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식의 피로
포식하는 주체로서의 글로벌 사우스
tupi or not tupi that is the question.
투피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다.
유럽의 열강이 브라질의 토착민들을 학살하고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은 야만적인 식인 풍습이었다. 그러나 <식인주의 선언>에서 오스왈드 디 안드라지는 그들이 내세운 프레임을 거부하지 않으며, 나아가 적극적으로 그것을 자신들이 나아가야할 정체성으로 제시한다.
그들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유럽 열강들의 문화적 유산을 마치 식인문화를 지닌 투피족과 같이 씹고, 삼켜 그들만의 능동적인 문화적 자본으로 재탄생시키자는 것이다. 이는 피식자에서 포식자로의 대범한 은유Metaphora였다.
안드라지의 첫번째 포식.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에서 권력과 여인을 독점하던 억압적인 아버지를 아들들이 반란을 통해 살해하고, 그 육신을 나누어 먹는 최초의 식인 축제를 묘사한다. 이는 단순히 식욕이 아닌, 식인을 통해 아버지의 힘과 속성을 흡수함이며, 그와 동일시되고자 하는 욕구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존재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tupi or not tupi that is the question.
투피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다.
밖으로부터의 최초의 투피, 안드라지의 두번째 포식.
사유는 기술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1989년 월드-와이드-웹(wolrd-wide-web)의 발달은 우리를 글로벌이라는 이름 하에 집결시킨다. 우리는 모든 것에 접근가능하며, 정보는 범람하며, 과거 부르주아들이 점유하던 문화자본들 마저 모두에게 열려있다. 그리고 안드라지의 선언문이 일으킨 파장이 우스워보일 정도로 현대인들은 이미 투피족보다도 더 투피-스럽다.
그러나 이 명확明確한 빛의 세계에서 벗어나 그것이 미처 닿지 않은 곳으로 이동하면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철창 속에 갇혀 여전히 사육사가 던져주는 고기만을 먹는 쇠약한 포식자가 있지 않은가. 철창 속 맹수를 파악하기위해 우리의 눈을 어둠 속에서 암순응시키다보면 새로이 명확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사육사-맹수의 관계처럼 우리는 여전히 종속적이다.
파격적인 안드라지의 선언마저도 그것은 늘 ‘원초적 아버지’를 전제로하며, 아들들이 먹은 것은 ‘아버지’의 살이요, 안드라지가 먹은 것은 건재하던 서구의 파편일 뿐이기 때문이다.
브라질을 포함한 글로벌 사우스의 모더니즘은 기존의 리얼리즘이 더 이상 세계를 충분히 묘사하거나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끊임없는 대안으로서의 모더니즘이 아니었다. 글로벌 사우스의 모더니즘이란 서구 열강들의 모더니즘이 지닌 정신성은 거세된 채 단색화 같은 박제된 형식만을 내세우는 것에서 그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의문을 품다보면 종국에는 우리에게 모더니즘이란 담론이 왔었는지에 대한 반성이 요구된다.
또한 무비판적인 투피적-포식은 먹잇감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원치한은 숙주됨을 야기함으로써 여전히 종속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암시한다.
인간이 외부로부터 에너지원을 섭취하듯이 글로벌사우스에서도 최초의 식인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같은 포식은 에너지를 얻기 위함이어야한다.
글로벌이라는 허구
지도를 펼쳐 글로벌의 실체를 지칭할 수 있는가? 손가락이 어딘가를 가리켰든, 그렇지 못하든 우리는 그것을 확신할 수 없으며 글로벌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우리에게 애매모호한 감각으로 부유한다. 모더니즘이라는 용어가 서구의 정신성과 그들의 시간대에 절대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글로벌 사우스가 외치는 글로벌이라는 용어 또한 이와 같은 혐의와 모호함을 부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글로벌 사우스라는 용어에서 ‘사우스’가 지칭하는 것은 누구인가. 해당 단어가 모호한 국가들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호주와 뉴질랜드는 남반구에 속함에도 그 경제적 지위로 인해 글로벌 노스로 분류된다. 즉 사우스라는 단어는 남반구로서 지니는 주체적 정체성이라기보단 글로벌 노스에 속하는 국가들에 비해 경제적, 문화적으로 열등함을 내포한다는 의미이다. 다시말해 글로벌 사우스가 지칭하는 대상은 그 자체로 모호한 개념이며, 여전히 서구 혹은 북반구에 대하여 종속적인 관계를 보인다.
글로벌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곳은 실재하는 장소도, 나아가 단일한 시간대도 아니다. 차라리 그것이 진정 원했던 개념은 유령적이며 동시에 유동적인 개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가 포섭되기 불가능한 것들을 하나의 단어로써 지칭하고자 한 우를 범하자마자, 글로벌은 무엇 하나 제대로 지칭하지 못하는 공허한 단어가 되었다.
글로벌은 여전히 모호하며 ,사우스는 여전히 종속적이다.
글로벌 사우스가 기능하는 단어라한들 과거에 제3세계라 불리던 그 수 많은 국가들의 예술을 글로벌 사우스로 함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외연이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남는 것은 기능하지 못하는 내연이다.
지금-여기
그런 의미에서 ‘지금-여기’라는 단어는 꽤나 애틋하게 다가온다. 그 단어 자체가 다변적인 장소와 시간대를 그 자체로 상정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은 늘 대상들을 자신들의 틀로 환원시킨다. 인간의 언어 또한 환원의 결과이며, 생물학적으로도 모든 인간은 외부의 대상을 포식해 내부의 에너지원으로 환원해야만 한다.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이러한 습성은 가히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로인해 우리는 근본적으로 나에게 환원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쾌감을 느낀다. 때론 ‘지금-여기’의 감각이 우리들로 하여금 그러한 불쾌를 일깨우는 듯하다. 그것을 환원시킬 수 없기때문에 경험 자체를 본능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지금-여기’는 때론 극단적 다원주의로 오인되곤 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글로벌 사우스라는 단어가 실질적으로 기능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하나로 지칭될 수 없는 다양한 공간과 시간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흔히 말해 미술사라는 것은 사실상 서구의 미술사이지 않은가. 우리 또한 세계 속에 포함되어있지만 그 미술사는 우리의 미술사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시간이며, 우리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고 있다.
‘지금-여기’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나열이 아닌 타인의 시공간을 나의 시간공과 병치시키는 데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를 다른 하나에 편입시키는 행위가 아니라 나의 ‘지금-여기’를 긍정하는 것과 같이 타인의 ‘지금-여기’를 긍정하는 활동이다.
이 관계항은 어떤 유토피아적인 만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타인의’ 지금-여기’는 유토피아적 연결일 수도, 적대적인 충동일 수도 있으나 클레어 비숍이 관계의 미학을 비판하며 말한 것과 같이 관계가 늘 화합만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그 어느 쪽이든 타자의 시공간이 나의 시공간과 맞닿는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 접촉의 순간에 우리의 ‘지금-여기’가 발생한다.
위에 서술했듯이 타자들의 환원-불가능성을 인정한다면 타인의 지금-여기는 타자 곁의 낯선 풍경이다.
어른은 사물을 목적성과 유용성으로 환원시키지만 어린아이에게 모든 사물은 놀이의 대상이 된다. 아이들에겐 사물이 오직 그들에게만 치켜드는 그들의 얼굴을 감지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놀이는 사물을 소유하거나 이용하기보다, 사물의 낯선 표정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가깝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어린아이가 사물에 그러하듯 우리는 타인의 지금-여기에 아이처럼 반응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글로벌 사우스를 포함하지 않거나 그를 지워버리는 ‘글로벌’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지점은 거대한 ‘글로벌’이라는 단일한 좌표계가 아니다. 오히려 각자의 ‘지금-여기’가 서로의 환원 불가능성을 지킨 채, 그 낯선 병치로부터 매번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복수의 시공간이다. 우리는 포식자로서 타자를 삼키는 것에서 더 나아가 타인들의 낯선 풍경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글로벌 노스와의 종속적 관계를 끊고 각자의 지금의 ‘글로벌 사우스’가 바라던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예술기획 : https://aither.imweb.me/Directing_serv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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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RECTOR. GONG MYEONGSEONG.
ADDRESS. (48737) 21, BEOMIL-RO 65BEON-GIL, DONG-GU, BUSAN, REPUBLIC OF KOREA.
PARKING : Jin Market public parking lot
4F EXHIBITION.
5F LOUNGE.
6F WAREHOUSE.
ONLINE CS. MON TO SAT 10:0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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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의 피로
포식하는 주체로서의 글로벌 사우스
tupi or not tupi that is the question.
투피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다.
유럽의 열강이 브라질의 토착민들을 학살하고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은 야만적인 식인 풍습이었다. 그러나 <식인주의 선언>에서 오스왈드 디 안드라지는 그들이 내세운 프레임을 거부하지 않으며, 나아가 적극적으로 그것을 자신들이 나아가야할 정체성으로 제시한다.
그들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유럽 열강들의 문화적 유산을 마치 식인문화를 지닌 투피족과 같이 씹고, 삼켜 그들만의 능동적인 문화적 자본으로 재탄생시키자는 것이다. 이는 피식자에서 포식자로의 대범한 은유Metaphora였다.
안드라지의 첫번째 포식.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에서 권력과 여인을 독점하던 억압적인 아버지를 아들들이 반란을 통해 살해하고, 그 육신을 나누어 먹는 최초의 식인 축제를 묘사한다. 이는 단순히 식욕이 아닌, 식인을 통해 아버지의 힘과 속성을 흡수함이며, 그와 동일시되고자 하는 욕구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존재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tupi or not tupi that is the question.
투피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다.
밖으로부터의 최초의 투피, 안드라지의 두번째 포식.
사유는 기술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1989년 월드-와이드-웹(wolrd-wide-web)의 발달은 우리를 글로벌이라는 이름 하에 집결시킨다. 우리는 모든 것에 접근가능하며, 정보는 범람하며, 과거 부르주아들이 점유하던 문화자본들 마저 모두에게 열려있다. 그리고 안드라지의 선언문이 일으킨 파장이 우스워보일 정도로 현대인들은 이미 투피족보다도 더 투피-스럽다.
그러나 이 명확明確한 빛의 세계에서 벗어나 그것이 미처 닿지 않은 곳으로 이동하면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철창 속에 갇혀 여전히 사육사가 던져주는 고기만을 먹는 쇠약한 포식자가 있지 않은가. 철창 속 맹수를 파악하기위해 우리의 눈을 어둠 속에서 암순응시키다보면 새로이 명확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사육사-맹수의 관계처럼 우리는 여전히 종속적이다.
파격적인 안드라지의 선언마저도 그것은 늘 ‘원초적 아버지’를 전제로하며, 아들들이 먹은 것은 ‘아버지’의 살이요, 안드라지가 먹은 것은 건재하던 서구의 파편일 뿐이기 때문이다.
브라질을 포함한 글로벌 사우스의 모더니즘은 기존의 리얼리즘이 더 이상 세계를 충분히 묘사하거나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끊임없는 대안으로서의 모더니즘이 아니었다. 글로벌 사우스의 모더니즘이란 서구 열강들의 모더니즘이 지닌 정신성은 거세된 채 단색화 같은 박제된 형식만을 내세우는 것에서 그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의문을 품다보면 종국에는 우리에게 모더니즘이란 담론이 왔었는지에 대한 반성이 요구된다.
또한 무비판적인 투피적-포식은 먹잇감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원치한은 숙주됨을 야기함으로써 여전히 종속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암시한다.
인간이 외부로부터 에너지원을 섭취하듯이 글로벌사우스에서도 최초의 식인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같은 포식은 에너지를 얻기 위함이어야한다.
글로벌이라는 허구
지도를 펼쳐 글로벌의 실체를 지칭할 수 있는가? 손가락이 어딘가를 가리켰든, 그렇지 못하든 우리는 그것을 확신할 수 없으며 글로벌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우리에게 애매모호한 감각으로 부유한다. 모더니즘이라는 용어가 서구의 정신성과 그들의 시간대에 절대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글로벌 사우스가 외치는 글로벌이라는 용어 또한 이와 같은 혐의와 모호함을 부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글로벌 사우스라는 용어에서 ‘사우스’가 지칭하는 것은 누구인가. 해당 단어가 모호한 국가들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호주와 뉴질랜드는 남반구에 속함에도 그 경제적 지위로 인해 글로벌 노스로 분류된다. 즉 사우스라는 단어는 남반구로서 지니는 주체적 정체성이라기보단 글로벌 노스에 속하는 국가들에 비해 경제적, 문화적으로 열등함을 내포한다는 의미이다. 다시말해 글로벌 사우스가 지칭하는 대상은 그 자체로 모호한 개념이며, 여전히 서구 혹은 북반구에 대하여 종속적인 관계를 보인다.
글로벌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곳은 실재하는 장소도, 나아가 단일한 시간대도 아니다. 차라리 그것이 진정 원했던 개념은 유령적이며 동시에 유동적인 개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가 포섭되기 불가능한 것들을 하나의 단어로써 지칭하고자 한 우를 범하자마자, 글로벌은 무엇 하나 제대로 지칭하지 못하는 공허한 단어가 되었다.
글로벌은 여전히 모호하며 ,사우스는 여전히 종속적이다.
글로벌 사우스가 기능하는 단어라한들 과거에 제3세계라 불리던 그 수 많은 국가들의 예술을 글로벌 사우스로 함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외연이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남는 것은 기능하지 못하는 내연이다.
지금-여기
그런 의미에서 ‘지금-여기’라는 단어는 꽤나 애틋하게 다가온다. 그 단어 자체가 다변적인 장소와 시간대를 그 자체로 상정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은 늘 대상들을 자신들의 틀로 환원시킨다. 인간의 언어 또한 환원의 결과이며, 생물학적으로도 모든 인간은 외부의 대상을 포식해 내부의 에너지원으로 환원해야만 한다.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이러한 습성은 가히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로인해 우리는 근본적으로 나에게 환원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쾌감을 느낀다. 때론 ‘지금-여기’의 감각이 우리들로 하여금 그러한 불쾌를 일깨우는 듯하다. 그것을 환원시킬 수 없기때문에 경험 자체를 본능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지금-여기’는 때론 극단적 다원주의로 오인되곤 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글로벌 사우스라는 단어가 실질적으로 기능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하나로 지칭될 수 없는 다양한 공간과 시간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흔히 말해 미술사라는 것은 사실상 서구의 미술사이지 않은가. 우리 또한 세계 속에 포함되어있지만 그 미술사는 우리의 미술사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시간이며, 우리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고 있다.
‘지금-여기’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나열이 아닌 타인의 시공간을 나의 시간공과 병치시키는 데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를 다른 하나에 편입시키는 행위가 아니라 나의 ‘지금-여기’를 긍정하는 것과 같이 타인의 ‘지금-여기’를 긍정하는 활동이다.
이 관계항은 어떤 유토피아적인 만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타인의’ 지금-여기’는 유토피아적 연결일 수도, 적대적인 충동일 수도 있으나 클레어 비숍이 관계의 미학을 비판하며 말한 것과 같이 관계가 늘 화합만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그 어느 쪽이든 타자의 시공간이 나의 시공간과 맞닿는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 접촉의 순간에 우리의 ‘지금-여기’가 발생한다.
위에 서술했듯이 타자들의 환원-불가능성을 인정한다면 타인의 지금-여기는 타자 곁의 낯선 풍경이다.
어른은 사물을 목적성과 유용성으로 환원시키지만 어린아이에게 모든 사물은 놀이의 대상이 된다. 아이들에겐 사물이 오직 그들에게만 치켜드는 그들의 얼굴을 감지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놀이는 사물을 소유하거나 이용하기보다, 사물의 낯선 표정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가깝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어린아이가 사물에 그러하듯 우리는 타인의 지금-여기에 아이처럼 반응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글로벌 사우스를 포함하지 않거나 그를 지워버리는 ‘글로벌’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지점은 거대한 ‘글로벌’이라는 단일한 좌표계가 아니다. 오히려 각자의 ‘지금-여기’가 서로의 환원 불가능성을 지킨 채, 그 낯선 병치로부터 매번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복수의 시공간이다. 우리는 포식자로서 타자를 삼키는 것에서 더 나아가 타인들의 낯선 풍경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글로벌 노스와의 종속적 관계를 끊고 각자의 지금의 ‘글로벌 사우스’가 바라던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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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용 가벽 렌탈 : https://aither.imweb.me/Home/?idx=168383314&bmod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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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ING : Jin Market public parking lot
4F EXHIBITION.
5F LOUNGE.
6F WAREHOUSE.
ONLINE CS. MON TO SAT 10:00-18:00.
CONTACT. 051-977-5272 | SCK02145@NAVER.COM | https://aither.kr/
INSTA. @aither.kr | YOUTUBE. [www.youtube.com/@AITHERART](http://www.youtube.com/@AITHER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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