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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THER Art Criticism ignites fresh thought.

미술안나 친의 ‘비인간적 생명력’의 사회학적 인식

202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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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인간 행위자의 재발견 — 인간 중심적 예술의 전환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오랫동안 문명, 발전, 예술의 기준이었다. 그러나 안나 친(Anna Lowenhaupt Tsing)은 이러한 인식의 전제를 부드럽게, 그러나 근본적으로 흔들어놓았다. 그녀는 인간이 아닌 존재들—버섯, 흙, 물, 곰팡이, 금속, 곤충, 바람—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실제적 주체이며, 그들의 움직임이야말로 사회와 역사를 밀어가는 보이지 않는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이 통찰은 단순한 생태주의나 환경 담론이 아니라, 지식의 인류학적 전환이자 예술의 존재론적 재구성이다. 즉, 예술의 주체를 인간 개인의 의지와 감정에서 ‘얽힌 존재들(entangled beings)’로 확장하는 사유의 혁명이다.

Tsing이 말하는 ‘비인간 행위자’는 단순한 객체나 환경적 배경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활동과 얽히며 사건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주체로서 기능한다. 예를 들어, 그녀가 《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2015)에서 탐구한 ‘마쓰타케 버섯’은 인간의 산업화와 생태 파괴가 만들어낸 폐허의 숲 속에서도 생존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파괴한 공간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비인간의 생명체. 그 버섯을 따고 거래하는 사람들, 그것을 둘러싼 경제 시스템, 문화적 상징의 네트워크가 얽혀 하나의 복합 생태계를 구성한다. 인간은 그 생태계의 중심이 아니라, 그 일부로 끼어들어 있는 존재일 뿐이다.
Tsing의 이 분석은 곧 ‘비인간적 생명력’의 사회학적 인식이다. 인간의 행위가 세계를 만든다는 근대적 확신을 넘어, 비인간의 존재가 인간의 삶을 끊임없이 재구성하고 있다는 자각이다.

이 개념은 한국 동시대 예술에도 매우 중요한 함의를 던진다. 예컨대 최빛나와 같은 작가는 도시의 구조물, 폐허, 식물, 빛의 움직임 등 인간의 통제 밖에 있는 재료를 통해 공생적 조형언어를 구축해왔다. 그녀의 작업은 인간의 서사를 제거한 채, 재료 스스로가 발화하도록 유도한다. 김순기 역시 일상의 사물과 행위를 ‘시간적 흔적’으로 기록하며,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한 채 물질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보여준다. 이처럼 한국의 여러 작가들은 이미 Tsing이 말하는 ‘비인간 행위성’을 예술적 언어로 번역하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다만 그것이 서구적 생태 담론이 아니라, 한국 근현대의 도시화·재개발·기억의 층위와 얽혀 있다는 점이 다르다.

안나 친이 제시한 비인간 행위자의 개념은, 우리가 ‘창작’이라 부르는 행위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다시 묻는다. 예술이란 인간의 창조적 표현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행위자들—물질, 기후, 세균, 도시, 사회적 기억—과의 **공동 창작(co-creation)**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인간 예술가는 신의 위치가 아니라, 복합 생태계의 한 노드(node)에 불과하다. 그는 자신이 아니라, ‘세계가 스스로 표현되도록 허락하는 매개자’가 된다.

이 매개적 태도는 안나 친이 자주 사용하는 용어인 **“감응적 존재(attunement)”**와 연결된다. 인간은 세계를 지배하거나 해석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것의 움직임에 감응하고 반응하는 존재다. 그녀는 “지식이란 관찰이 아니라 살아보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예술가에게도 같은 의미로 적용된다. 예술가는 사물을 관조하는 철학자가 아니라, 그 속에서 함께 살아보는 존재이며, 그 체험의 흔적이 작품으로 드러난다.

한국의 지역 기반 예술 기획에서도 이 관점은 점점 더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 부산의 범일가옥, 영도의 커뮤니티 전시, 문래동의 폐공장 프로젝트 등은 모두 인간의 기획 의도보다는 장소 자체가 가진 물질성과 기억이 주도하는 형식을 취한다. 예를 들어, 범일가옥에서 진행된 ‘태풍 이후에도 우리는 여기 있었다’ 전시는, 태풍으로 훼손된 사물과 공간을 복원하기보다는 그 파괴된 상태 자체를 발화의 주체로 인정했다. 여기서 인간은 정비자가 아니라, 목격자이자 기록자이며, 비인간 행위자들이 남긴 흔적의 통역자였다. 이러한 방식은 Tsing이 제안하는 비인간 중심의 인류세적 사고가 지역 전시 실천 속에서 구현되는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Tsing의 사유가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인간을 비판하거나 생태적 균형을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는 **‘얽힘’(entanglement)**을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인공, 과학과 예술이 서로 섞여 만들어내는 복잡한 네트워크 속에서만 새로운 세계의 감각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는 전통적인 학문 구분을 해체하는 동시에, 예술의 경계 또한 허문다. 예술이 더 이상 ‘형상’이나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세계의 얽힘을 드러내는 하나의 관찰 장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디지털 기술과 결합한 예술에서도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아이테르가 진행한 디지털 도슨트와 NFC 태그 시스템은 단순히 기술적 편의가 아니라, 비인간적 데이터와 인간의 감각이 만나는 지점을 실험하는 일이다. 태그된 사물은 단순한 전시 오브제가 아니라, 데이터를 통해 ‘스스로 말하는 존재’가 된다. 이처럼 인간의 시각이 아닌 비인간의 정보 흐름으로부터 전시가 구성되는 방식은, Tsing이 말한 ‘공동 행위자의 예술적 발화’를 기술적 맥락에서 구현한 사례로 볼 수 있다.

결국 안나 친의 비인간 행위자 개념은 인간 예술가에게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우리가 만들고 있는 예술은, 세계의 다른 존재들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는가? 예술은 더 이상 미적 실험의 장이 아니라, ‘공생의 윤리’를 실천하는 행위가 된다. 이는 단순히 환경을 보호하자는 도덕적 요청이 아니다. 오히려 예술의 근본적 의미—‘세상을 느끼고 말하게 하는 능력’—을 확장하는 문제다. 인간만의 시각에서 벗어나, 다른 존재의 언어를 듣고 번역하는 기술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예술가가 감당해야 할 과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의 동시대 예술은 안나 친의 이론을 단순히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역사적 조건 속에서 재구성해야 한다. 한국의 도시들은 극단적으로 빠른 산업화와 개발을 경험했고, 그 과정에서 인간 중심의 효율성과 성장 논리가 모든 것을 지배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예술은 그 속에서 버려진 사물, 침수된 지하, 허물어진 건물, 멸종 위기의 동식물을 통해 ‘비인간의 기억’을 복원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환경미술이 아니라, 근대의 망각을 회복하려는 시도이다. 안나 친의 비인간 행위자 개념은 이런 작업들에 이론적 정당성과 감각적 방향성을 동시에 제공한다.

안나 친이 제안하는 세계는 결국 ‘살아 있는 세계’다. 인간의 통제 아래 있는 세계가 아니라, 인간이 그 속에서 다른 존재들과 협상하며 살아가는 세계다. 그녀의 인류학은 인간을 축소시키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을 다시 자연의 일부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예술과 지식의 가능성을 확장한다.
그리고 그 확장은 점점 예술의 영역으로 스며들고 있다. 작가는 더 이상 고립된 천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들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기록하는 안테나이며, 기획자는 프로그램을 설계하는 관리자라기보다, 관계와 환경을 조율하는 조감자다. 그들의 작업 속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는 흐려지고, 예술은 ‘세계의 다성성(polyphony)’을 듣는 훈련장이 된다.

안나 친의 사유는 우리에게 한 가지 확신을 남긴다. 예술은 세계를 바꾸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가 스스로 변화하는 과정을 듣는 기술이다. 비인간 행위자와의 공생은 그 기술의 출발점이며, 한국 예술의 로컬한 실천 또한 이 감응적 세계 속에서 새롭게 정의될 수 있다. 인간 중심적 예술의 시대가 끝났다면, 이제 우리는 ‘함께 존재하는 예술’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 배움의 지도 위에서, 버섯과 강물, 금속과 바람, 빛과 데이터가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1. Patchy Anthropocene — 균질한 세계가 아닌 불균형의 지형

안나 친이 제시한 두 번째 핵심 사유인 ‘Patchy Anthropocene’은 인류세를 균질한 지구적 경험으로 보지 않는다. 그녀는 인류세가 인간의 활동으로 지구 전체가 변형된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라면, 그 변화는 결코 평평하거나 보편적인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세계 곳곳에는 개발, 파괴, 방치, 복원, 생존이 서로 다른 속도로 얽히며 펼쳐진다. 어떤 지역은 과잉으로 연결되고, 어떤 지역은 철저히 버려진다. 그녀가 말하는 ‘patchy’는 바로 이 불균등한 얽힘의 지형, 즉 지구의 상처와 흔적이 고르게 퍼지지 않는 현실을 가리킨다.

이 불균질한 인류세의 개념은, 인간이 만든 체계가 결코 전지구적으로 동일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지구 곳곳에는 자본의 흐름이 닿지 못한 채 방치된 지역, 오염으로 인해 인간이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는 지역, 혹은 개발의 압력 속에서 생태가 단절된 지역이 존재한다. 안나 친은 이런 곳을 ‘폐허의 지대’로 부르면서, 그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생명과 관계를 관찰한다. 인간이 떠난 자리에 자라나는 잡초와 균류, 곤충들은 바로 그 ‘패치’의 증거이다. 파괴된 세계의 경계에서 새로운 생태적 질서가 발생한다. 그녀는 이 과정을 단순히 생태적 회복으로 읽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 문명의 비균질성,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예상치 못한 생명의 윤리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Patchy Anthropocene은 따라서 근대의 세계관, 즉 인간이 지구를 균질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비판이다. 산업화와 기술의 언어는 언제나 ‘확장’, ‘발전’, ‘연결’을 말했지만, 그 결과는 결코 균등하지 않았다. 어떤 지역은 초고속의 도시가 되었고, 어떤 지역은 완전히 잊힌 공간으로 남았다. 안나 친은 바로 그 잊힌 공간 속에서 인류세의 진짜 얼굴을 본다. 버려진 숲, 폐허가 된 공장, 오염된 강, 그리고 그 안에서 여전히 살아남은 비인간 존재들. 인류세는 거대한 균질의 세계가 아니라, 그런 패치들이 모여 이뤄진 복잡한 지도다.

이 관점은 한국 사회의 도시 구조를 바라볼 때 특히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국의 산업화는 세계적으로도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특정 지역은 압도적인 개발의 중심이 되었으며, 다른 지역은 급격히 쇠퇴했다. 서울과 지방, 중심과 변두리, 재개발 지역과 폐허의 구분은 한국식 인류세의 공간적 패턴이라 할 수 있다. 부산의 영도, 범일동, 인천의 송현동, 서울의 문래동, 대구의 방천시장 같은 지역은 모두 ‘패치’의 형태를 지닌다. 이곳들은 과거의 산업시설, 무너진 주거지, 그리고 그 사이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과 사물들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장소다.

이러한 ‘패치’들은 단순히 낙후된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새로운 감각의 예술이 태어나는 실험장이다. 안나 친이 말한 불균질한 인류세는 예술가에게 세계를 관찰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예술은 더 이상 중심의 논리나 보편적 미학에 기대지 않는다. 대신, 버려진 지역과 그곳의 파편적 기억에서 세계의 구조를 다시 읽는다. 한국의 많은 작가들이 이미 이러한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도시의 개발 과정에서 사라지는 벽화, 건축 잔해, 낡은 간판, 버려진 재료를 예술의 언어로 끌어들이는 작업들이 그것이다. 그들은 폐허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인간이 남긴 흔적과 비인간 존재들의 공존을 기록한다.

Patchy Anthropocene은 예술의 윤리적 태도 또한 바꿔놓는다. 균질한 세계에서는 예술이 중심의 언어를 대표하거나 사회적 대의를 상징하는 역할을 했다면, 패치의 세계에서는 예술이 오히려 주변부의 잔여, 파편, 비가시적 존재의 증언이 된다. 예술가는 자신이 속한 세계가 얼마나 불균형하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감지하고, 그 불균형을 드러내는 역할을 맡는다. 이러한 태도는 지역 기반 기획자나 독립 예술가에게 특히 중요한 실천적 지침이 된다. 중심에서 정의된 미학이나 제도적 틀을 따르지 않고, 각자의 로컬에서 발생하는 생태적 불균형과 그로 인한 감각적 차이를 예술로 번역하는 것이다.

이 개념은 또한 한국의 정책적 담론과도 연결된다. 최근 공공기관들이 제시하는 ‘균형발전’, ‘지속가능한 도시’ 같은 용어는 표면적으로는 조화와 안정의 이미지를 내세우지만, 안나 친의 시각에서 보면 이들은 여전히 균질화의 논리에 갇혀 있다. 진정한 지속가능성은 세계를 평평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불균형과 단절을 인식하고, 그 틈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관계를 포용하는 데 있다. 예술이 할 일은 바로 그 틈을 드러내는 것이다.

한국의 독립기획자들이 이러한 틈의 감각을 탐색하는 방식은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지워진 지도’나 ‘흔적 없는 손의 역사’와 같은 프로젝트들은 과거의 산업화 과정에서 사라진 사람들, 공간, 기억을 복원하는 동시에, 그 복원이 완전할 수 없음을 드러낸다. 그것은 완전한 회복이 아니라, 파편화된 현실 속에서 살아남은 흔적들을 하나씩 더듬어보는 일이다. 이때 기획자는 단순히 전시를 조직하는 행정가가 아니라, 지역의 불균등한 리듬에 귀 기울이는 연구자이자 감응자다.

Patchy Anthropocene은 또한 기술과 예술의 관계를 재구성한다. 디지털 기술은 세계를 연결시키는 힘이지만, 동시에 또 다른 불균형을 만들어낸다. 데이터가 집중된 중심지와 기술의 사각지대는 새로운 형태의 패치를 형성한다. 이런 맥락에서 예술이 기술을 다루는 태도는 단순한 혁신이 아니라, 비가시적 공간을 드러내는 비평적 행위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경우, 도시의 스마트화나 메타버스 기반의 전시가 활발하지만, 그 속에서 배제되는 지역과 사람들의 경험을 함께 다루지 않는다면, 결국 기술 또한 또 하나의 불균형한 패치를 만드는 셈이다.

안나 친의 논의는 예술이 ‘세계의 중심’을 재현하는 역할을 벗어나, 그 주변부의 불균질한 생태를 읽는 일로 이동해야 함을 시사한다. 균질한 지도 위에서 예술은 기능을 잃는다. 오히려 균열과 단절이 있는 곳에서 새로운 감각이 태어난다. 그곳이 바로 예술의 현장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예술은 더 이상 완벽하게 설계된 전시 공간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생태적 현장에 가깝다. 인간이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순간, 세계는 균질해지고, 예술은 침묵한다. 그러나 버려진 공간, 침수된 거리, 폐허의 벽, 혹은 다시 자라나는 식물들 속에서 예술은 다시 말하기 시작한다.

Patchy Anthropocene은 궁극적으로 ‘공존의 불가능성’을 전제로 한 공존의 시도이다. 인간이 만든 세계는 불균형하고, 그 속에서 우리는 완전한 조화를 이룰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이 관계의 가능성을 낳는다. 예술은 그 틈에서 생겨나는 미세한 연결들을 기록하고, 세계가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함께 살아가려는 감각을 전달한다. 이것이 안나 친이 제시하는 새로운 인류세의 미학이며, 한국의 예술이 앞으로 탐색해야 할 생태적 상상력의 방향이기도 하다.

그녀가 제시하는 패치의 지형은, 결국 우리 자신이 서 있는 곳의 풍경이다. 도시의 틈새, 해안의 폐허, 산속의 묵은 공터, 그 어느 곳도 완벽하게 복원되거나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다. 그 중간지대에서 새로운 예술의 언어가 태어난다. 균질한 세계는 없다. 오직 불균형하게 이어진 삶의 조각들만이 있다. 그리고 그 조각들을 연결하고 번역하는 일이 예술의 몫이다.


  1. 공생적 생존의 미학 — 파괴 이후에도 생은 지속된다

안나 친의 사유에서 세 번째로 중요한 개념은 공생적 생존, 즉 파괴 이후에도 생이 어떻게 다른 형태로 이어지는가에 관한 통찰이다. 그녀의 대표작인 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에서 이 사유는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 책은 경제학, 생태학, 인류학, 철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하나의 버섯, 마쓰타케가 만들어내는 세계를 탐구한다. 마쓰타케는 인간이 훼손한 숲, 자본이 포기한 폐허의 땅에서 자란다. 인간의 산업 활동이 불러온 파괴의 결과로 나타난 생태적 간극 속에서, 그 버섯은 새로운 관계망을 구축한다. 이는 단순히 식물학적 관찰이 아니라, 붕괴 이후에도 관계를 회복하려는 존재들의 미학적 실험이다.

Tsing은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이 만들어낸 파괴의 잔해 속에서도 생명이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목격한다. 인간이 떠난 공간에서도 세계는 스스로 생을 조직한다. 버섯과 나무, 곤충과 흙, 미생물과 물의 상호작용은 인간의 개입 없이도 작동하며, 그 안에서 새로운 질서가 형성된다. 그녀는 이를 ‘공생적 생존의 조건’이라 부른다. 이 조건은 조화나 완전함이 아니라, 불완전한 관계와 우연, 상호의존의 긴장 속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이 무너뜨린 세계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다른 존재들의 방식으로 재조직된다는 사실은 인류세 시대의 희망이자 경고이다.

이 공생의 감각은 예술이 새로운 형태로 살아남는 방식과도 깊이 맞닿아 있다. 예술 역시 종말 이후에도 다른 방식으로 생존한다. 제도나 자본의 지원이 끊긴 자리, 주류 담론에서 밀려난 주변부의 예술은 스스로 관계를 새롭게 맺으며 존재를 유지한다. 한국의 동시대 예술 현장에서 이러한 공생적 생존의 감각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재난 이후의 공동체 복원 프로젝트, 폐허 공간을 활용한 예술 레지던시, 산업 잔해를 활용한 조형 실험 등은 모두 파괴의 흔적 속에서 생명을 이어가려는 시도다.

부산의 범일가옥 프로젝트를 떠올려보면 이 감각이 선명히 드러난다. 재개발의 경계에 놓인 낡은 가옥에서 출발한 전시는, 파괴된 공간을 복원하려 하기보다 그 상태 자체를 기록하고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그곳의 균열과 흔적은 감추어야 할 결함이 아니라, 예술이 시작되는 지점이 된다. 벽의 균열, 바닥의 얼룩, 남겨진 사물들,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까지 모두 하나의 생태적 관계망으로 인식된다. 예술가들은 그 흔적 위에 새로이 생명을 더하거나, 아무것도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둔다. 이 ‘그대로 둠’의 행위가 바로 공생의 미학이다. 인간의 손을 최소화함으로써 비인간적 세계가 스스로 말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공생적 생존의 미학은 인간의 의도와 통제를 벗어난 세계의 질서를 인정하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이는 단순히 생태적 공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공생이란 서로에게 필요한 만큼만 기대며, 완전한 융합이 아니라 느슨한 연대를 지속하는 상태를 말한다. 인간과 비인간, 기술과 자연, 예술과 삶이 각각의 차이를 유지한 채 공존하는 세계, 바로 그것이 Tsing이 그리는 미래의 생태적 풍경이다. 이 세계에서는 생존이 경쟁이나 지배가 아니라, 관계의 조율과 협상의 결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사유는 예술가에게 새로운 실천의 방향을 제시한다. 창작은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행위가 아니라, 관계의 균형을 감각하는 일이다. 예술가는 세상을 조형하는 주체가 아니라, 세계가 스스로 다시 조형되는 과정을 감지하는 존재가 된다. 파괴 이후의 공간에서 예술은 폐허를 꾸미는 장식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생명의 리듬을 드러내는 증언이 된다. 안나 친이 말하는 생존은 낙관적 부활이 아니라, 균열과 손상, 불완전함 속에서도 계속되는 움직임이다.

한국의 예술 현장에서 이러한 감각은 점점 더 현실적인 의미를 가진다. 기후위기, 산업 붕괴, 재난의 일상화, 지역 공동체의 해체 속에서 예술은 그 자체로 생존의 전략이 된다. 예를 들어, 폐교를 활용한 예술공간, 버려진 공장을 개조한 스튜디오, 혹은 지역 주민들과 함께 재난 이후의 풍경을 기록하는 작업들은 모두 예술이 공생의 생태로 진입하는 사례들이다. 그들은 복원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완전한 상태 자체를 하나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며,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 협력한다. 물이 스며드는 벽, 곰팡이와 먼지, 쇠붙이의 산화 같은 비인간의 흔적이 작품의 일부가 된다.

공생의 미학은 예술의 윤리 또한 변화시킨다. 예술은 더 이상 구원이나 대안을 제시하는 위치에 있지 않다. 대신 예술은 세계의 지속을 관찰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의 미세한 관계를 기록한다. 이때 예술가는 신의 시점에서 세계를 설계하는 자가 아니라, 이미 생명이 움직이고 있는 현장에 참여하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태도는 한국의 로컬 기반 예술이 지향하는 방향과도 겹친다. 영도, 통영, 강릉, 제주 같은 지역에서 진행되는 현장 기반 전시들은 예술이 도시의 외곽, 파괴된 경계, 사라져가는 기억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안나 친은 인간의 생존이 결코 인간만의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의 생존은 비인간 존재들의 생존과 얽혀 있으며, 그들의 활동이 없이는 인간 또한 존재할 수 없다. 이 인식은 예술가와 기획자에게 깊은 책임을 부여한다. 작품을 만드는 일은 단순히 미적 창조가 아니라, 세계의 관계망 속에서 자신이 차지한 위치를 자각하는 일이다. 예술가가 재료를 다루고, 공간을 점유하며, 기술을 사용하는 모든 순간은 다른 존재들의 생태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공생의 미학은 예술을 윤리적 행위로 전환시킨다.

공생적 생존은 또한 ‘끝 이후의 시간’을 사유하게 한다. 인류세의 위기는 단순히 미래의 재난이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인 현재의 상태다. 그 속에서 예술은 절망과 무기력 대신, 살아남은 잔존의 에너지와 관계의 회복을 탐색한다. 안나 친에게 생존은 전면적인 회복이나 희망의 서사가 아니라, 붕괴 속에서 여전히 관계를 유지하려는 작은 시도들의 모음이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을 낮추고, 세계의 미세한 움직임에 귀 기울이는 삶의 방식이다.

이러한 사유는 한국의 예술가들에게도 실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예술은 파괴된 세계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복원할 것인가, 혹은 그대로 살아볼 것인가. 공생의 미학은 후자를 택한다. 인간이 만든 파괴를 되돌릴 수 없다면, 그 속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를 배우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다. 버려진 공간을 다시 채우는 일이 아니라, 그 빈 공간 속에 이미 존재하는 다른 생명들과 협력하는 일. 예술은 바로 그 협력의 기술이다.

안나 친의 공생적 생존론은 결국 ‘살아 있는 예술’의 정의를 새롭게 쓴다. 살아 있다는 것은 단지 생물학적 지속이 아니라, 관계의 유지와 감응의 확장이다. 예술은 그 관계의 기록이자, 감응의 훈련이다. 인간이 만든 질서가 무너진 자리에서 예술은 다시금 세상을 구성하는 힘을 갖는다. 그것은 대단한 혁명이나 구원이 아니라, 작은 연결, 느슨한 동맹, 미세한 생존의 흔적들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미세한 관계들의 총합이 바로 새로운 세계의 형태다.


  1. 감응적 지식의 윤리 — 듣고, 느끼고, 반응하는 세계의 방식

안나 친의 네 번째 인사이트는 ‘감응적 지식(response-ability)’이라는 개념으로 요약된다. 이는 단순한 지적 능력이나 분석적 사고가 아니라, 세계의 움직임에 반응하고 그 리듬을 느끼며,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감각의 문제다. 그녀는 인간이 세상을 아는 방식이 너무 오랫동안 지배적이고 추상적이었다고 지적한다. 근대적 학문은 대상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통제하려 했지만, 그런 지식은 결국 세계를 살아 있는 존재로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대신, 안나 친은 “지식이란 살아보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는 곧, 세계를 알고자 한다면 그 속으로 들어가 함께 존재해야 한다는 뜻이다.

감응적 지식은 관찰자의 거리두기 대신 참여자의 감각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그녀의 Feral Atlas 프로젝트는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연구하면서, 그것을 단순히 기록하거나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참여자들은 현장에서 수집한 물질, 소리, 이미지, 지도를 통해 세계의 다층적 목소리를 듣고 느낀다. 그 과정에서 인간 연구자는 관찰자가 아니라 동반자가 된다. 이러한 방식은 학문과 예술을 가르는 경계를 무너뜨린다. 지식을 생산하는 일과 예술을 창작하는 일이 모두 감응의 행위로 통합된다.

이 감응의 개념은 예술의 현장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예술가는 세계를 해석하는 자가 아니라, 세계의 반응을 매개하는 자다. 그는 사물과 장소, 빛과 소리,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서 흐르는 감각을 포착한다. 이때 작품은 개인의 표현이 아니라 관계의 기록이다. 이러한 태도는 한국의 로컬 기반 예술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부산, 영도, 강릉, 제주 등지에서 이루어지는 현장 중심의 기획들은 단순히 지역을 배경으로 삼지 않는다. 그들은 그 지역의 공기, 물소리, 냄새, 그리고 사람들의 생활 리듬 속으로 들어가며, 그 경험 자체를 전시의 언어로 바꾼다. 그것은 감응의 예술이다.

감응적 지식은 또한 윤리적 차원을 포함한다. 안나 친은 ‘responsibility(책임)’ 대신 ‘response-ability(반응할 능력)’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세계의 고통에 도덕적으로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운다는 뜻이다. 예술가와 기획자는 자신이 속한 생태와 사회의 변화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 변화에 반응하지 않는 예술은 결국 닫힌 체계 속에 머문다. 반대로, 감응하는 예술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며, 그 관계가 예술의 지속성을 만든다.

한국의 예술 현장에서도 이러한 감응적 태도는 점차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기후위기 이후의 예술 프로젝트들은 단순히 재난을 주제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환경에 실제로 참여하고 반응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작가들은 현장을 조사하며, 그곳에서 발견한 소리나 물질, 식물의 흔적을 작품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이는 인간의 시선이 아니라, 세계의 리듬에 자신을 맞추려는 시도다. 이런 감응의 과정 속에서 작품은 더 이상 고정된 오브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태적 과정이 된다.

감응적 지식은 기획자에게도 새로운 역할을 제시한다. 전시를 설계하는 일은 단순히 작품을 배치하는 일이 아니라, 관계를 조율하고 감각을 연결하는 일이다. 기획자는 세계의 흐름을 읽어내는 청자이며, 예술과 사회,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조율자다. 예를 들어, 한 지역의 예술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 그는 공간의 역사적 층위와 현재의 생태적 조건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어떤 재료가 이곳에서 적절한가, 어떤 관계가 지속 가능한가, 어떤 방식으로 공동체가 참여할 수 있는가를 묻는 일은 모두 감응의 기술에 속한다.

안나 친이 강조하는 감응의 윤리는 냉정한 분석보다 느림과 주의 깊음을 요구한다. 그녀는 지식의 속도를 늦춰야 한다고 말한다. 빠른 분석은 세계의 복잡함을 단순화하고, 효율의 논리는 감정과 관계를 잘라낸다. 반면, 느린 관찰은 세계의 미세한 신호를 포착할 수 있게 한다. 예술가가 현장에서 시간을 오래 보내며 빛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 기획자가 한 장소의 이야기를 수개월 동안 경청하는 일은 바로 그런 느림의 실천이다. 그 느림 속에서만 세계는 자신을 드러낸다.

감응적 지식은 또한 기술 시대의 예술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오늘날 우리는 데이터와 이미지의 과잉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만큼 감각이 둔해지고 세계와의 접촉이 약화되고 있다. 기술은 세계를 빠르게 재현하지만, 그 표면의 속도를 따라가다 보면 실제의 질감과 소리는 사라진다. 안나 친의 사유는 이런 상황 속에서 기술을 감응의 도구로 전환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디지털 아카이브나 사운드 맵핑, NFC 기반 전시 같은 시도는 기술을 통해 세계의 미세한 흔적을 기록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기술의 사용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세계의 리듬에 조율되어 있는가이다.

감응적 지식은 결국 예술의 존재 방식을 바꾼다. 예술은 표현의 언어가 아니라, 경청의 언어가 된다. 작가는 말하기보다 듣는 자가 되고, 작품은 선언이 아니라 응답이 된다. 이러한 전환은 예술의 민주화를 넘어, 예술의 생태화를 의미한다. 세계를 설명하는 대신, 세계와 함께 살아보는 실천이 예술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이는 공명성과 같은 기획자들이 강조하는 현장 기반 연구, 지역 사회와의 협업, 정책과 문화의 교차점을 탐색하는 태도와도 정확히 맞닿아 있다.

감응의 윤리는 예술이 인간 사회의 언어를 넘어, 비인간적 존재의 언어를 듣는 능력을 요구한다. 바람의 소리, 금속의 진동, 물의 흐름, 돌의 침묵, 그리고 인간의 목소리가 뒤섞이는 공간 속에서 예술은 하나의 공통 언어를 만든다. 그것은 언어 이전의 감각, 관계의 리듬이다. 안나 친은 우리가 이 세계를 변화시키려 하기 전에, 먼저 그 세계의 언어를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듣는 자만이 진정한 반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감응적 지식이란 세계를 다시 살아 있는 존재로 인식하는 일이다. 그것은 지식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동시에, 예술의 윤리를 바꾼다. 인간의 시선에서 벗어나, 세계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일. 그것이 예술가와 기획자가 이 시대에 감당해야 할 지적 실천이다. 우리는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더 깊이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예술은 세계와 함께 호흡하는 생명체가 된다.


예술감독 공명성





사진출처 : https://artreview.com/artist/anna-l-tsing/?year=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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