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은 면책되지 않는다> 홍승상의 스탠드업 코미디에서 ‘안전한 도발’과 풍자의 한계

리자공
202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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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드업 코미디언 홍승상



<웃음은 면책되지 않는다>

홍승상의 스탠드업 코미디에서 ‘안전한 도발’과 풍자의 한계


공명성 예술감독



현대미술을 주요 소재로 활용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 홍승상의 공개 콘텐츠를 사례로 삼아, 동시대 스탠드업 코미디에서 풍자와 조롱이 구별되는 지점을 고찰한다. 홍승상은 「현대미술만들기 part1. 무엇이 작품인가」, 「현대미술만들기 pt2 원본성」, 「일상의 현대미술탐구하기」 등의 콘텐츠를 공개해 왔으며, 스스로 “미술로 코미디가 될까요?”라는 질문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미술과 코미디의 결합을 자신의 활동 영역으로 전면화한다.

본고는 이러한 실천의 성취보다 그 형식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한계에 주목한다. 스탠드업 코미디가 사회적 금기와 권위를 교란하는 장르적 잠재력을 지니더라도 모든 공격적 농담이 자동으로 풍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김시연(2026)이 지적하는 ‘안전한 도발’의 개념과 이영주(2025)의 유머의 양가성 논의를 중심으로, 본 연구는 홍승상의 코미디가 현대미술의 제도적 권력을 비판하는 순간과 현대미술에 대한 대중의 기존 불신을 재확인하는 순간을 구분한다.

분석 결과, 홍승상 코미디의 핵심적인 위험은 공격성 그 자체보다 비판의 방향이 작품과 작가의 표면적 특이성에 머무를 경우 발생한다. 미술제도의 권력관계보다 ‘이상한 현대미술’을 반복적으로 전시하는 방식은 풍자를 대중에게 이미 익숙한 현대미술 조롱의 문법으로 환원할 가능성을 갖는다. 따라서 홍승상의 코미디가 비판적 실천으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타인을 향한 조롱의 강도보다 미술계의 가치 생산 구조와 코미디언 자신의 위치를 동시에 대상으로 삼는 자기반성적 풍자가 요구된다.

주제어: 홍승상, 스탠드업 코미디, 현대미술, 풍자, 조롱, 안전한 도발, 유머 윤리



1. 서론

스탠드업 코미디는 한 명의 공연자가 자신의 경험과 관찰을 직접 관객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발화자의 위치가 중요한 장르다. 김기덕·정규철(2020)은 스탠드업 코미디의 주요 소재가 시사적 문제를 일상생활과 연결하는 방식으로 형성되며, 이러한 특성 때문에 스탠드업이 오락을 넘어 사회적 발화의 가능성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홍승상은 이러한 스탠드업의 형식을 현대미술이라는 전문적인 문화 영역과 연결한다. 공개된 콘텐츠에는 「현대미술만들기 part1. 무엇이 작품인가」, 「현대미술만들기 pt2 원본성」, 「일상의현대미술탐구하기」 등이 있으며, 자신의 활동을 소개하면서 미술과 코미디의 결합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이러한 접근의 장점은 명확하다. 현대미술의 난해한 언어와 작품 개념을 대중적인 웃음의 영역으로 이동시키며, 미술제도의 권위를 가볍게 만드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관람객이 미술관에서 쉽게 발화하기 어려웠던 “무엇이 작품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코미디의 전제가 될 수 있다. 실제로 홍승상의 공개 콘텐츠 제목에서도 이러한 질문이 전면에 나타난다.

그러나 미술을 웃음의 대상으로 만드는 행위와 미술제도를 비판하는 행위를 동일하게 볼 수 있는지는 별도의 문제다.

본 연구의 질문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첫째, 홍승상의 현대미술 코미디에서 풍자는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둘째, 현대미술의 권위에 대한 공격은 제도비판으로 발전하고 있는가, 혹은 현대미술에 대한 기존의 대중적 불신을 반복하는가.

셋째, 타인을 대상으로 삼는 풍자에서 코미디언 자신의 위치는 충분히 비판의 대상으로 포함되고 있는가.

본고는 홍승상의 인격이나 실제 의도를 추정하지 않는다. 분석 범위 역시 그의 모든 공연에 대한 총체적 평가로 설정하지 않는다. 공개적으로 확인되는 콘텐츠의 제목, 활동 방식, 현대미술을 코미디의 주요 소재로 배치하는 방식과 스탠드업 코미디에 관한 선행연구를 결합해 그 형식이 가진 구조적 한계를 검토하는 사례연구로 한정한다.



2. 스탠드업 코미디와 풍자의 양가성


2.1. 웃음과 사회적 발화


웃음은 중립적인 반응이 아니다.

어떤 대상을 함께 웃는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일정한 판단을 관객과 공유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특히 스탠드업 코미디에서는 공연자가 특정한 사건을 어떻게 재구성하고 누구를 농담의 대상으로 선정하는지가 공연자의 세계관을 형성한다.

김기덕·정규철(2020)은 스탠드업 코미디가 인종, 젠더, 정치적 올바름과 같은 동시대 사회의 갈등을 일상적인 농담의 영역으로 이동시킨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스탠드업의 사회적 의미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웃음이 발생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무엇을 웃음의 대상으로 설정했으며 그 농담이 기존의 사회적 관계에 어떠한 방식으로 개입했는지를 살펴야 한다.

조현일(2018) 역시 유머를 인식적·심미적·윤리적 차원에서 검토한다. 그의 연구가 중요한 이유는 웃음을 재미의 여부에 한정하지 않고 윤리적 판단이 가능한 발화와 행위의 범주에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를 적용하면 “웃겼는가”와 “정당한 풍자였는가”는 서로 다른 평가 항목이 된다.


2.2. ‘선을 넘는 농담’과 안전한 도발


최근 김시연(2026)은 공격적인 유머가 스스로를 ‘선을 넘는 농담’으로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지배적인 규범의 안전지대에 머무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를 ‘안전한 도발’의 문제로 설명한다. 연구에서 공격적인 유머는 금기를 파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경우에 따라 발화자가 위험을 부담하지 않은 채 기존의 위계와 규범을 재확인하는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 개념은 홍승상의 현대미술 코미디를 분석하는 데 유효하다.

현대미술은 제도 내부에서 상당한 문화적 권위를 가진다. 동시에 대중문화 영역에서는 오랫동안 “이해할 수 없는 예술”, “아무것이나 작품이라고 부르는 세계”라는 조롱의 대상이 되어 왔다. 따라서 현대미술을 공격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농담을 전복적인 풍자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도발의 정도보다 중요한 것은 공격의 방향이다.

미술관의 권위, 가격 결정 구조, 작가 선정 과정, 전시 담론의 폐쇄성 등을 문제 삼는 농담은 미술제도의 작동방식을 향할 수 있다. 반대로 낯선 작품의 외관이나 작가의 특이한 행동만을 반복해서 웃음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이미 존재하는 대중적 편견을 확인하는 ‘안전한 도발’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영주(2025)가 Matt Rife의 스탠드업 코미디를 분석하면서 제기한 유머의 양가성 역시 이러한 문제와 연결된다. 스탠드업의 공격성은 기존 규범을 해방적으로 교란할 수도 있지만 사회적 위계를 다시 생산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

따라서 코미디의 비판성은 농담이 얼마나 독한가보다 그 독함이 어떤 방향으로 배치되는지를 통해 평가해야 한다.



3. 홍승상의 현대미술 코미디와 풍자의 한계


3.1. ‘이상한 현대미술’이라는 안정적인 전제


홍승상의 콘텐츠에서 눈에 띄는 것은 현대미술 자체가 하나의 반복 가능한 코미디 전제가 된다는 점이다.

「현대미술만들기 part1. 무엇이 작품인가」와 「현대미술만들기 pt2 원본성」이라는 제목은 현대미술에서 오래 논쟁되어 온 작품성, 원본성 등의 문제를 대중적인 질문으로 전환한다. 「일상의현대미술탐구하기」 역시 일상 사물을 현대미술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형식을 드러낸다.

여기까지는 코미디언의 명확한 소재 선택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전제가 반복될수록 현대미술은 복잡한 제도와 역사적 맥락을 가진 문화적 장이라기보다 이미 웃긴 것으로 합의된 대상이 될 위험을 갖는다.


관객 역시 다음 농담의 논리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


현대미술에서 낯선 장면이 발견된다.

그 장면을 일상적 상식과 비교한다.

현대미술의 이상함이 강조된다.

관객은 그 격차에서 웃는다.


이 구조가 효과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과 비평적 깊이는 별개의 문제다.


반복되는 순간 코미디의 질문은 “현대미술은 왜 이렇게 작동하는가”에서 “현대미술은 역시 이상하지 않은가”로 이동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풍자는 분석보다 확인에 가까워진다.


3.2. 작품 조롱과 제도비판의 거리


현대미술의 표면적 기이함을 드러내는 일과 미술제도의 권력을 분석하는 일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존재한다.

“이것도 작품인가”라는 질문은 현대미술을 대중에게 개방하는 매우 효과적인 출발점이다. 그러나 그 질문이 계속 출발점에 머물면 현대미술의 제도적 조건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왜 이것이 작품으로 인정되었는가.

누가 그것을 선택했는가.

어떤 기관이 그것에 권위를 부여했는가.

시장에서는 어떠한 경로를 통해 가격이 형성되는가.

비평과 큐레이팅의 언어는 어떠한 과정을 통해 정당성을 획득하는가.

풍자가 이 질문으로 이동한다면 현대미술의 권력구조 자체를 공격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고 작품의 외형적 낯섦이나 작가의 행동만 반복적으로 전시한다면 웃음의 대상은 제도보다 개인에게 가까워진다.

여기서 홍승상 코미디에 대한 비판의 핵심이 발생한다.

문제는 현대미술을 조롱해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금지에 있지 않다.

조롱을 ‘미술계 비판’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요구되는 분석의 수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제도비판을 표방한다면 제도의 구조를 보여주어야 한다.

작가를 비웃는 것만으로 미술계를 비판했다고 말하기에는 두 대상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


3.3. 풍자의 권력과 자기면책


스탠드업 코미디언은 무대 위에서 발언권을 가진다.

그는 이야기를 선택하고 맥락을 편집하며 펀치라인이 도달할 대상을 결정한다. 관객의 웃음은 그 선택에 순간적인 집단적 승인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코미디언에게도 권력이 발생한다.

이 지점에서 풍자는 다시 자기 자신에게 돌아갈 필요가 있다.

정미경(2017)은 마가렛 조의 스탠드업을 분석하면서 공연자의 몸과 정체성이 스스로 공연의 대상으로 제시되는 방식을 고찰한다. 마가렛 조의 사례가 보여주는 중요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는 풍자의 주체가 타인을 관찰하는 안전한 위치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홍승상의 경우에도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현대미술을 조롱하는 코미디언 자신은 그 풍자의 구조에서 어디에 위치하는가.

홍승상은 공개적으로 자신을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소개하는 한편, 현대미술을 주요 콘텐츠 소재로 지속적으로 활용한다. 미술과 코미디의 결합은 이미 그의 활동을 식별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따라서 현대미술 비판은 동시에 그의 콘텐츠를 가능하게 만드는 자원이기도 하다.


여기에 흥미로운 모순이 존재한다.

미술계를 공격할수록 미술계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현대미술의 언어를 패러디하려면 그 언어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작품의 논리를 조롱하려면 그 작품이 어떤 맥락에서 작동하는지 일정 부분 알아야 한다.

결과적으로 ‘미술계를 조롱하는 능력’ 자체가 코미디언의 차별화된 자산이 된다.

그 순간 비판은 외부의 공격으로만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비판하는 대상이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과 콘텐츠를 생산하는 자원이 되기 때문이다.



4. 논의: 비판이 브랜드가 되는 순간


홍승상 사례에서 가장 흥미롭게 검토할 문제는 비판의 상품화다.

특정한 비판적 태도가 반복적으로 인기를 얻으면 그 태도 자체가 하나의 안정적인 포맷으로 전환될 수 있다.

처음에는 현대미술의 권위를 공격한다.


이후 ‘현대미술을 공격하는 사람’이라는 캐릭터가 형성된다.

관객은 그 캐릭터에게 동일한 종류의 공격을 기대한다.

코미디언은 기대에 대응하며 다시 비슷한 소재를 생산한다.

이 순환이 반복되면 비판은 대상에게 위험한 행위인 동시에 공연자에게 안전한 브랜드가 될 수 있다.

김시연(2026)의 ‘안전한 도발’ 개념을 이 지점에 확장해 볼 수 있다. 도발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이 속한 관객 공동체의 기존 믿음을 확인해주는 경우, 발화자는 위험을 감수하는 비판자보다 집단의 상식을 대표하는 인물에 가까워질 수 있다.

현대미술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웃음의 자원으로 사용하는 경우에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다.


“현대미술은 이해하기 어렵다.”

“작품의 가치를 알 수 없다.”

“미술계의 언어는 과장되어 있다.”


이러한 감각은 이미 상당한 대중적 친숙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현대미술을 조롱하는 행위가 항상 기성 권력에 맞서는 위험한 발화라고 간주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홍승상의 코미디가 한 단계 더 강한 비평으로 이동하려면 자신에게 호의적인 관객의 상식 자체를 불편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현대미술을 비웃던 관객에게 왜 우리가 특정한 종류의 예술만 정상적이라고 판단하는지를 되묻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홍승상 자신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왜 나는 현대미술을 반복해서 웃음의 대상으로 선택하는가.

그 선택을 통해 나는 어떤 문화적 위치를 획득하는가.

미술계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미술계를 자신의 콘텐츠 자원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기 자신까지 이 질문에 포함시키는 순간 풍자는 보다 복잡해진다.

그리고 바로 그 복잡성이 코미디를 단순한 조롱에서 비평으로 이동시킨다.



5. 결론

본 연구는 홍승상의 현대미술 관련 스탠드업 및 공개 콘텐츠를 사례로 풍자와 조롱 사이의 경계를 검토하였다.

홍승상의 시도에는 분명한 문화적 의미가 존재한다. 현대미술의 전문적 언어와 작품 개념을 대중적인 코미디의 영역으로 이동시키면서 미술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고, 미술제도의 권위를 웃음의 대상으로 전환한다. 그의 공개 콘텐츠가 작품성, 원본성, 일상과 현대미술의 경계 등을 반복적으로 다룬다는 사실은 이러한 활동 방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성취가 비판의 정당성을 자동으로 보증하지는 않는다.

본고에서 제기한 핵심적인 한계는 세 가지다.


첫째, ‘이상한 현대미술’이라는 전제가 반복될 경우 미술제도에 대한 질문이 현대미술에 관한 기존의 대중적 편견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축소될 수 있다.


둘째, 작품이나 작가의 표면적 특성을 조롱하는 것과 미술관·시장·비평·큐레이팅을 포함한 가치 생산 구조를 비판하는 일 사이에는 명확한 차이가 존재한다.


셋째, 풍자의 주체인 코미디언 자신이 비판의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제외된다면 풍자는 자기면책적인 구조를 형성할 가능성이 있다.

이영주(2025)가 설명하는 유머의 양가성과 김시연(2026)이 제시한 ‘안전한 도발’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검토하게 한다. 웃음은 기존 

권력을 교란하는 힘을 가질 수 있지만 기존의 상식과 위계를 더욱 안정시키는 방식으로도 작동한다.

그러므로 홍승상의 코미디를 비판해야 할 지점은 그가 현대미술을 웃음거리로 만든다는 사실 자체에 있지 않다.

무엇을 향해 웃음을 던지고 있는지, 그 웃음이 누구에게 가장 안전한지, 그리고 풍자하는 자신은 왜 그 풍자로부터 제외되는지를 계속 물어야 한다.


홍승상의 다음 단계에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조롱이 아닐 수 있다.

더 위험한 자기비판이다.

미술계의 허위를 폭로하려 한다면 그 미술계를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캐릭터와 영향력을 구축하고 있는 위치 역시 분석 대상이 되어야 한다.

타인에게 향했던 웃음이 자신에게까지 돌아올 수 있을 때 풍자는 비로소 자기면책에서 벗어난다.

웃음은 자유롭다.

그러나 웃음은 그 결과와 권력관계로부터 면책되지 않는다.




참고문헌

김기덕·정규철(2020), 「미국 스탠드업 코미디에 등장하는 주요 소재와 시각 분석: 인종·성별·성소수자 소재와 정치적 올바름을 중심으로」, 『통일인문학』 84, 453–494쪽.

김시연(2026), 「‘선을 넘는 농담’이라는 착시: 남성 호모소셜과 소수자 커뮤니티 유머의 ‘고맥락성’ 비교」, 『대중서사연구』 32(2), 159–205쪽.

이영주(2025), 「웃음을 너머서: Matt Rife 코미디에 나타난 유머의 양가성」, 『비평과이론』 30(3), 157–185쪽.

정미경(2017), 「‘비천한 몸’에서 ‘임의적 존재’로: 한국계 미국 스탠드업 코미디언, 마가렛 조의 공연 연구」, 『현대영미드라마』 30(2), 263–282쪽.

조현일(2018), 「웃음·유머 교육에 대한 문학교육적 고찰」, 『국어교육연구』 66, 335–3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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