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 없는 세대의 회화적 조건》 범준: 국가 없이 국제 회로에 진입한 회화

리자공
202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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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 없는 세대의 회화적 조건》 

범준: 국가 없이 국제 회로에 진입한 회화 


공명성(SPACE776 Seoul, Director)




I. 서사가 지급되지 않는 세대

범준(b.1985)이 갖는 의미를 묻는 일은 한 작가의 개별 성취를 묻는 일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세대적 조건을 묻는 일이다. 재발굴 체제는 배제의 이력을 전제한다. 묻혀 있던 거장, 독재하의 억압, 뒤늦은 세계적 인정. 이 수사들은 냉전기 한국 미술사라는 특정 자산에만 적용되는 의미부여 장치다. 1985년에 태어나 민주화 이후에 성장하고 광주비엔날레 이후의 제도 안에서 경력을 시작한 작가에게 이 장치는 작동하지 않는다. 지금 세대에게는 발굴될 과거가 없다. 그의 화면이 시장과 기관 앞에 제출할 수 있는 것은 재발견의 쾌감도, 저항의 아우라도, 저평가 해소의 수익도 없는, 오직 지금 그려지고 있는 회화의 설득력뿐이다. 이것이 이 작가를 읽는 출발점이다. 국가적 서사나 재발견 담론의 지원 없이, 2025년 서울 개인전 《무한의 상태》와 뉴욕 그룹전, 2026년 EXPO CHICAGO와 VOLTA Basel을 거치며 국제 회로에 진입한 범준의 사례는 동시대 한국 회화가 처한 새로운 조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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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준 작가 (사진: 작가제공)


II. 개인사라는 최소 단위의 서사

흥미로운 것은 그가 서사를 완전히 폐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만 서사의 단위를 바꿨다. 범준의 작업 배후에 있는 것은 국가사도 미술사도 세대론도 없는, 신체적 고통이라는 일인칭의 체험이다. 그는 고통의 시기를 통과하며 죽음을 사유했고, 삶과 죽음을 서로를 감싸며 순환하는 관계로 인식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전기는 재발굴 서사와 정확히 대칭을 이룬다. 재발굴이 집단의 과거를 자산으로 유동화한다면, 범준은 개인의 과거를 방법으로 내면화한다. 전자의 서사는 화면 바깥에서 지급되고(도록과 보도자료가 그것을 운반한다), 후자의 서사는 화면 안에서만 확인된다. '공존' 연작의 절차, 즉 물감을 덧칠하고 다시 닦아내어 묻혀 있던 이미지가 스며 나오게 하는 반복이 그 확인의 현장이다. 비움이 채움이 되고 지움이 드러냄이 되는 이 절차는 순환의 사유를 설명하지 않고 수행한다. 서사가 화면의 알리바이가 되는 대신, 화면이 서사의 유일한 증거가 되는 구조.


b9b3726d52fba.jpeg범준 작가 전시 전경(사진:작가제공, 보안여관, 서울 종로구 통의동)


III. 수행성의 상속과 그 갱신

그의 회화가 단색화 이후 담론과 맺는 관계도 이 관점에서 다시 읽힌다. 반복적 수행, 물성의 축적, 비움의 미학. 범준의 방법은 분명히 이 어휘들과 접속한다. 그러나 상속의 방식이 결정적으로 다르다. 단색화의 반복이 이미지를 소거하는 방향으로 수행되었고 그 소거가 한국적 정신성이라는 사후 담론으로 회수되었다면, 범준의 반복은 이미지를 산출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며 어떤 집단적 정체성 담론으로도 회수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의 화면에는 산과 바다와 우주가 투명한 층으로 겹쳐 있고, 층 사이를 오가는 시선에 따라 화면의 시공간이 재배열된다. 능선으로 읽히던 선이 수평선으로, 다시 성운의 가장자리로 미끄러지는 이 지각의 사건은 백색 담론 같은 본질주의적 승인 구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범준은 단색화로부터 수행의 형식을 상속하되 그 형식에 붙어 있던 국적의 담보를 상속하지 않았다. 이것은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세대의 조건이다. 그 담보는 그의 세대에게 더 이상 발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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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준 작가 서울 개인전  《무한의 상태》 (사진: 작가제공, Space776 seoul)


IV. 소진 국면의 시금석

재발굴 체제의 결산이라는 맥락에 놓으면, 범준이 갖는 의미는 하나의 시금석이다. 앞선 결산이 확인한 것은 발굴 가능한 자산의 한계 수익이 체감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필연적이다. 재고 없이 출발한 작가들이 실제로 국제 회로에서 자립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선언이 아니라 사례로만 축적되며, 범준은 그 사례군의 하나로 지금 시험대에 올라 있다. 그의 페어 이력이 보여주는 것은 재발굴 프리미엄 없는 판매, 곧 화면 자체의 설득력이 거래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교환이다. 이 교환이 지속 가능하다면 그것은 한국 미술이 과거의 재고가 없이도 수출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반례가 된다. 지속되지 않는다면 소진 이후의 공백이 그만큼 깊다는 증거가 된다. 어느 쪽이든 이 작가의 향후 궤적은 개인의 이력을 넘어 체제 이후의 가능성에 대한 데이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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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4452cd777f4.jpeg범준 작가 전시 전경(사진:작가제공, 보안여관, 서울 종로구 통의동)

물론 위험도 이 자리에 있다. 재발굴 서사가 소진되는 국면에서 시장은 대체 서사를 찾고, 가장 손쉬운 후보는 수행과 명상과 동양적 정신성이라는 검증된 번역어다. 범준의 화면은 이 번역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죽음의 체험에서 출발한 순환의 사유가 명상적 추상이라는 표제로 평탄화되는 순간, 그는 재발굴 체제의 바깥에 선 작가가 되는 대신 그 체제의 수사만 상속한 후계자로 오독될 것이다. 이 오독을 막는 것은 작가의 몫이면서 비평의 몫이다. 범준이 갖는 의미는 완성된 답이 아니라 진행 중인 시험이며, 그 시험의 관건은 화면이 서사 없이 버티는 시간을 비평이 함께 버텨 주는가에 있다. 서사가 지급되지 않는 세대에게 비평이 지급할 수 있는 것은 서사의 대체물이 아니라 느린 독해의 시간이다. 이 글은 그 지급의 첫 회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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