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트뤼포는 전쟁에 대해 묘사하고 시각화하는 행위 자체가 그것을 고귀하게 미화하므로, 궁극적으로는 반전영화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영화는 스펙타클이라는 자본을 등에 업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관객을 끊임없이 요구해야하며 관객은 전쟁의 비극적 모습만큼이나 영웅적 주인공, 승리에 대한 서사, 긴박한 전쟁 장면의 묘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의 끝에서 결국 영화는 어떤 전쟁의 당위, 숭고함, 도취를 불러일으키기에 근본적으로 반-전 영화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수많은 반박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논쟁들을 모두 열거하기 앞서 우리는 또 다른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왜 그들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가.”, “우리는 왜 그들의 증인이 되고자 하는가?”
이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영화라는 특수성을 넘어 타자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어떤 예술 일반에 대한 하나의 이해지점으로써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사건을 직접 겪거나 목격하여 이를 발화하는 이를 우리는 ‘증인’이라 부른다. 여기서 전쟁의 참혹함을 더 깊게 파고들기 위해 용어를 세분화할 수 있다. 전쟁을 밖에서 지켜본 이를 ‘목격자’라 한다면, 그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겪어낸 이는 ‘증인’이 된다.
증인은 자신이 사건의 중심에 있었음을 증언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전쟁의 중심에서 태풍의 눈과 같이 존재하던 증인은 발화할 수 없다. 그들이 너무나도 그것과 가까이에 있었기에 더 이상 그에 대해 발화할 수 없거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지만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한 프리모레비는 “진정한 증인들은 생존자들이 아닌 죽은 자들”이라고 말한다.
나치의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서는 삶의 의지를 잃고 죽음의 문턱 앞에서 삶과 생존에 대한 어떤 희망도 없이 그저 살아가고만 있는 이들, 즉 무젤만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있었다. 그들은 무젤만으로서 강제 수용소에 대해 그 누구보다 증인의 자격을 갖추었지만, 동시에 그 자격으로 인해 그들은 소외된다.
그들은 증인이기에 증언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그들이 증언할 수 없다고 이야기할 때만 그들을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진정한 증인이라는 존재론적 불가능성 앞에서 증언하기를 포기하고 그들에게 등을 돌린 채 잠시 평화로운 삶으로 도피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는 이 불가능성에 맞서야하며, 나아가 이 불가능성으로 말미암아 다시 증언해야하고 또 다시 그 증언의 목격자로 증언대에 서야한다. 진정한 증인들이 발화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라도 누군가는 그들을 위해 증언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대해 동의한다면 말이다.
우리는 이 불가능한 증인들을 기억하고자 기념비를 세울 수 있다. 하지만 이 수직적이고 화려하며 반영구적인 기념비는 우리가 일 년 중 며칠 동안 그 앞에 고개숙이게 할 뿐이며 종국에는 이들을 다시 어떠한 도취감이나 영웅주의에 빠지게끔 만든다. 기념비는 근본적으로 무엇인가를 은폐한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적이다.
기념비적 기억은 권력적이다. 기록물저장소를 뜻하는 Archive의 어원은 집정관을 뜻하는 archon에서 시작해 그가 머무는 곳에서 유래한다. 이 곳에서 집정관은 기억할 것과 망각할 것의 분류를 진행했으며 이는 그의 권력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아카이브라는 언어의 어원이 지니는 지역적인 특수성을 차치하더라도, 기억하기 위해선 기억할 것 이외의 것들을 망각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일반적이다.
기억과 망각의 불가분의 관계는 다른 단어에도 내포되어있다. 망각을 뜻하는 Lethe 라는 단어에 부정접두사 a-붙어 진리라는 의미의 Aletheia가 탄생한다. 즉 태초의 진리 이전에 그보다도 이르게 태초의 망각이 자리잡고 있었고, 진리란 망각되지 않은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기억하기 위해선 망각이 선행된다. 앞서 말했던 것과 같이 둘은 상호배타적이지 않으며 다만 서로 끊임없이 관계한다.
그렇다면 기념비적 기억은 어째서 권력적인가.
기념비 앞에서 눈물 흘리는 인간은 숭고하다. 허나 기념비를 만들게끔 한 인간들은 우리와 얼마나 다른 인간들인가? 우리는 기념비가 주는 숭고함이라는 이름의 실로 짠 비단으로 우리 안의 악의 평범성을 애써 포장하고 있지 않은가? 기념비는 우리 안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이빨을 가진 짐승을 조용히 잠재우며, 우리는 전적으로 그 짐승을 통제할 수 있는 사육사의 지위에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기념비는 망각시킨다
앞서 트뤼포의 영화적 명제에서 예술일반의 윤리로 논의를 확장했듯이 다시 한 번 또 다른 논의로 이어진다. 불가능한 증인들에 대해 증언하는 예술은 기념비적인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를 숭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우리 안의 악의 평범성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게끔 작동해야하며, 기념비의 물질적 반영구성이 아닌 반영구적 사유의 필요성을 요구해야만 한다.
문화예술기획 : https://aither.imweb.me/Directing_service
전시용 가벽 렌탈 : https://aither.imweb.me/Home/?idx=168383314&bmode=view
AITHER
DIRECTOR. GONG MYEONGSEONG.
ADDRESS. (48737) 21, BEOMIL-RO 65BEON-GIL, DONG-GU, BUSAN, REPUBLIC OF KOREA.
PARKING : Jin Market public parking lot
4F EXHIBITION.
5F LOUNGE.
6F WAREHOUSE.
ONLINE CS. MON TO SAT 10:00-18:00.
CONTACT. 051-977-5272 | SCK02145@NAVER.COM | https://aither.kr/
INSTA. @aither.kr | YOUTUBE. [www.youtube.com/@AITHERART](http://www.youtube.com/@AITHERART)
FAX. 0504-322-2379
AITHER :: introductory material https://drive.google.com/drive/folders/14fIaNXjzbEocA0Ah317-rv8Tikv3zCwQ?usp=drive_link

프랑수아 트뤼포는 전쟁에 대해 묘사하고 시각화하는 행위 자체가 그것을 고귀하게 미화하므로, 궁극적으로는 반전영화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영화는 스펙타클이라는 자본을 등에 업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관객을 끊임없이 요구해야하며 관객은 전쟁의 비극적 모습만큼이나 영웅적 주인공, 승리에 대한 서사, 긴박한 전쟁 장면의 묘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의 끝에서 결국 영화는 어떤 전쟁의 당위, 숭고함, 도취를 불러일으키기에 근본적으로 반-전 영화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수많은 반박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논쟁들을 모두 열거하기 앞서 우리는 또 다른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왜 그들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가.”, “우리는 왜 그들의 증인이 되고자 하는가?”
이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영화라는 특수성을 넘어 타자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어떤 예술 일반에 대한 하나의 이해지점으로써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사건을 직접 겪거나 목격하여 이를 발화하는 이를 우리는 ‘증인’이라 부른다. 여기서 전쟁의 참혹함을 더 깊게 파고들기 위해 용어를 세분화할 수 있다. 전쟁을 밖에서 지켜본 이를 ‘목격자’라 한다면, 그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겪어낸 이는 ‘증인’이 된다.
증인은 자신이 사건의 중심에 있었음을 증언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전쟁의 중심에서 태풍의 눈과 같이 존재하던 증인은 발화할 수 없다. 그들이 너무나도 그것과 가까이에 있었기에 더 이상 그에 대해 발화할 수 없거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지만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한 프리모레비는 “진정한 증인들은 생존자들이 아닌 죽은 자들”이라고 말한다.
나치의 유대인 강제 수용소에서는 삶의 의지를 잃고 죽음의 문턱 앞에서 삶과 생존에 대한 어떤 희망도 없이 그저 살아가고만 있는 이들, 즉 무젤만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있었다. 그들은 무젤만으로서 강제 수용소에 대해 그 누구보다 증인의 자격을 갖추었지만, 동시에 그 자격으로 인해 그들은 소외된다.
그들은 증인이기에 증언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그들이 증언할 수 없다고 이야기할 때만 그들을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진정한 증인이라는 존재론적 불가능성 앞에서 증언하기를 포기하고 그들에게 등을 돌린 채 잠시 평화로운 삶으로 도피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는 이 불가능성에 맞서야하며, 나아가 이 불가능성으로 말미암아 다시 증언해야하고 또 다시 그 증언의 목격자로 증언대에 서야한다. 진정한 증인들이 발화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라도 누군가는 그들을 위해 증언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대해 동의한다면 말이다.
우리는 이 불가능한 증인들을 기억하고자 기념비를 세울 수 있다. 하지만 이 수직적이고 화려하며 반영구적인 기념비는 우리가 일 년 중 며칠 동안 그 앞에 고개숙이게 할 뿐이며 종국에는 이들을 다시 어떠한 도취감이나 영웅주의에 빠지게끔 만든다. 기념비는 근본적으로 무엇인가를 은폐한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적이다.
기념비적 기억은 권력적이다. 기록물저장소를 뜻하는 Archive의 어원은 집정관을 뜻하는 archon에서 시작해 그가 머무는 곳에서 유래한다. 이 곳에서 집정관은 기억할 것과 망각할 것의 분류를 진행했으며 이는 그의 권력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아카이브라는 언어의 어원이 지니는 지역적인 특수성을 차치하더라도, 기억하기 위해선 기억할 것 이외의 것들을 망각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일반적이다.
기억과 망각의 불가분의 관계는 다른 단어에도 내포되어있다. 망각을 뜻하는 Lethe 라는 단어에 부정접두사 a-붙어 진리라는 의미의 Aletheia가 탄생한다. 즉 태초의 진리 이전에 그보다도 이르게 태초의 망각이 자리잡고 있었고, 진리란 망각되지 않은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기억하기 위해선 망각이 선행된다. 앞서 말했던 것과 같이 둘은 상호배타적이지 않으며 다만 서로 끊임없이 관계한다.
그렇다면 기념비적 기억은 어째서 권력적인가.
기념비 앞에서 눈물 흘리는 인간은 숭고하다. 허나 기념비를 만들게끔 한 인간들은 우리와 얼마나 다른 인간들인가? 우리는 기념비가 주는 숭고함이라는 이름의 실로 짠 비단으로 우리 안의 악의 평범성을 애써 포장하고 있지 않은가? 기념비는 우리 안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이빨을 가진 짐승을 조용히 잠재우며, 우리는 전적으로 그 짐승을 통제할 수 있는 사육사의 지위에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기념비는 망각시킨다
앞서 트뤼포의 영화적 명제에서 예술일반의 윤리로 논의를 확장했듯이 다시 한 번 또 다른 논의로 이어진다. 불가능한 증인들에 대해 증언하는 예술은 기념비적인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를 숭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우리 안의 악의 평범성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게끔 작동해야하며, 기념비의 물질적 반영구성이 아닌 반영구적 사유의 필요성을 요구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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