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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테르 전시아카이브.


연도 [전시공간] - [전시제목] / [작가이름] [전시종류]


2024 아이테르 범일가옥 - 황향숙 개인전 [미술전시]


EXHIBITION INFORMATION



 • 2024.03.24~2024.03.30
• 10:00 ~ 18:00
• AITHER, (48737) 21, Beomil-ro 65beon-gil, Dong-gu, Busan
• https://aither.kr
 • 051-977-5272



황향숙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서 사인펜을 사용하여 주로 자신이 상상하는 우주, 바람, 나무, 산 등의 자연물들을 주제로 그려냅니다. 이 작업 방식은 작가의 동심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녀의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들어 많은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작가는 간단한 도구인 사인펜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고, 이를 통해 우리에게 놀라운 시각적 경험을 선사합니다.그녀의 작업은 순수한 감성과 창의력을 투영하며,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세계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여성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우아함을 사랑하는 황향숙 작가의 작품은 동화적인 요소를 담고 있으며, 우리에게 상상 속의 세계를 열어줍니다.작가는 찰나의 순간에 떠오르는 영감을 즉흥적으로 그림에 담아냅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들은 작가의 내면을 비추며, 우리에게 그녀의 섬세한 감성과 진실한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황향숙 작가의 작품은 단순한 펜으로 빚어진 것이지만, 그 속에는 무한한 상상력과 감성이 담겨있습니다.이러한 작가의 작품은 우리를 동심의 세계로 인도하여,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그녀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우리는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고, 동심으로 돌아가며 새로운 영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황향숙 작가의 작품은 우리에게 예술의 참된 가치를 깨닫게 하며, 우리의 삶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한국의 예술과 문화에 담긴 역사를 탐구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전국의 예술가들이 부산으로 모이면서, 일제 시대의 문화통치의 잔재인 모더니즘과 실험주의 예술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적이고 일상적인 예술행동을 지향하는 부산 최초의 문화예술단체인 '토벽회'의 서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토벽회'는 일제 강점기의 예술적 잔재에 대항하고, 한국의 민족적 정체성과 일상적인 삶을 반영하는 예술을 추구하며 설립되었습니다. 이 단체는 모더니즘과 실험주의 예술이 지배적이던 시기에 민족주의와 일상성을 중심으로 한 예술 활동을 통해 한국의 미술 장면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토벽회'의 활동은 단순히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것을 넘어, 예술이 일상 속에서 어떻게 대중과 소통하고, 대중의 예술적 영역을 넓히는 데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였습니다.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토벽회'의 정신을 이어받아, 아이테르는 현대 한국에서 일상적인 공간에서의 예술 전시를 통해 대중의 예술적 경험을 확장하고자 합니다. 아이테르의 전시는 일상 속 공간들을 변화시키는 예술의 힘을 보여주며, 대중이 예술과 더 깊이 연결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를 통해, 아이테르는 현대 한국 미술의 방향성을 재정립하고, 일제 강점기의 잔재를 극복하며 민족적 정체성과 일상성을 중심으로 한 예술적 실천을 강조하는 데 기여하고자 합니다.옛날 이 하천 주위에 호랑이가 가끔 나타나서 범내라고 하였으며, 범일6동 범천시장에 있는 호천석교비(虎川石橋碑)가 범내가 호랑이내라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동래군 부산면(釜山面) 지역으로 범내골·호천곡·범천곡이라고 불렀고, 일제강점기에 범천1리(凡川一里)와 범천2리(凡川二里)를 합하여 범일동이라고 하였다. 1959년에 동제 개편에 의해 범일1~5동으로 나누어졌다가, 1970년에 범일4동에서 범일6동을 분동하였다. 1975년에 범일3동의 일부가 남구로 속하고, 범일3동의 나머지 지역은 범일2동과 5동에 편입됨으로써 범일3동은 폐지되었다. 2016년 1월 범일4동이 범일 1동에 통합되었다. 법정동인 범일동은 행정동인 범일1·2·5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널박·노하·대지막거리·소고·범내골·연동개·안창마을 등이 있다. 안창마을은 6·25전쟁 때 정착된 마을로서 산 속의 좁은 분지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공공기관으로는 부산진소방서·KT남부산지사·시민회관이 있고, 1950년대 후반부터 들어서기 시작한 가구(家具) 거리가 범일동 간선도로 양쪽 약 1km에 걸쳐 형성되어 있다.범일동의 서쪽은 대부분 산지로 수정산(水晶山)[306m]이 있고, 중앙에는 증산(甑山)이 있다. 시루와 같다는 모습에서 유래된 이 산의 지명은 부산(釜山)의 지명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이곳에 부산진성이 있었으며, 정공단 터가 성문 남문 터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동쪽의 범일 2동과 범일 5동의 해안 지역은 대부분 매립된 곳이다.

한국의 예술과 문화에 담긴 역사를 탐구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전국의 예술가들이 부산으로 모이면서, 일제 시대의 문화통치의 잔재인 모더니즘과 실험주의 예술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적이고 일상적인 예술행동을 지향하는 부산 최초의 문화예술단체인 '토벽회'의 서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토벽회'는 일제 강점기의 예술적 잔재에 대항하고, 한국의 민족적 정체성과 일상적인 삶을 반영하는 예술을 추구하며 설립되었습니다. 이 단체는 모더니즘과 실험주의 예술이 지배적이던 시기에 민족주의와 일상성을 중심으로 한 예술 활동을 통해 한국의 미술 장면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토벽회'의 활동은 단순히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것을 넘어, 예술이 일상 속에서 어떻게 대중과 소통하고, 대중의 예술적 영역을 넓히는 데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였습니다.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토벽회'의 정신을 이어받아, 아이테르는 현대 한국에서 일상적인 공간에서의 예술 전시를 통해 대중의 예술적 경험을 확장하고자 합니다. 아이테르의 전시는 일상 속 공간들을 변화시키는 예술의 힘을 보여주며, 대중이 예술과 더 깊이 연결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를 통해, 아이테르는 현대 한국 미술의 방향성을 재정립하고, 일제 강점기의 잔재를 극복하며 민족적 정체성과 일상성을 중심으로 한 예술적 실천을 강조하는 데 기여하고자 합니다.옛날 이 하천 주위에 호랑이가 가끔 나타나서 범내라고 하였으며, 범일6동 범천시장에 있는 호천석교비(虎川石橋碑)가 범내가 호랑이내라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동래군 부산면(釜山面) 지역으로 범내골·호천곡·범천곡이라고 불렀고, 일제강점기에 범천1리(凡川一里)와 범천2리(凡川二里)를 합하여 범일동이라고 하였다. 1959년에 동제 개편에 의해 범일1~5동으로 나누어졌다가, 1970년에 범일4동에서 범일6동을 분동하였다. 1975년에 범일3동의 일부가 남구로 속하고, 범일3동의 나머지 지역은 범일2동과 5동에 편입됨으로써 범일3동은 폐지되었다. 2016년 1월 범일4동이 범일 1동에 통합되었다. 법정동인 범일동은 행정동인 범일1·2·5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널박·노하·대지막거리·소고·범내골·연동개·안창마을 등이 있다. 안창마을은 6·25전쟁 때 정착된 마을로서 산 속의 좁은 분지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공공기관으로는 부산진소방서·KT남부산지사·시민회관이 있고, 1950년대 후반부터 들어서기 시작한 가구(家具) 거리가 범일동 간선도로 양쪽 약 1km에 걸쳐 형성되어 있다.범일동의 서쪽은 대부분 산지로 수정산(水晶山)[306m]이 있고, 중앙에는 증산(甑山)이 있다. 시루와 같다는 모습에서 유래된 이 산의 지명은 부산(釜山)의 지명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이곳에 부산진성이 있었으며, 정공단 터가 성문 남문 터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동쪽의 범일 2동과 범일 5동의 해안 지역은 대부분 매립된 곳이다.

황향숙 작가는 그의 작품에서 사인펜을 주된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새로운 탐구의 영역을 제공합니다. 이는 사인펜이 평범하고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이를 미술 작품의 주요 재료로 채택하고 그 특성을 극대화시켜서 표현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관습과는 차별화되고 독특한 접근입니다.사인펜은 보통 일상적인 필기나 그림 그리기에 사용되는 도구로 인식되지만, 황향숙 작가는 이를 미술 작품을 창작하는 주요 재료로서 활용합니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시각과 미적 감각을 경험하게 됩니다. 황향숙 작가는 사인펜을 통해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하며, 이를 통해 감정과 상상력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매체로 활용합니다. 그의 작품에서 사인펜은 그의 상상력과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수단으로 작용하며, 이는 관객들에게 새로운 미적 경험과 예술적 감상을 제공합니다.작품에서 사인펜은 단순한 도구로만 사용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작품에서는 사인펜을 통해 복잡한 세계를 표현하고, 깊이 있는 내면의 감정과 상상력을 전달합니다. 이는 사인펜이라는 한정된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확장되고 발전하는 작가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보여줍니다.작가의 작품에서 사용되는 사인펜은 보편적인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과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인펜은 그의 작품에서 색다른 매체로서 활용되며, 그의 작품을 통해 관객들은 일상의 경험을 미술적으로 재해석하고, 창의적인 발상과 표현의 자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황향숙 작가의 작품은 사인펜을 통해 새로운 예술적 경험과 감동을 선사하며, 관객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게 됩니다.현대 미디어를 통한 자아 표현은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노출과 취약성을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해석될지에 대한 두려움을 가집니다. 또한, 소셜 미디어에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공개하는 것은 온라인 커뮤니티나 친구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어떤 부분은 드러내고, 어떤 부분은 감추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현대미술과 동시대성1989년 이후 컨템퍼러리아트에 대한 연구방법론의 측면에서 ‘이론적 접근방법’의 중요성을 환기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적인 미술사 방법론(즉 아카이브나 연구자료의 분석을 통한 ‘작가론’, ‘작품론’, ‘양식비교‘ 등)이 컨템퍼러리아트를 이해하고 연구하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카데믹 아트나 모던 아트는 스튜디오 아트로 지칭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스튜디오 밖의 세계에 대한 역동적 내용 보다는 시각적 재현이나 형식적 창조의 문제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반면 컨템퍼러리아트는 포스트스튜디오 아트로 불릴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스튜디오 밖의 세계, 즉 동시대의 다양한 특징, 주요 문제 등을 다루기 때문이다. 이것이 왜 컨템퍼러리아트에 대한 접근방법이 흔히 동시대의 특성과 문제에 대해 깊이 천착한 철학적, 문화이론적, 사회과학적 담론에 의거하게 되는 이유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는 동시대성의 문제와 관련해, 한편, 동시대 철학자들, 즉 아감벤, 낭시, 네그리, 랑시에르 등의 담론을, 다른 한편, 현대미술 이론가들, 테리 스미스, 보리스 그로이스, 피터 오스본, 알렉산더 알베로 등의 이론을 논의함으로써 담론적 접근의 중요성을 환기하게 될 것이다.본 연구는 보다 구체적으로 ‘1989년 이후 현대미술’의 담론을 수용하고 그 주요 쟁점을 ‘동시대성’의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국내의 동시대 미술에 대한 연구에 기여하게 될 것이고, 나아가 동시대 미술의 실천(즉 창작, 기획, 비평, 교육 등)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특히 본 연구에서 논의한 전문적인 의미에서 ‘1989년 이후 컨템퍼러리아트’를 수용한다는 것은 기존의 제도권 미술계에 오늘날 비엔날레 유형의 미술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첫째, 본 연구에서 컨템퍼러리아트의 시대구분에 대한 논의는 국내에서도 모던아트와는 대립되는 컨템퍼러리아트의 역사적 시발점에 대한 논의를 촉발하게 될 것이고, 둘째, 컨템퍼러리아트와 관련된 ‘동시대성’의 개념에 대한 논의는 동시대 미술의 ‘역사적 조건’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게 될 것이고, 셋째, 이러한 컨템퍼러리아트의 역사적 조건으로서의 동시대성에 대한 논의는 구체적으로 ‘동시대’란 무엇이고, ‘동시대인’은 누구인가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동시대 미술에 종사하는 작가, 기획자, 비평가 또는 이론가들에게 ‘동시대’를 인식하는 문제와 ‘동시대인’을 특정한 주체로 확인(identify)하는 논거를 제공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본 연구는 국내에서 ‘컨템퍼러리 아트’의 담론을 연구하고 실천적으로 수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기초 및 선행연구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 현대미술의 경향과 비교한국 현대미술의 ‘동시대성’은 1990년대라는 시대전환기를 통해 획득된 성과로 볼 수 있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를 기점으로 일어났던 대내외적 시대 변동은 우리 현대미술계 변화에도 큰 계기가 되었다. 이 연구는 한국 현대미술과 관련된 이해와 해석에 있어 종종 피상적으로 적용되는 ‘동시대성’, 그리고 이와 연동되는 글로벌리즘 또는 글로컬리즘의 실체에 대해 고찰하였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로 이어지면서 한국의 지정학적 상황과 역사적 시간의 중첩, 후기자본주의 경제체제로의 진입, 정보통신매체의 혁신, 새로운 대중과 소비문화, 그리고 미술계의 제도적 변화 등과 연동하여 한국 현대미술의 전개를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우리 현대미술과 당대 사회가 단선적이지 않고 촘촘히 짜여 얽힌 관계망 내에 자리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고, 그것이 동시대 미술을 배태한 실질적 토대로 작용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또한 1990년대 이후 한국미술의 주요 결실로 다뤄졌던 우리 미술의 세계화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동안 세계미술과의 단선적인 보편성 공유에 조급함을 보이며 이를 추종하는 지향적 구도를 벗어나 우리 현대미술의 이질적이고 혼성적인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1990년대 본격적으로 활동을 전개한 작가들의 작업이 세계화 물결 속에서 서구 주류 미학담론에 침잠되었다든지 감각의 표피에 머물러 깊이감을 상실했다는 미술 내적 비평, 또는 세계미술계 내 보편적 동일성 확보의 선두주자라는 다분히 서구 중심적 전지구화의 관점에서 벗어나, 보다 복합적이고 혼종적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 자리한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1990년대 이후 미술실천에 내재한 당시의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보편적 조형어휘의 공유 차원을 넘어 어떻게 우리 현대미술이 동시대성을 획득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 확인시켜 주었다. 그 가운데서 시대의 환희 못지않게 짙은 환멸의 기제를 주목하게 되었다. 1990년대는 집단적 충격과 우울이 상존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는 그 시절을 겪은 이들의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 속에 자리한 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양한 시기, 장소, 방법으로 느닷없이 드러났다. 1990년대 이후 미술은 유토피아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디스토피아의 폭로, 글로벌리즘과 로컬리티와의 지속적인 교차, 충돌을 다층적이고 복합적으로 드러내고자 종종 이율배반적 행위와 실천을 전개하였다.그리고 그 시기 성장한 작가들의 활동과 작업에는 당시 후기자본주의의 내재적 작동논리가 제공하는 수혜와 폐해를 모두 수용하고 있었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작동원리를 작가 스스로 자신의 이력을 구축하는데 전략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가하면, 또 다른 한편 후기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이나 그것에 내재한 본질적 모순과 부조리 등을 다루며 지속적으로 선형적 의미화에 혼동을 가하였다. 1990년대 작가들은 대중 혹은 개별자들에 대한 기존의 보편적 가치를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이를 통해 총체성, 일체성과 집단주의로 이어졌던 근대적 산업화의 통제와 구속, 그리고 이후 세계화 시대를 지나오면서 후기자본주의 사회 병폐들에 의해 또 다른 방식으로 여전히 외면당하는 익명의 개별자들, 즉 대승적 차원이라는 미명 아래 희생을 강요당한 존재들을 발견하는 과정을 추적했다. 또한 ‘발견된’ 개별자들의 움직임과 실천적 참여를 통해 거대서사 아래 가려져 있던 소서사의 재건을 촉구하는 작업을 수행하기도 하였다.본 연구를 통해 한국 현대미술 내 동시대성은 1990년대 우리의 지정학적 문맥과 시간적 중첩에 기반하여 구축되었고, 당시 새로운 세대의 등장과 다중적 시각예술 행위의 발현과 전개에 관계하고 있으며, 후기자본주의의 작동논리에 따른 수혜와 폐해를 중첩시켜 실행의 동력으로 활용하는 가하면, 거대서사의 붕괴에 이은 소서사의 분출을 포획하여 재맥락화하는 등 다중적이고 복합적 관계망을 아우르고 있었다. 그 안에서 1990년대 작가들의 작업에는 다양한 매체의 활용, 경계의 이동, 그리고 이질성과 비대칭성의 전개라는 양상이 드러났다.전지구화 시대 미술환경이 우리 미술을 다변화하는데 있어 제공한 계기들이 분명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표면적이고 단선적인 접근에서 더 나아가 당대 우리 미술이 직면한 전환과 새로움의 실체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가 본격화되어야 할 시기가 왔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전에 비할 바 없이 확장되고 다중적인 세계미술과의 연결, 그리고 전개가 점차 늘어나고 급격해지는 지금의 미술 현실에서 한국미술의 동시대성에 대한 실질적 논의는 매우 강하게 촉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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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협회 아이테르 [ AITHER ] 부산전시관


아이테르 AITHER 


부산 갤러리/전시관

- 문화예술기획업


주소: (48737)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로 65번길 21

주차: 진시장 공영주차장

서비스 운영시간: 월-토 10:00~18:00

연락처: 051-977-5272 | sck02145@naver.com | https://aither.kr/

팩스: 0504-322-2379

인스타그램: @aither.kr

유튜브: https://www.youtube.com/@AITHERART


[시설 안내]

4층, 전시 공간

5층, 라운지

6층,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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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예술과 문화에 담긴 역사를 탐구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전국의 예술가들이 부산으로 모이면서, 일제 시대의 문화통치의 잔재인 모더니즘과 실험주의 예술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적이고 일상적인 예술행동을 지향하는 부산 최초의 문화예술단체인 '토벽회'의 서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토벽회'는 일제 강점기의 예술적 잔재에 대항하고, 한국의 민족적 정체성과 일상적인 삶을 반영하는 예술을 추구하며 설립되었습니다. 이 단체는 모더니즘과 실험주의 예술이 지배적이던 시기에 민족주의와 일상성을 중심으로 한 예술 활동을 통해 한국의 미술 장면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토벽회'의 활동은 단순히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것을 넘어, 예술이 일상 속에서 어떻게 대중과 소통하고, 대중의 예술적 영역을 넓히는 데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였습니다.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토벽회'의 정신을 이어받아, 아이테르는 현대 한국에서 일상적인 공간에서의 예술 전시를 통해 대중의 예술적 경험을 확장하고자 합니다. 아이테르의 전시는 일상 속 공간들을 변화시키는 예술의 힘을 보여주며, 대중이 예술과 더 깊이 연결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를 통해, 아이테르는 현대 한국 미술의 방향성을 재정립하고, 일제 강점기의 잔재를 극복하며 민족적 정체성과 일상성을 중심으로 한 예술적 실천을 강조하는 데 기여하고자 합니다.옛날 이 하천 주위에 호랑이가 가끔 나타나서 범내라고 하였으며, 범일6동 범천시장에 있는 호천석교비(虎川石橋碑)가 범내가 호랑이내라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동래군 부산면(釜山面) 지역으로 범내골·호천곡·범천곡이라고 불렀고, 일제강점기에 범천1리(凡川一里)와 범천2리(凡川二里)를 합하여 범일동이라고 하였다. 1959년에 동제 개편에 의해 범일1~5동으로 나누어졌다가, 1970년에 범일4동에서 범일6동을 분동하였다. 1975년에 범일3동의 일부가 남구로 속하고, 범일3동의 나머지 지역은 범일2동과 5동에 편입됨으로써 범일3동은 폐지되었다. 2016년 1월 범일4동이 범일 1동에 통합되었다. 법정동인 범일동은 행정동인 범일1·2·5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널박·노하·대지막거리·소고·범내골·연동개·안창마을 등이 있다. 안창마을은 6·25전쟁 때 정착된 마을로서 산 속의 좁은 분지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공공기관으로는 부산진소방서·KT남부산지사·시민회관이 있고, 1950년대 후반부터 들어서기 시작한 가구(家具) 거리가 범일동 간선도로 양쪽 약 1km에 걸쳐 형성되어 있다.범일동의 서쪽은 대부분 산지로 수정산(水晶山)[306m]이 있고, 중앙에는 증산(甑山)이 있다. 시루와 같다는 모습에서 유래된 이 산의 지명은 부산(釜山)의 지명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이곳에 부산진성이 있었으며, 정공단 터가 성문 남문 터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동쪽의 범일 2동과 범일 5동의 해안 지역은 대부분 매립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