담론은 자체 인프라 위에 축적되며, 그 통제권이 플랫폼에 남는다.
6.2 반복 참여: 광고가 아닌 관계 기반 성장
아이테르의 디지털 성장 구조는 통상적 디지털 마케팅(digital marketing) 모델과 차별화된다. 일반적인 디지털 성장은 광고를 통한 도달(reach) 확대를 핵심 지표로 삼는다. 더 많은 사람에게 콘텐츠가 노출될수록, 더 많은 클릭(click)과 방문이 발생할수록 성공으로 측정된다. 이러한 모델에서 사용자는 일회적 방문자이며, 광고 비용을 지불해야만 지속적 도달이 가능하다.
아이테르의 성장은 이와 다른 구조를 갖는다. 핵심 지표는 도달이 아니라 반복 참여(repeat engagement), 즉 같은 사용자가 반복적으로 플랫폼에 접속하고 깊이 있게 콘텐츠를 소비하는 정도이다. 이러한 성장은 광고 비용에 의존하지 않고, 콘텐츠 자체의 질과 깊이에 의해 추동된다.
이러한 차이는 플랫폼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광고 기반 성장(advertising-based growth)에서 사용자는 콘텐츠 소비자이며, 그 관계는 일회적·표면적이다. 반복 참여 기반 성장에서 사용자는 플랫폼의 행위자 네트워크에 점진적으로 편입되는 잠재적 협업자이며, 그 관계는 지속적·심층적이다. 한 연구자가 아이테르의 디지털 아카이브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면서 플랫폼의 담론에 익숙해진다면, 그 연구자는 미래에 플랫폼의 협업 학자, 세미나 발표자, 출판 필자가 될 잠재적 가능성을 가진다.
이러한 성장 구조는 시간이 갈수록 안정성이 높아진다. 광고 기반 성장은 광고 비용 투입이 중단되면 즉시 감소하지만, 반복 참여 기반 성장은 콘텐츠 자산(content asset)이 누적될수록 자체적인 성장 모멘텀(growth momentum)을 갖는다. 디지털 아카이브에 축적된 자료들은 시간이 지나도 가치를 잃지 않으며, 오히려 다른 자료들과의 연결을 통해 의미가 더해진다.
또한 이러한 성장은 플랫폼의 비평적 자율성(critical autonomy)을 보호한다. 광고 알고리즘에 종속된 콘텐츠는 알고리즘이 선호하는 형식—짧고 자극적이고 즉각적인—으로 점차 수렴할 위험이 있다. 반복 참여 기반 콘텐츠는 깊이와 복잡성을 유지할 수 있으며, 이는 플랫폼이 진지한 동시대 미술 담론을 다루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6.3 "읽히는 플랫폼"으로의 이동
아이테르의 디지털 전략의 한 가지 특징적 표현은 플랫폼이 단순한 SNS 계정이 아니라 "읽히는 플랫폼"(readable platform)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표현은 디지털 콘텐츠의 성격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함축한다.
SNS 콘텐츠의 일반적 특성은 짧음, 즉각성, 시각성이다. 사용자는 빠르게 스크롤(scroll)하면서 콘텐츠를 소비하며, 깊이 있는 텍스트는 환영받지 못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미술 콘텐츠는 종종 작품 이미지의 시각적 매력에 의존하게 되며, 비평적 깊이는 줄어든다.
"읽히는 플랫폼"은 이러한 환경의 반대편을 향한다. 그것은 긴 호흡의 비평 텍스트(long-form critical text), 학술적 깊이를 갖춘 큐레이토리얼 노트, 깊이 있는 작가 인터뷰, 도시 연구 자료가 진지하게 읽히는 디지털 공간을 만든다. 이는 단순히 콘텐츠를 길게 쓴다는 의미가 아니라, 콘텐츠의 형식 자체가 깊은 읽기를 가능하게 하도록 설계된다는 의미이다. 폰트(font), 레이아웃(layout), 하이퍼링크(hyperlink) 구조, 검색 시스템, 큐레이션 방식이 모두 깊이 있는 읽기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조직된다.
이러한 디지털 환경은 플랫폼의 사용자를 단순한 소비자가 아닌 독자(reader)로 위치시킨다. 독자는 콘텐츠를 시간을 들여 읽고, 그 의미를 곱씹고, 다른 독자들과 그 의미를 공유한다. 이러한 독자 공동체(reader community)가 디지털 플랫폼의 핵심 자산이며, 광고 모델에 의존하지 않는 지속 가능한 성장의 토대이다.
6.4 제도적 신뢰성의 형성
디지털 인프라와 함께 아이테르의 확장성을 결정하는 또 다른 축은 제도적 신뢰성(institutional credibility)의 형성이다. 동시대 미술 생태계에서 제도와의 관계는 플랫폼의 정당성과 영향력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이다.
아이테르는 국립현대미술관(MMCA,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서울시립미술관(SeMA, Seoul Museum of Art)과 같은 한국의 주요 제도 미술관(institutional museum)들과 세미나 협업, 담론 협력의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협업은 일회적 행사가 아니라 장기적 관계의 형성으로 설정된다. 한 차례의 세미나가 다음 협업의 기반이 되고, 한 명의 큐레이터·학자가 다른 협업의 매개자가 되며, 한 출판 프로젝트가 다음 프로젝트의 모델이 된다.
이러한 제도적 관계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첫째, 그것은 아이테르의 담론적 정당성(discursive legitimacy)을 외부에 입증한다. 국립현대미술관과 협업하는 플랫폼은 단순한 지역 독립 공간이 아니라 한국 동시대 미술 담론의 진지한 참여자임을 보여준다. 이 정당성은 다른 행위자들(작가, 비평가, 컬렉터, 외부 기관)이 플랫폼과 협업할지 결정할 때 중요한 신호(signal)가 된다.
둘째, 제도적 관계는 플랫폼이 활용할 수 있는 자원과 가시성의 폭을 확대한다. 제도 미술관과의 공동 세미나는 플랫폼 단독으로 도달하기 어려운 청중과 학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출판 협업은 플랫폼의 출판 자원과 배포 채널을 확대한다. 이러한 자원 확장은 플랫폼의 자체 운영 비용을 줄이면서도 활동의 규모를 확대할 수 있게 한다.
셋째,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제도적 관계가 플랫폼의 자율성을 침식하지 않는 방식으로 설계된다는 점이다. 이는 4장에서 언급한 하이브리드 모델(hybrid model)의 핵심이다. 제도 미술관은 아이테르의 의제와 큐레이토리얼 시각을 자신의 프로그램에 흡수하지 않으며, 아이테르는 제도 미술관의 운영 논리에 종속되지 않는다. 두 행위자는 각자의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공동의 담론적 영토를 형성한다.
6.5 네트워크 확장성: 공간이 아닌 관계로 확장하기
아이테르의 장기 성장 전략은 공간 확대 중심이 아니다. 통상적 미술 공간의 성장은 더 큰 갤러리로 이전하거나, 분점(branch)을 늘리거나, 더 많은 전시를 하는 방식으로 가시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 중심 성장(space-centered growth)은 종종 부채와 운영 비용의 증가로 이어지며, 플랫폼의 비평적 자율성을 위협할 수 있다.
아이테르의 성장 전략은 네트워크 확장성(network scalability)에 무게를 둔다. 즉, 공간의 물리적 규모가 아니라 플랫폼이 관여하는 행위자 네트워크의 밀도와 폭을 확대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성장은 다음과 같은 구체적 차원에서 일어난다.
첫째, 작가 네트워크의 확대이다. 한 차례의 전시로 끝나는 일회적 작가가 아니라, 플랫폼과 장기적 협업 관계를 갖는 작가들의 수가 늘어난다. 이 작가들은 플랫폼의 다양한 프로젝트(전시, 세미나, 출판, 외부 기관 협업)에 참여하면서 플랫폼의 담론적 자산을 풍부하게 만든다.
둘째, 비평가·학자 네트워크의 확대이다. 플랫폼의 출판물에 글을 쓰는 필자들, 세미나에서 발표하는 학자들, 디지털 콘텐츠를 제작하는 비평가들의 수가 늘어난다. 이들은 플랫폼의 학술적·비평적 깊이를 강화한다.
셋째, 기관 네트워크의 확대이다. 국내외 미술관, 대학, 문화 재단(cultural foundation), 연구 기관과의 협업 관계가 확대된다. 이는 플랫폼의 활동 영역을 부산에서 서울로, 그리고 국제로 확장시킨다.
넷째, 컬렉터·후원자 네트워크의 확대이다. 플랫폼과 장기적 신뢰 관계를 갖는 컬렉터와 후원자(patron)의 수가 늘어나며, 이는 플랫폼의 경제적 안정성을 강화한다.
이러한 네트워크 확장은 공간 확장과 달리 한계 비용(marginal cost)이 낮다. 새로운 갤러리를 여는 데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지만, 새로운 작가나 학자와 협업을 시작하는 데는 그러한 비용이 들지 않는다. 또한 네트워크는 시간이 갈수록 자체적인 성장 모멘텀을 가진다. 한 명의 협업자가 다른 협업자를 매개하고, 한 프로젝트가 다음 프로젝트를 유도한다. 이는 부르디외가 말한 사회자본의 자기 강화적 성격(self-reinforcing nature)이다.
6.6 지역에서 글로벌로: 확장의 경로
네트워크 확장성의 가장 흥미로운 가능성은 지역에서 글로벌로의 확장이다. 부산 원도심이라는 거점에서 시작한 플랫폼이 어떻게 한국, 아시아,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글로벌 남반구)의 도시 담론 네트워크로 확장될 수 있는가?
이 확장의 경로는 단순한 규모 확대가 아니라, 도시 내러티브(urban narrative)의 보편성과 연결성 위에서 작동한다. 범일동이라는 장소가 다루는 의제—항만도시의 이동성, 산업적 노동의 기억, 이주민의 생활세계, 시장경제의 일상—은 부산만의 특수한 의제가 아니다. 그것은 홍콩, 카오슝(Kaohsiung), 호치민(Ho Chi Minh City), 마닐라(Manila), 다카(Dhaka), 부산, 그리고 더 나아가 라고스(Lagos), 다카르(Dakar), 아비장(Abidjan) 같은 글로벌 사우스의 항만도시들이 공유하는 의제이다.
천관흥(Chen Kuan-Hsing)이 『방법으로서의 아시아』(*Asia as Method*, 2010)에서 제안했듯이, 아시아의 도시들은 서구 중심의 글로벌 담론을 우회하여 서로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비교될 수 있는 자체적 담론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다. 아이테르의 부산 원도심 큐레이팅은 이러한 아시아 도시 담론 네트워크(Asian urban discourse network)의 한 노드(node)가 될 잠재력을 가진다.
또한 이러한 확장은 글로벌 사우스 담론과의 접속을 통해 더 넓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식민지적 유산(colonial legacy), 산업화 이후의 도시 재편(post-industrial urban reconfiguration), 글로벌화 속의 지역적 노동, 이주와 디아스포라(diaspora, 이산)—이러한 의제들은 부산이라는 도시에 깊이 새겨져 있으며, 동시에 글로벌 사우스 전체가 다루는 핵심 의제이기도 하다. 아이테르가 부산을 큐레이팅하는 작업은 이러한 글로벌 담론과의 직접적 접속의 가능성을 연다.
이러한 확장은 즉각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플랫폼의 초기 단계부터 구조적으로 내장되어 있다. 부산 원도심을 큐레이팅하는 작업이 단순히 지역 미술 활동이 아니라 글로벌 동시대 미술 담론의 한 부분으로 설계되는 것, 그것이 네트워크 확장성의 핵심이다.
이 장에서 살펴본 디지털 인프라와 제도 네트워크의 확장성은 아이테르 범일가옥이 단순한 지역 공간이 아니라 한국과 아시아, 그리고 잠재적으로 글로벌 사우스를 잇는 문화 인프라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가능성과 함께 그것이 직면한 한계와 도전을 비교 분석을 통해 살펴본다.
7장. 한계와 비교 분석, 그리고 장기 전망
7.1 비교의 좌표: 한국 독립예술공간들과의 차별성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의의를 정확히 평가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다른 독립예술공간(independent art space) 및 대안공간(alternative space)들과의 비교가 필요하다. 본 절은 몇 가지 주요 사례와의 비교를 통해 아이테르의 차별성을 명확히 한다.
알트스페이스 LOOP(Alternative Space LOOP)는 1999년 개관한 한국 최초의 비영리(non-profit) 독립예술공간이다. LOOP는 25년 이상 운영되며 한국 동시대 미술의 실험적 거점 역할을 해왔다. 신진 작가(emerging artist) 발굴, 큐레이터 공모(curator open call), 미디어 아트(media art) 실험 등 LOOP의 활동은 한국 미술 생태계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양지윤 디렉터는 인터뷰에서 25년 된 "대안공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매 순간 실천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점이 도전적이지만 동시에 즐겁다고 밝힌 바 있다. LOOP의 성과는 분명하지만, 그 성장 모델은 여전히 서울 홍대 일대라는 지역적 거점과 신진 작가 지원이라는 핵심 미션 위에 있다.
아마도예술공간(Amado Art Space)은 2013년 한남동에 개관한 비영리 예술공간이다. 아마도는 한국 동시대 미술 담론을 생산하는 핵심 독립공간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연례 큐레이터·작가 지원 프로그램(annual support program), 사진상(photography award), 전시상(exhibition award) 등을 운영해 왔다. 아마도의 강점은 비평적 깊이와 큐레이토리얼 실험(curatorial experimentation)이며, 1970~80년대 주거용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는 공간의 물리적 특성도 그 정체성의 일부를 이룬다.
사루비아다방(Project Space SARUBIA)은 1999년 인사동에서 시작된 비영리 갤러리로, 미술·건축·음악·무용·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실험적 작업을 지원해 왔다. 사루비아는 매년 공모를 통해 발굴된 신진 작가들을 지원하며, 오랜 시간 동안 한국 실험예술(experimental art)의 한 축을 담당해 왔다.
이러한 1세대·2세대 독립예술공간들과 비교했을 때 아이테르 범일가옥은 몇 가지 점에서 차별화된다. 첫째, 지역적 거점이다. LOOP, 아마도, 사루비아가 모두 서울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아이테르는 부산 원도심에 위치한다. 이는 단순한 지리적 차이가 아니라 플랫폼이 다루는 의제와 담론적 영토의 차이를 만든다. 둘째, 운영 모델이다. 위 공간들이 기본적으로 비영리 모델 위에서 작가 지원을 핵심 미션으로 삼는다면, 아이테르는 전시기획 용역, 작품 판매, 교육·연구의 3축 비즈니스 모델(three-axis business model) 위에서 운영된다. 셋째, 도시성과의 결합이다. 아이테르는 부산 원도심이라는 도시적 자원을 플랫폼의 핵심 콘텐츠로 통합하며, 이는 다른 공간들이 작가나 작품 중심으로 운영되는 것과 구별된다.
이러한 비교는 우열의 평가가 아니다. 각 공간은 자신의 시기, 지역, 미션에 맞는 형식을 발전시켜 왔으며, 아이테르의 모델 역시 부산이라는 지역과 현재의 시기적 조건 위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비교를 통해 분명해지는 것은, 아이테르가 한국 독립예술공간의 역사에서 새로운 범주의 위치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7.2 한계 ①: 자원과 인적 인프라의 제약
아이테르가 직면한 첫 번째 구조적 한계는 자원과 인적 인프라(human infrastructure)의 제약이다. 부산이라는 지역에서 운영되는 독립적 플랫폼이 도달할 수 있는 자원의 절대량은 서울 중심의 대형 기관에 비해 작다. 후원자(patron), 컬렉터(collector), 협업 기관, 인재 풀(talent pool) 모두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이러한 한계는 플랫폼의 운영에 여러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첫째, 인적 자원의 측면에서 플랫폼의 운영을 담당하는 핵심 인력의 수가 제한적이다. 큐레이터, 코디네이터(coordinator), 비평가, 디지털 콘텐츠 제작자(digital content producer) 같은 다양한 역할이 종종 소수의 인력에게 중첩되며, 이는 운영의 강도를 높이고 번아웃(burnout, 소진)의 위험을 키운다.
둘째, 재정적 자원의 측면에서 플랫폼이 동원할 수 있는 자본의 규모가 제한적이다. 대규모 작가 협업, 국제 전시(international exhibition), 출판 프로젝트(publication project) 같은 활동을 위해서는 상당한 자본이 필요하지만, 자체 수익만으로 이를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공공 지원금(public funding), 기업 후원(corporate sponsorship), 컬렉터 후원 등 외부 자원에 의존해야 하지만, 부산 지역에서 동원 가능한 외부 자원의 규모도 한정적이다.
셋째, 인재 풀의 측면에서 플랫폼과 협업할 수 있는 큐레이터, 비평가, 학자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다. 서울과 달리 부산에는 동시대 미술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인력 풀이 두텁지 않다. 이는 플랫폼이 진행할 수 있는 프로젝트의 다양성과 깊이를 일정 부분 제약한다.
이러한 한계에 대응하는 아이테르의 전략은 부분적으로 이미 6장에서 다룬 네트워크 확장성(network scalability)의 논리에 기반한다. 즉, 부산이라는 지역에 갇히지 않고 서울, 그리고 국제 네트워크와 연결됨으로써 자원과 인적 인프라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확장은 시간이 걸리며, 그 사이의 운영 압박은 플랫폼이 직면한 실제적 도전이다.
7.3 한계 ②: 모델의 재현 가능성과 의존성
두 번째 한계는 아이테르 모델의 재현 가능성(replicability)에 관한 질문이다. 아이테르가 보여주는 플랫폼 모델이 한국 동시대 미술 생태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모델이 다른 지역, 다른 운영진, 다른 조건에서 재현될 수 있는가는 별개의 질문이다.
아이테르의 운영은 부산 원도심이라는 특수한 도시 조건, 운영진의 특정한 학술적·큐레이토리얼 배경, 한국 동시대 미술 생태계의 현 단계라는 시기적 조건 위에서 가능했다. 이러한 조건들이 다른 시공간에서 동일하게 갖춰지기는 어렵다. 또한 아이테르의 성공이 운영진 개인의 역량과 헌신에 의존하는 부분이 크다면, 그 개인이 플랫폼을 떠날 때 플랫폼의 지속성이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가의 질문이 제기된다.
이는 모든 플랫폼이 직면하는 보편적 도전이다. 하워드 베커(Howard Becker)가 『예술 세계』(*Art Worlds*, 1982)에서 강조했듯이, 예술 세계는 다수 행위자들의 협업으로 작동하지만, 그 협업을 조직하고 유지하는 핵심 행위자—그가 "지원 인력"(support personnel)이라 부른—에 종종 과도하게 의존한다. 이러한 의존성을 어떻게 분산시키고, 운영진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가는 플랫폼의 장기적 과제이다.
아이테르가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분산된 큐레이토리얼(distributed curatorial) 구조, 디지털 아카이브를 통한 지식의 외부화(externalization of knowledge), 다층적 행위자 네트워크의 형성은 이러한 의존성을 줄이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산이 충분히 진행되었는가, 그것이 플랫폼의 정체성과 비평적 깊이를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가능한가는 지속적으로 검증되어야 할 질문이다.
7.4 한계 ③: 제도화의 위험
세 번째 한계는 플랫폼의 성장이 가져올 수 있는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의 위험이다. 안드레아 프레이저(Andrea Fraser)가 「제도 비판에서 비판의 제도로」("From the Critique of Institutions to an Institution of Critique", 2005)에서 분석했듯이, 동시대 미술의 비판적 실천은 종종 자신이 비판하던 제도의 한 형식으로 흡수되는 역사적 운동을 보여준다.
아이테르가 제도 미술관과의 협업, 디지털 인프라의 안정화, 비즈니스 모델의 성숙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것 자체가 새로운 제도로 굳어질 위험이 있다. 초기의 실험성과 비평적 자율성(critical autonomy)이 운영의 안정성을 위한 절차와 형식으로 대체되고, 새로운 행위자의 진입이 어려워지며, 플랫폼이 자신의 역사를 반복하는 보수적 구조(conservative structure)로 변할 가능성이다.
이러한 위험은 아이테르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성공적 플랫폼이 직면하는 보편적 위험이다. 부르디외가 분석했듯이, 한 행위자가 문화장 안에서 상징자본을 누적할수록 그 행위자는 점차 자신이 누적한 자본을 보호하는 보수적 위치로 이동하는 경향을 갖는다. 새로운 실험과 비평을 가능하게 했던 한계의 위치에서 점차 새로운 한계를 지키는 정통(orthodoxy)의 위치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 위험에 대한 의식적 대응으로 플랫폼은 지속적인 자기 비판(self-critique)과 재구성의 메커니즘을 내장해야 한다. 새로운 행위자의 진입을 의식적으로 조직하고, 기존 형식을 정기적으로 재검토하며, 외부 비판에 열려 있는 구조를 유지하는 일이다. 이는 어렵고 지속적인 작업이지만, 플랫폼이 자기 자신의 성공에 의해 침몰하지 않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7.5 글로벌 사우스 도시 담론으로의 확장 가능성
이러한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아이테르 범일가옥은 장기적으로 의미 있는 확장 가능성을 가진다. 특히 6장에서 언급한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도시 담론 네트워크로의 확장은 플랫폼의 가장 흥미로운 잠재적 경로이다.
부산이라는 도시는 이러한 확장에 적합한 위치를 가진다. 첫째, 부산은 항만도시이자 산업도시이며 동시에 이주의 도시로서, 글로벌 사우스 다수의 항만도시들과 구조적 유사성을 가진다. 호치민, 마닐라, 카오슝, 자카르타(Jakarta), 콜롬보(Colombo) 같은 도시들이 직면한 의제—식민지 유산(colonial legacy), 산업적 변형, 노동 이주(labor migration), 글로벌 자본과 지역 생활의 충돌—는 부산이 다뤄온 의제와 깊이 공명한다.
둘째, 부산은 동아시아 비엔날레 네트워크(East Asian biennial network)의 한 축을 형성한다.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타이베이비엔날레(Taipei Biennial), 요코하마트리엔날레(Yokohama Triennale), 후쿠오카아시아미술트리엔날레(Fukuoka Asian Art Triennale) 같은 행사들은 동아시아의 도시들이 서로 연결되며 글로벌 동시대 미술 담론에 참여하는 통로이다. 아이테르는 이러한 비엔날레 네트워크의 공식적 구성원이 아니지만, 그 네트워크와 평행한 독립적 플랫폼 네트워크(parallel independent platform network)를 형성할 가능성을 가진다.
셋째, 글로벌 사우스 큐레이토리얼 담론의 흐름이 이러한 확장에 우호적이다. 발터 미뇰로(Walter Mignolo), 오쿠이 엔웨조(Okwui Enwezor) 등이 발전시킨 탈식민주의·디콜로니얼(decolonial) 큐레이토리얼 담론은 서구 중심의 미술 담론을 우회하여 글로벌 사우스 도시들이 직접 연결되는 새로운 네트워크의 가능성을 제시해 왔다. 인도네시아 콜렉티브(collective) 루앙루파(ruangrupa)가 2022년 도큐멘타 15(Documenta 15)의 예술감독을 맡으며 글로벌 사우스 큐레이토리얼 모델의 가능성을 입증한 사건은 이러한 흐름의 분명한 신호였다.
아이테르가 이러한 글로벌 흐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다면, 부산 원도심이라는 거점에서 시작한 플랫폼이 한국, 아시아, 그리고 글로벌 사우스를 잇는 문화 인프라(cultural infrastructure)의 한 노드로 성장할 가능성이 열린다. 이는 한국 미술 생태계가 서울 중심성(Seoul-centrism)과 서구 종속성(Western dependency)을 동시에 넘어서는 새로운 경로를 의미한다.
7.6 정책·지원 환경의 변수
마지막으로 본 장은 플랫폼의 지속성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 정책·지원 환경의 변수를 짚는다. 한국의 문화예술 지원 정책, 부산광역시의 문화도시(cultural city) 정책, 국립·시립 미술관의 협업 정책, 사립 재단의 후원 환경은 모두 플랫폼의 운영 조건을 형성하는 외부 변수들이다.
이러한 외부 환경은 플랫폼의 직접적 통제 영역 밖에 있지만, 플랫폼의 지속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한국 정부의 문화예술 지원 예산이 축소되거나, 지원 방향이 변화하거나, 부산광역시의 문화 정책이 다른 우선순위로 이동할 때, 플랫폼의 운영 조건도 함께 변화한다.
이러한 외부 의존성을 줄이는 한 가지 방식이 자체 비즈니스 모델(self-sustaining business model)의 강화이다. 전시기획 용역, 작품 판매, 교육·연구의 3축 비즈니스 모델은 플랫폼이 외부 지원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운영비를 충당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그러나 동시대 미술 플랫폼의 활동이 순수하게 시장 논리만으로 운영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하다. 비평적 깊이를 갖춘 세미나, 학술적 출판(academic publication), 신진 작가 지원 같은 활동은 즉각적 수익을 발생시키지 않으면서도 플랫폼의 핵심 활동이다. 이러한 활동을 위한 외부 지원의 확보는 플랫폼의 지속성에 여전히 중요하다.
따라서 플랫폼의 장기 전망은 자체 수익 모델의 강화와 외부 지원 환경의 적극적 활용 사이의 균형 위에서 결정된다. 이 균형은 시기마다 다르게 조정되어야 하며, 플랫폼이 운영 방향의 자율성을 유지하면서도 외부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유연성(flexibility)이 요구된다.
이상의 한계와 가능성에 대한 검토는 아이테르 범일가옥이 한국 미술 생태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그 미래를 균형 있게 평가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다음 결론에서는 이러한 분석을 종합하여 아이테르가 한국 큐레이토리얼 플랫폼 모델로 갖는 의미를 정리한다.
결론: 한국 큐레이토리얼 플랫폼 모델로서의 아이테르 범일가옥
종합
본 보고서는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실천을 "브리꼴라주(bricolage)를 통한 플랫폼 구축"이라는 분석틀로 검토해 왔다. 일곱 개 장에 걸친 분석을 통해 도달한 결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아이테르 범일가옥은 한국 동시대 미술 생태계(contemporary art ecosystem)의 구조적 전환 속에서 등장한 새로운 형식의 문화 인프라(cultural infrastructure)이다. 그것은 1세대 대안공간(alternative space)의 생존형 운영과 제도 미술관(institutional museum)의 거대 행정 구조 사이의 회색지대에서, 부산 원도심이라는 지역적 거점을 활용해 새로운 플랫폼(platform) 모델을 구축하고 있다. 이 모델은 단순한 절충이나 중간자가 아니라 새로운 범주의 위치이다.
둘째, 이 플랫폼의 실천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개념은 브리꼴라주이다. 그러나 본 보고서가 사용한 브리꼴라주는 자원 부족의 미학이 아니라 도시, 담론(discourse), 아카이브(archive), 제도, 디지털이라는 이질적 자원들을 시간 속에서 누적적으로 결합하여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내는 구성적 실천(constructive practice)을 의미한다. 레비스트로스(Lévi-Strauss)의 원형적 개념, 데리다(Derrida)의 일반화, 드 세르토(de Certeau)의 일상적 전술(tactics), 그리고 부르디외(Bourdieu)의 자본 다층화, 부리오(Bourriaud)의 관계미학(relational aesthetics), 포스터(Foster)의 아카이브적 충동(archival impulse), 서르닉(Srnicek)의 플랫폼 자본주의(platform capitalism) 논의가 이 분석틀을 함께 떠받친다.
셋째, 아이테르의 비즈니스 모델(business model)은 단기 경제(short-term economy)와 장기 상징적 경제(long-term symbolic economy)를 동시에 작동시키는 다층적 구조를 갖는다. 전시기획 용역, 작품 판매, 교육 및 연구 프로젝트라는 세 축은 각기 경제자본(economic capital), 문화자본(cultural capital), 사회자본(social capital), 상징자본(symbolic capital)을 동시에 축적하며, 이 다층적 자본은 플랫폼의 지속성과 비평적 자율성(critical autonomy)을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
넷째, 아이테르의 확장성은 공간 규모가 아니라 네트워크 확장성(network scalability)—관계 네트워크의 밀도와 폭—위에서 작동한다. 디지털 인프라(digital infrastructure)는 단순한 홍보 수단이 아니라 아카이브, 담론, 관계의 인프라로 기능하며, 제도 미술관과의 협업은 플랫폼의 자율성을 침식하지 않는 하이브리드 모델(hybrid model)로 설계된다.
다섯째, 이러한 플랫폼 모델은 부산이라는 지역적 거점에서 시작해 한국, 아시아, 그리고 잠재적으로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도시 담론 네트워크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다. 부산이라는 항만도시(port city)의 내러티브(narrative)는 글로벌 사우스 도시들이 공유하는 의제와 깊이 공명하며, 아이테르는 이 공명을 플랫폼 자산(platform asset)으로 전환할 잠재력을 가진다.
학술적 기여
본 연구가 갖는 학술적 기여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 브리꼴라주 개념을 동시대 미술 플랫폼(contemporary art platform)의 분석틀로 정식화했다. 기존의 브리꼴라주 논의는 주로 인류학(anthropology), 문화이론(cultural theory), 디자인, 일상생활 연구에 집중되어 왔으며, 동시대 미술 플랫폼의 운영 양식을 분석하는 데는 충분히 활용되지 못해 왔다. 본 연구는 레비스트로스, 데리다, 드 세르토, 부르디외, 부리오, 포스터, 서르닉의 이론적 자원을 종합하여 "브리꼴라주를 통한 플랫폼 구축"이라는 분석틀을 제안했다.
둘째, 한국 동시대 미술 생태계의 구조적 전환에 대한 새로운 사례 연구(case study)를 제공했다. 1세대 대안공간 연구가 1990년대 후반~2000년대의 한국 미술 생태계를 다뤘다면, 본 연구는 2020년대 플랫폼화(platformization)된 미술 생태계의 새로운 사례를 분석함으로써 한국 동시대 미술 연구에 시간적·이론적 갱신을 더한다.
셋째, 부산이라는 비-수도권 지역의 동시대 미술 실천에 학술적 가시성(academic visibility)을 부여했다. 한국 미술 연구는 오랫동안 서울 중심성(Seoul-centrism)에 의해 구조화되어 왔으며, 부산을 포함한 지역의 실천은 충분히 분석되지 못해 왔다. 본 연구는 아이테르 범일가옥을 통해 부산의 동시대 미술 실천이 갖는 의의와 가능성을 학술적으로 검토했다.
넷째, 글로벌 사우스 큐레이토리얼 담론(curatorial discourse)과 한국 미술 생태계의 접속 가능성을 시론적으로 제기했다. 부산이라는 항만도시의 내러티브가 글로벌 사우스 도시 담론과 어떻게 공명할 수 있는가, 그리고 한국 미술 생태계가 서울 중심성과 서구 종속성(Western dependency)을 동시에 넘어설 수 있는 경로가 무엇인가에 대한 시론적 답변을 제시했다.
실천적 시사점
본 연구는 학술적 기여뿐 아니라 실천적 시사점(practical implication)도 갖는다.
첫째, 한국 독립예술공간(independent art space)과 동시대 미술 플랫폼을 운영하거나 기획하는 실무자들에게, 자원 제약 속에서도 지속 가능한 비평적 플랫폼을 구축할 수 있는 모델적 사례를 제공한다. 자체 비즈니스 모델, 디지털 아카이브 인프라, 제도와의 협업 관계의 균형적 조합은 다른 플랫폼들에게도 참고할 만한 전략이 된다.
둘째, 부산 및 다른 비-수도권 지역의 문화 정책 입안자(cultural policy maker)들에게, 지역 기반 미술 플랫폼이 단순한 지역 문화 활성화 도구가 아니라 글로벌 동시대 미술 담론에 참여하는 자율적 인프라(autonomous infrastructure)가 될 수 있다는 시각을 제공한다. 이는 지역 문화 정책이 관광 진흥(tourism promotion)이나 도시 브랜딩(city branding)에 종속되지 않고 비평적 문화 인프라의 구축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방향성을 시사한다.
셋째, 컬렉터, 후원자, 협업 기관에게, 단기적 시장 가치가 아닌 장기적 담론적 가치(discursive value) 위에서 작동하는 미술 플랫폼과의 관계 맺기에 대한 모델을 제공한다. 이러한 관계는 컬렉터와 후원자에게도 단기 거래 이상의 의미—동시대 미술 담론의 한 행위자로서의 위치—를 부여한다.
후속 연구의 방향
본 연구는 시작점이며, 다음과 같은 후속 연구 방향을 제안한다.
첫째, 아이테르 범일가옥의 시계열적 발전에 대한 종단 연구(longitudinal study)가 필요하다. 본 보고서는 현재 시점에서의 플랫폼 구조를 분석했지만, 이 플랫폼이 향후 5년, 10년에 걸쳐 어떻게 변화하는가, 본 보고서가 제기한 한계들이 어떻게 다뤄지는가는 지속적 추적 연구를 통해서만 답할 수 있다.
둘째, 한국 내 다른 플랫폼 모델과의 체계적 비교 연구(comparative study)가 필요하다. 본 연구는 LOOP, 아마도예술공간(Amado Art Space), 사루비아다방(Project Space SARUBIA) 등과의 비교를 간략히 다뤘지만, 더 본격적인 비교 분석—운영 모델, 비즈니스 구조, 담론적 정체성, 디지털 인프라 등의 측면에서—은 한국 동시대 미술 플랫폼의 다양성과 진화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셋째, 글로벌 사우스 플랫폼 네트워크(Global South platform network)와의 비교·접속에 대한 국제적 비교 연구가 필요하다. 인도네시아 루앙루파(ruangrupa), 필리핀 그린 파파야 아트 프로젝트(Green Papaya Art Projects), 베트남 산 아트(Sàn Art), 인도 코지(KHOJ) 같은 플랫폼들과의 비교는 아이테르가 어떻게 글로벌 플랫폼 네트워크에 위치할 수 있는가에 대한 더 명확한 답변을 제공할 것이다.
넷째, 동시대 미술 플랫폼의 디지털 인프라에 대한 기술적·미디어적 분석이 필요하다. 본 연구는 디지털 인프라의 의미와 기능을 다뤘지만, 그 기술적 작동 방식—데이터 구조(data structure), 검색 시스템(search system), 사용자 인터페이스(user interface), 접근성(accessibility) 등—에 대한 더 세밀한 분석은 미디어 연구(media studies)와 디지털 인문학(digital humanities)의 자원을 동원해야 가능하다.
마치며
아이테르 범일가옥은 아직 완성된 기관(institution)이 아니다. 그것은 작동 중인 문화 인프라이며, 매 순간 자기 자신을 재구성하면서 진화하고 있는 플랫폼이다. 본 보고서가 그린 그림은 어떤 종착점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ongoing)의 운동이다.
그러나 바로 이 운동성이 아이테르의 의의이다. 한국 동시대 미술 생태계는 1990년대 후반 1세대 대안공간의 등장 이래 여러 차례 구조적 전환을 경험해 왔으며, 매번 새로운 형식의 플랫폼이 그 전환을 매개해 왔다. 아이테르 범일가옥은 2020년대 플랫폼화된 미술 생태계의 한 답변이며, 부산이라는 지역에서 출발해 한국과 아시아, 그리고 더 넓은 담론 네트워크와 접속하려는 시도이다.
이 시도가 어떻게 전개될지, 그것이 어떤 새로운 가능성과 한계를 드러낼지는 앞으로의 시간이 답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이테르가 보여주는 브리꼴라주적 실천—도시와 사람, 담론과 제도, 아카이브와 디지털을 유기적으로 엮어내는 구성적 실천—이 한국 동시대 미술이 지금 다음 단계로 이동하는 데 필요한 모델적 자원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산 원도심의 한 가옥에서 시작된 이 플랫폼이 만들어갈 문화 인프라는 한 공간의 성장기를 넘어서는, 한국 큐레이토리얼 플랫폼 모델(Korean curatorial platform model)의 새로운 모델로 기록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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