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어 나온 초상
정재권
2025.09.28. ~ 2025.10.04.
10:00 ~ 18:00
아이테르 범일가옥
AITHER (48737) 21, Beomil-ro 65beon-gil, Dong-gu, Bu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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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시는 한 인간이 폐쇄와 단절의 방을 넘어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서사를 이야기한다. 그 여정에서 발생하는 내면의 고통과 불안을 강렬한 색채를 지닌 시각적 언어로 표현한다. 오래된 가옥의 공간은 인간 내면의 방이 되고, 방을 채우고 있던 물질들이 외부 세계로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위태로운 돈과 직업의 세계에서 자신의 무능을 통감하며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인간 관계에 대한 염증과 반복되는 사랑의 실패로 깊은 자기혐오와 외로움에 빠져, 의미 없는 쾌락에 중독되어 스스로를 위로하고 안주하는 폐쇄와 단절의 방 안에서, 예민하고 나약한 자아는 곳곳이 무너지고 죽어버렸다.”
작가는 ‘고통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함께, 스스로 저질러 온 자기파괴에 대한 죄의식을 회상하고 고백한다. 피와 고름에 잠겨 죽어버린 기억과 감정의 시체를 끄집어내어 펼쳐 놓고 관찰한다. 이는 부정적인 감정의 존재를 인식하고, 감정과 그에 지배당하는 자아를 분리하고, 과거의 고통을 추상적 자화상으로 변환하는 과정의 기록이다.
“기억과 감정들은 휩쓸리고 잠겨 죽었어도, 함께 죽어가지는 말자.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니까.”
작품은 내면의 고통을 감정의 ‘실’로 치환하여 표현한다. 이 실과 같은 감정의 가닥으로 짜인 직물 인간의 초상은 여유 없이 촘촘하게 짜여 있기도 하고, 때로는 작은 충격에 터져 풀어지기도 한다. 이 끊임없이 자라나고 흩어지는 감정의 해체를 집착적인 선적 터치로 표현한다. 감정을 잠기게 하여 번지고 무너지게 하는 외부 요인은 ‘물’의 이미지로, 숨 막히도록 턱 끝까지 차오른 깊은 우울과 불안을 표현한다.
“스스로 목을 조르는 삶에서도 이어가는 생의 의지,
절망의 공기 속에서도 이어갈 수 있는 생의 의지,
떨리는 손으로 붙잡고 이어가는 생의 의지.”
작가가 고통을 작품에 담는 것은, 동시에 그것을 치유하고 이해하는 과정이다. 스스로 만들어 낸 고통과 악몽의 방 안에 갇혀있었던 한 인간이 조금씩 세상 밖으로 새어 나오듯이 모습을 드러내는 서사를 표현한다. 작품은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새로운 시각과 성장의 흔적을 제시하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할 수 있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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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직시에서 생의 의지로
미술감독 공명성
방 안에 갇힌 개인
정재권의 작업노트에서 가장 먼저 두드러지는 것은 ‘방’이라는 은유적 공간이다. 이 방은 단순한 생활의 공간이 아니라, 폐쇄와 단절의 상태를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장소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둘러싼 사회적 불안, 관계의 상처, 직업적 불안정성, 사랑의 반복적 실패를 이 방에 가둬두었다. 마치 외부와의 모든 접촉을 끊어버린 듯한 이 폐쇄된 공간은 곧 인간 내면의 심리적 감옥이 된다. 그는 이 안에서 스스로 목을 조르며, 자기혐오와 무력감 속에 깊이 침잠한다. 작업노트의 문장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위태로운 돈과 직업의 세계에서 자신의 무능을 통감하며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인간 관계에 대한 염증과 반복되는 사랑의 실패로 깊은 자기혐오와 외로움에 빠져…”라는 고백은 단순히 개인의 심정을 넘어선다. 이는 동시대 사회가 구조적으로 만들어낸 불안정 노동, 파편화된 인간관계, 감정 자본의 고갈이 한 개인의 심리와 신체에 새겨진 흔적이자, 현대인의 보편적 결핍을 집약한다.
작가는 이러한 결핍을 단지 말로만 표현하지 않는다. 그는 색채와 재료를 통해 결핍의 무게를 시각화한다. 그의 초기 작업에서 보이는 강렬한 색채는 단순한 미학적 선택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불안을 폭발시키는 장치다. 원색의 충돌, 물감의 번짐, 캔버스를 찢고 나오는 듯한 선들은 모두 억눌린 감정의 압력을 드러낸다. 그에게 있어 물감은 단순한 표현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를 파괴하고 치유하는 ‘자해적’ 매체다. 방 안에서 소리 없이 무너지는 자아의 파편들이 캔버스 위에 응고되고 흘러내리며, 그것이 바로 결핍의 형태학이 된다. 그는 방 안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해체하고, 그 조각들을 재료로 전환한다. 이때의 방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작업의 원형질이자 내면의 결핍을 직시하는 실험실이다.
결핍은 단지 외부의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정재권은 자기파괴적 행위를 반복하며 그 결핍을 스스로 강화한다. 의미 없는 쾌락에 중독되어 스스로를 위로하고 안주하는 과정은 곧 결핍의 자기 생산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결핍이 단순히 부정적으로만 남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 결핍이야말로 창작의 동력이자 작업을 추진하는 원천이 된다. 그는 고통을 단순히 회피하거나 덮어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고통을 ‘작품화’함으로써 마주하려 한다. 이는 일종의 자기 고백적 예술이면서 동시에 자기 해체적 예술이다. 결핍을 가시화하고, 결핍을 통해 존재를 증명하려는 몸부림은 동시대 미술에서 중요한 윤리적 태도로 읽힌다.
그의 작업에서 가옥이라는 공간적 조건은 단순한 물리적 배경이 아니라, 내면의 방을 외부화한 장치다. 오래된 가옥은 시간이 켜켜이 쌓인 장소로서, 과거의 흔적과 균열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이 장소는 인간 내면의 상처와 결핍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벽의 균열, 낡은 바닥, 어두운 조명은 작가의 내적 고통을 시각적으로 중첩시킨다. 따라서 전시 공간 자체가 결핍의 은유가 되고, 관객은 단순히 작품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결핍이 응축된 공간 속에 들어서게 된다. 이는 미술사적으로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전통적 회화가 캔버스라는 평면에 감정을 담았다면, 정재권의 작업은 공간 전체를 감정의 장치로 전환한다. 그는 장소와 회화를 결합하여, 결핍을 다층적으로 경험하게 만든다.
결핍의 핵심은 결국 자아의 붕괴다. 작업노트에서 그는 “예민하고 나약한 자아는 곳곳이 무너지고 죽어버렸다”고 적는다. 이는 단순히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 삶의 경험에서 비롯된 진술이다. 그에게 예술은 무너진 자아를 복원하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무너진 자아의 파편들을 직시하고, 그것을 드러내어 관객과 공유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그는 자아를 재건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자아의 파괴 과정을 시각화하며, 그 속에서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고통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 질문은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이다.
이 결핍의 기록은 단순한 개인의 경험을 넘어, 동시대 사회적 맥락과 깊게 연결된다. 불안정 노동, 도시의 재개발, 인간관계의 파편화, 감정 자본의 소비와 고갈은 모두 현대 한국 사회에서 흔히 목격되는 풍경이다. 정재권의 방 안은 바로 이 사회적 조건들의 집약체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내밀하게 기록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시대적 결핍을 드러낸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자기 고백적이면서도, 사회적이다. 개인의 방은 곧 시대의 방이 된다. 관객은 그의 방 안에서 자신의 결핍을 발견하고, 그의 고통 속에서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본다.
결국 정재권의 작업에서 결핍은 부정적 상태로만 남지 않는다. 그것은 작품을 생성하는 원동력이며, 새로운 시각적 언어를 만들어내는 동기다. 결핍이 없다면, 그의 작업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결핍을 부끄러움이나 약점으로 감추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드러내고 응시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예술로 전환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결핍은 단순히 개인의 상처가 아니라, 예술적 실천의 시작점이 된다. 결핍에서 출발한 작업은 곧 고통을 미학으로 전환하는 서사의 첫걸음이 된다.
고통을 표현하려는 시도
정재권의 작업노트에서 발견되는 두 번째 축은, 그가 단순히 고통 속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려는 시도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자기 파괴와 폐쇄의 방 안에 갇힌 채 고립된 인간은 끝내 그 안에서만 존재할 수 없다. 고통은 언젠가 외부로 새어나오며, 언어와 형상을 필요로 한다. 작가는 바로 이 지점에서 회화라는 도구를 붙잡는다. 여기서 회화는 단순히 미적 표현의 수단이 아니라, 자기 고백과 자기 구원의 매개다. 그는 고통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색과 선으로 전환함으로써, 고통을 감내하는 방식에서 고통을 객체화하고 응시하는 방식으로 옮겨간다. 이 변화의 순간이 곧 그가 직면한 ‘낯선 세계로의 부름’이다.
작업노트에는 이러한 전환의 흔적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죽어버린 기억과 감정의 시체를 끄집어내어 펼쳐 놓고 관찰한다”고 썼다. 이 진술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과거를 재료로 삼겠다는 선언이다. 죽은 감정의 시체를 꺼내어 보는 행위는 고통을 다시 경험하는 잔혹한 과정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관찰한다는 말 속에는 이미 거리를 두려는 태도가 담겨 있다. 즉, 그는 자기 감정의 포로가 되는 대신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이 ‘관찰’의 태도가 곧 표현의 첫걸음이다. 여기서 그는 고통의 주체에서, 고통을 표현하는 주체로 이동한다. 이는 그 자체로 중요한 예술적 결단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전환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다. 고통을 시각적 언어로 옮긴다는 것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한다. 회화는 감정을 완전히 담아낼 수 없고, 오히려 왜곡하거나 과장할 수 있다. 작가는 이 한계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언어적 진술과 시각적 언어를 병행한다. 작업노트가 곧 그의 회화의 밑그림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어로 먼저 자기 감정을 진술하고, 그것을 다시 시각적으로 번역하는 과정은 마치 이중의 고백과 같다. 관객이 마주하는 회화는 단순한 시각적 이미지가 아니라, 언어와 경험이 중첩된 서사의 흔적이다. 이 지점에서 정재권의 회화는 단순한 형상 이상의 것, 곧 내면의 기록으로 자리 잡는다.
그의 시도는 또한, 고통을 감각적으로 ‘재현’하는 대신 ‘치환’하려는 전략으로 읽힌다. 그는 고통을 선과 색으로, 감정을 ‘실’과 ‘물’의 이미지로 변환한다. 감정의 실은 얽히고, 풀리고, 끊어지고, 다시 엮이면서 불안정한 인간 초상을 만들어낸다. 이는 곧 그의 내면이 어떻게 무너지고 재구성되는지를 보여주는 은유적 장치다. 물의 이미지는 감정을 잠식하는 외부 요인의 역할을 한다. 번져나가고, 흘러내리고, 잠식하는 물은 고통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며, 숨 막히도록 압박한다. 그러나 바로 이 물의 이미지가 회화적 실험의 동력이 된다. 그는 물감의 번짐, 재료의 확산, 색채의 침투를 통해 감정의 무너짐을 형상화한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작업은 재현이라기보다 감정의 과정 자체를 구현하는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은 동시에 작가에게 두려움과 저항을 안겨준다. 고통을 드러내려는 충동은 곧 자기 자신을 낯선 시선 앞에 노출하는 행위다. 폐쇄의 방 안에서 고통을 은닉하던 그가, 그것을 드러내려 할 때 맞닥뜨리는 것은 낯선 세계의 응시다. 관객이라는 타자, 혹은 사회라는 타자 앞에 자신의 고통을 내놓는 일은 그 자체로 잔혹한 고백이다. 여기서 그는 고통을 다시 한 번 경험하고, 때로는 고통의 강도가 증폭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이 두려움과 저항이야말로, 그가 예술가로서 나아가는 길을 규정한다. 낯선 세계로의 부름은 언제나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언어에 도달할 수 없다.
정재권의 시도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가 이 과정을 개인적 치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회화는 개인의 고통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을 보편적 감각으로 전환한다. 감정을 실과 물로 치환하는 방식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상징을 만든다. 관객은 그의 캔버스를 보며 ‘저것은 나의 감정일 수도 있다’고 느낀다. 즉, 그는 개인적 서사를 사회적 감각으로 확장한다. 여기서 그의 시도는 자기 고백을 넘어, 타자와의 관계 맺기로 이어진다. 방 안에서 홀로 반복되던 고통이, 표현을 통해 사회적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작가는 비로소 낯선 세계에 발을 내딛는다.
이러한 시도는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정재권의 회화는 20세기 추상표현주의나 신표현주의가 강조했던 ‘내면의 폭발’을 연상시키지만, 그것과는 다른 차이를 가진다. 그는 단순히 감정을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치환하고 구조화한다. 즉, 감정을 재료와 기법으로 번역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 고백을 하나의 언어 체계로 만든다. 이는 그의 작업이 단순한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감정의 언어학으로 읽혀야 함을 보여준다. 낯선 세계로의 부름은 단순히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언어를 발명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정재권의 시도는 또한, ‘왜 예술을 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맞닿는다. 그는 예술을 통해 고통을 치유하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영속화하고 기록한다. 치유와 기록은 서로 상반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를 보완한다. 치유하려면 먼저 고통을 드러내야 하고, 드러낸 고통은 기록으로 남는다. 예술은 이 모순적 과정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단순히 개인적 구원의 서사가 아니라, 인간 존재가 고통을 어떻게 다루고 전환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사유다. 여기서 예술은 단순히 미적 즐거움이 아니라, 존재론적 실천이 된다.
결국, 정재권의 작업에서 ‘낯선 세계로의 부름’은 두 가지 층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개인적 차원에서는 자기 고통을 작품으로 드러내려는 결단이다. 둘째, 사회적 차원에서는 그 고통을 공유 가능한 언어로 전환하려는 시도다. 그는 고통을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단순히 자기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감각으로 확장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하고, 폐쇄와 단절의 방 안에서 세상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내딛는다. 바로 이 순간이 그의 예술 세계가 시작되는 진정한 출발점이다.
자기 파괴와 몰락
정재권의 작업노트를 따라가다 보면, 그는 고통을 표현하려는 강렬한 충동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곧바로 그것을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는 여러 차례 자신을 파괴하거나 고통을 회피하며, ‘표현의 길’ 앞에서 주저하고 거부한다. 이러한 저항은 단순한 의지 부족이나 나약함이 아니라, 고통을 드러내는 행위 자체가 갖는 위험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고통을 표현한다는 것은 곧 그 고통을 다시 마주하고, 타자의 시선에 노출시키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자기혐오와 불안, 두려움에 압도되며, 스스로를 몰락으로 몰아넣는 모순적 행위를 반복한다.
작업노트에는 이러한 자멸적 경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는 “의미 없는 쾌락에 중독되어 스스로를 위로하고 안주하는 폐쇄와 단절의 방 안에서, 예민하고 나약한 자아는 곳곳이 무너지고 죽어버렸다”고 적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쾌락이 단순히 즐거움이 아니라 도피의 장치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고통을 직면하기보다는, 순간적 쾌락에 몸을 맡김으로써 자기 존재를 잊으려는 태도. 그러나 이러한 도피는 곧 더 깊은 자기혐오로 이어진다. 순간의 위안은 곧 무력감과 죄책감으로 바뀌고, 그것은 다시 자아를 무너뜨린다. 결과적으로 그는 고통을 피하려다 더 큰 고통을 자초한다. 이 자기 파괴의 반복이 바로 그의 예술 이전의 삶을 규정한다.
예술가로서의 정재권이 흥미로운 지점은, 이 몰락조차 작업의 일부로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나약함과 자기 파괴적 습관을 숨기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드러내고,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으려 한다. 이는 전통적인 영웅 서사와는 다른, 반(反)영웅적 태도다. 많은 예술가들이 고통을 승화시키며 자기 강인함을 강조했다면, 정재권은 오히려 무너지고 실패하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 작업노트와 회화는 바로 이 실패의 흔적이다. 그의 선과 색은 강렬하지만, 그 강렬함 속에는 무너짐과 허약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는 단순한 ‘강한 표현’이 아니라, 몰락을 드러내는 정직한 기록이다.
이러한 저항과 몰락의 과정은 작품 속 형식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의 회화에는 종종 구조가 무너지고, 구성이 붕괴되는 지점이 발견된다. 촘촘히 짜인 선들이 갑작스럽게 풀려 버리거나, 형상이 흐릿하게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 있다. 이는 단순히 기법상의 실수가 아니라, 작가의 내적 저항이 외부로 드러난 흔적이다. 그는 작품을 완결된 구조로 유지하기보다, 무너짐 자체를 드러내는 방식을 택한다. 이러한 불안정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을 안정적으로 감상하지 못하게 한다. 관객은 언제든 붕괴할 것 같은 화면 앞에서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바로 이 불안정성이 정재권의 작업을 독특하게 만든다. 몰락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미학적 전략으로 전화된다.
그러나 몰락은 언제나 파괴적인 것만은 아니다. 정재권에게 몰락은 자기 성찰의 통로이기도 하다. 그는 몰락을 통해 고통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나는 왜 반복적으로 무너지는가? 고통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라는 질문이 여기서 발생한다. 몰락은 질문을 생성하는 계기이며, 바로 그 질문이 그의 작업을 밀어붙인다. 즉, 몰락은 창작의 중단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 그는 실패 속에서 다시 붓을 들고, 무너진 감정의 잔해 속에서 다시 선을 긋는다. 따라서 몰락은 단순한 자기 파괴가 아니라, 창작의 리듬을 형성한다. 무너짐과 재시도의 반복이 그의 작업의 심장 박동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정재권의 몰락이 철저히 자기 고백적이라는 점이다. 그는 고통을 미화하거나 상징으로만 처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업노트의 직접적이고 날카로운 문장들을 통해 자신의 나약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정직함은 그의 작업이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실제 삶의 경험에 뿌리내려 있음을 증명한다. 동시에 이 정직함은 관객에게도 불편함을 안긴다. 관객은 그의 작품 앞에서 미적 즐거움보다는 불안과 긴장을 경험한다. 이는 관객이 그의 몰락을 단순히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체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관객을 몰락의 공범으로 끌어들인다. 관객은 그 앞에서 자기 자신의 나약함과도 마주하게 된다.
예술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전략은 자기 고백적 예술의 전통과 닿아 있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인간 존재의 파괴된 신체를 통해 불안한 실존을 드러냈다면, 정재권은 자기 감정의 파괴를 통해 불안한 내면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베이컨의 극적 왜곡이나 공포의 이미지와 달리, 더 개인적이고 일기적인 성격을 띤다. 그는 예술을 거대한 선언이 아니라, 자기 고백의 장으로 만든다. 이 점에서 그는 오히려 현대 한국 사회의 불안정한 청년 세대와 맞닿아 있다. 자기 파괴와 몰락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적 조건이기도 하다. 불안정 노동, 끊어진 사회적 관계, 무너진 안전망 속에서 살아가는 세대가 공유하는 감각이 바로 몰락이다. 정재권의 몰락은 이 세대의 몰락을 대변한다.
이렇듯, 정재권의 작업에서 ‘거부와 저항’은 고통을 드러내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다. 그는 고통을 표현하려는 순간, 동시에 그것을 피하려 하고 거부한다. 이 모순적 행위가 바로 그의 작업을 긴장 속에 놓이게 만든다. 몰락은 파괴적이지만, 동시에 창작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다. 그는 몰락 속에서 다시 일어나려 하고, 무너짐 속에서 다시 그린다. 따라서 거부와 저항은 단순한 후퇴가 아니라,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통과 의례다. 몰락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그는 고통을 진실하게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시각적 언어의 발견
정재권의 작업노트를 세밀히 들여다보면, 절망과 몰락의 반복 속에서도 끊임없이 등장하는 한 가지 단어가 있다. 바로 **‘실’**이다. 감정의 실, 기억의 실, 고통의 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감정의 가닥으로 치환하여 서술한다. 실은 서로 엮이고, 풀리고, 끊어지며, 인간 초상을 직조한다. 이는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그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핵심적인 언어다. 그는 붓질을 통해 끊임없이 선을 긋고, 그 선들이 얽히고 풀리며 화면을 채운다. 선의 집착적인 반복은 감정을 실로 바꾸는 과정이다. 이 집착의 흔적이 곧 그의 작업을 지탱하는 회화적 도구다. 정재권에게 선은 단순한 형상이 아니라, 감정을 물질화하는 매개다.
이 실과 함께 중요한 또 하나의 장치는 **‘물’**의 이미지다. 작업노트에서 그는 깊은 우울과 불안을 “턱 끝까지 차오르는 물”로 묘사한다. 물은 감정을 잠기게 하고, 번지게 하며, 무너뜨린다. 이 물의 이미지는 회화적으로 물감의 번짐, 채색의 확산, 화면의 침식으로 구체화된다. 그는 캔버스 위에 물감을 얹고, 번지고 흘러내리도록 방치하며, 그 과정을 통해 감정의 침식과 붕괴를 표현한다. 물은 그의 작업에서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감정의 외부 요인으로 기능한다. 사회적 압박, 관계의 상처, 경제적 불안은 모두 물의 형상으로 치환되어 화면을 잠식한다. 이때 실과 물은 서로 충돌한다. 실은 얽히고 버티려 하지만, 물은 그것을 잠식하고 흩뜨린다. 이 충돌의 긴장이 그의 작업을 살아 움직이게 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정재권이 이 두 이미지를 발명했다기보다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실과 물을 상징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그것을 포착했다. 그는 고통을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감정이 실처럼 얽히는 모습을 발견했고, 물처럼 감정을 덮치는 외부의 힘을 감각했다. 다시 말해, 실과 물은 그의 삶에서 추출된 언어다. 그렇기에 그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체험의 산물이다. 이 점에서 실과 물은 그의 작업에 있어 멘토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에게 새로운 시각적 언어를 가르쳐준 것은 이 추상적이지만 구체적인 이미지들이다.
이 시각적 언어의 발견은 그가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이전까지의 작업이 몰락과 실패의 기록이었다면, 실과 물의 발견 이후 그의 작업은 체계적 언어를 갖게 된다. 그는 단순히 감정을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감정을 선과 색으로 조직화한다. 이 조직화는 고통을 단순히 드러내는 것을 넘어, 고통을 이해하고 치유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예술은 이제 더 이상 고통의 결과물이 아니라, 고통을 분석하는 도구가 된다. 정재권의 붓질은 감정을 풀어헤치는 동시에, 그것을 직물처럼 다시 엮어내는 과정이 된다. 그에게 회화는 감정을 직조하는 행위다. 실로 짜인 인간 초상은 곧 그의 내면의 초상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그의 작업은 여전히 불안정하다. 실은 촘촘히 짜였다가도 작은 충격에 쉽게 풀려버리고, 물은 언제든 모든 것을 삼킬 수 있다. 그러나 이 불안정성이야말로 그의 작업의 본질이다. 안정된 구조나 완결된 형상이 아니라,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구조가 그의 작품을 특징짓는다. 이러한 불안정성은 현대인의 내면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누구나 감정의 실을 얽어가며 살아가지만, 작은 충격에도 그것은 풀리고 무너진다. 정재권은 바로 이 불안정성을 회화적 언어로 구현한다. 이 점에서 그의 작업은 단순한 자화상이 아니라, 동시대적 인간의 집단적 초상이다.
실과 물이라는 두 개의 언어는 또한 관객과의 소통 장치로 기능한다. 감정을 선적 터치로 표현하고, 물감의 번짐으로 불안을 구현하는 방식은 관객에게 즉각적인 감각을 전달한다. 관객은 그의 작품을 보며 곧바로 긴장과 불안을 체험한다. 이 체험은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다. 실과 물은 누구나 감각할 수 있는 보편적 경험이기 때문에, 그의 작업은 특정한 개인의 고백에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공감으로 확장된다. 이 지점에서 정재권의 발견은 단순한 개인적 발명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공유의 언어로 자리 잡는다. 그의 방 안에서 시작된 고통은 이제 관객과 함께 나누는 감각이 된다.
작업노트와 실제 작품을 함께 읽으면, 이 시각적 언어의 발견이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노트에서 감정을 실과 물로 치환하고, 작품에서 그것을 반복적 선과 번짐으로 구현한다. 이 언어는 점차 그의 작업 세계를 지탱하는 토대가 된다. 만약 초기의 작업이 무너짐과 몰락의 기록이었다면, 이제는 무너짐을 언어화하는 과정으로 변한다. 무너짐조차 하나의 형식으로 포섭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파괴가 아니다. 그것은 이해와 치유의 출발점이 된다. 정재권은 바로 이 과정을 통해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예술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발견은 추상표현주의 이후의 회화적 실험과도 연결된다. 잭슨 폴록이 드리핑 기법을 통해 무의식의 흐름을 시각화했다면, 정재권은 실과 물을 통해 감정의 흐름을 시각화한다. 그러나 그 차이는 분명하다. 폴록의 행위가 무의식의 자유로운 표출이라면, 정재권의 작업은 자기 고통을 치환하고 조직화하는 자기 분석적 과정이다. 즉, 그는 무의식의 자유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구조를 해부한다. 이 점에서 그의 작업은 더 내밀하고 심리학적이다. 실과 물은 곧 그의 심리학적 언어다.
정재권의 예술 세계에서 ‘멘토와 도구’는 외부의 인물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서 발견된 이미지들이다. 실과 물은 그에게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이자, 고통을 치유하는 멘토다. 그는 이 언어를 통해 자기 파괴와 몰락의 악순환에서 조금씩 벗어나, 새로운 회화적 길을 모색한다. 이 발견은 단순히 기법상의 발전이 아니라, 예술적 태도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제 그는 고통을 단순히 드러내는 데서 멈추지 않고, 고통을 분석하고 이해하며, 그것을 사회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언어로 전환한다. 이는 그의 작업이 개인적 고백에서 보편적 예술로 나아가는 전환점이다.
감정 직물의 해체
정재권의 회화 세계에서 감정은 단단히 짜여진 직물처럼 보인다. 선이 겹겹이 포개져 서로를 당기고 밀어내며, 마치 무언가를 보호하려는 듯 빈틈없이 화면을 채운다. 그러나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직물은 결코 완벽히 엮여 있지 않다. 실의 긴장은 조금만 흔들려도 끊어지고, 얽힘은 풀려 흩어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작업은 시련과 충돌의 국면에 진입한다. 실과 물, 감정과 외부, 자아와 타자 사이의 긴장은 단순한 균형이 아니라 끊임없는 해체와 재구성의 과정이다. 작품은 안정된 구조로 완성되기보다,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불안정한 직조물로 남는다.
작업노트에서 그는 “작은 충격에 터져 풀어지기도 한다”는 표현을 남겼다. 이는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그의 감정이 불안정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회화 속 직물은 얇은 실로 간신히 이어져 있을 뿐, 언제든 외부의 압력이나 내적 긴장으로 인해 무너질 수 있다. 이 불안정성은 그 자체로 시련이다. 감정을 실로 엮어 보존하려는 의지가 있는 동시에, 풀려나가고 해체되려는 충동이 함께 존재한다. 정재권의 화면은 바로 이 두 힘의 충돌을 담아낸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완결된 상태라기보다, 끊임없이 긴장 속에서 유지되는 과정의 기록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해체가 단순한 붕괴가 아니라는 점이다. 실이 풀려 흩어질 때, 그것은 무너짐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형상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실은 직조될 때 안정적 구조를 제공하지만, 풀릴 때는 새로운 얽힘과 만남을 준비한다. 정재권은 바로 이 모순적인 과정을 작품의 중심에 둔다. 해체는 파괴이자 생성이다. 그의 회화는 직물의 무너짐과 동시에 새로운 직조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이 이중적 과정이야말로 그의 작업을 긴장감 있게 만든다. 관객은 화면 속 선들이 언제 무너지고 언제 다시 얽힐지 알 수 없기에, 작품을 보는 순간마다 긴장과 몰입을 경험한다.
이 과정에서 ‘물’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감정의 직물을 잠식하는 물의 이미지는 그의 작업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물은 번지고, 스며들고, 흐르면서 실의 구조를 끊임없이 위협한다. 그러나 물은 단순히 파괴적인 힘만을 지니지 않는다. 번짐과 스며듦은 새로운 색채의 층위를 만들어내고, 실과 만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낸다. 즉, 물은 해체의 요인이자 동시에 생성의 자극제다. 정재권은 이 모순적 성질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는 물감의 번짐을 의도적으로 방치하면서, 그 안에서 우연적 형상을 포착한다. 이는 통제와 우연, 의지와 무력감이 뒤섞이는 과정이다. 작품은 그렇게 충돌과 시련을 시각적으로 체현한다.
관객이 그의 작업을 마주할 때 느끼는 불안은 바로 이 충돌에서 비롯된다. 선은 질서를 만들어내려 하고, 물은 그 질서를 무너뜨린다. 두 힘이 충돌하는 화면은 안정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흔들린다. 이 흔들림은 관객에게 심리적 긴장으로 다가온다. 안정된 조형미나 조화로운 구성을 기대하는 눈앞에, 언제든 풀려 무너질 듯한 화면이 놓인다. 이때 관객은 단순한 감상자가 아니라, 불안정한 감정 직물의 일시적 목격자가 된다. 그 경험은 미적 쾌락이 아니라, 체험적 긴장이다. 정재권의 작업은 바로 이 긴장을 통해 감정의 실체에 다가가게 한다.
시련과 충돌은 또한 작가 자신의 내적 갈등을 반영한다. 그는 감정을 실로 엮어 붙잡으려 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풀려나가는 과정을 외면하지 못한다. 붙잡으려는 의지와 무너짐을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충돌한다. 이 충돌은 작품 속에서 반복적 붓질과 번짐으로 구체화된다. 그에게 회화는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내적 갈등을 시각적으로 enact(연기)하는 행위다. 즉, 그는 화면 위에서 자기 자신과 싸우고, 시련을 경험한다. 관객은 그의 화면을 통해 그 싸움의 흔적을 함께 목격한다.
이 과정은 예술사적으로도 흥미로운 지점을 제공한다. 직물과 해체의 이미지는 미술에서 종종 사회적 은유로 쓰였다. 아나 알바르도르(Anni Albers)의 직조 작업이 사회적 구조와 질서의 은유였다면, 정재권의 실은 그 질서의 불안정성과 해체 가능성을 드러낸다. 즉, 그의 작업은 직조의 질서와 물의 무질서가 충돌하는 자리에서 사회적 불안을 드러낸다. 이는 곧 개인적 감정의 기록을 넘어, 동시대 사회의 불안정한 구조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은 공동체를 이어주지만, 물은 그 공동체를 잠식한다. 정재권의 화면은 바로 이 사회적 긴장을 압축적으로 시각화한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해체의 순간이 갖는 미묘한 아름다움이다. 감정의 직물이 풀려나갈 때 드러나는 선의 흐름, 물감이 번지며 만들어내는 우연한 색채의 층위는 파괴와 동시에 새로운 조형적 가능성을 낳는다. 정재권은 이 우연의 미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고통과 충돌 속에서도 새로운 형식적 언어를 길어 올린다. 그는 파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파괴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는 고통을 치유하는 방식이자, 예술적 실험의 핵심이다.
고통의 심연 직시
정재권의 작업노트와 작품을 함께 읽어내려가면, 그의 예술적 서사에서 가장 강렬하고도 두려운 장면에 도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고통의 심연을 직시하는 순간이다. 이전까지 그는 감정을 실로 엮고, 물로 잠기게 하며, 끊임없는 시련과 충돌 속에서 감정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과정은 하나의 절정으로 수렴한다. 감정의 직물이 풀려 해체되고, 물이 화면을 잠식해 올라오며, 자아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바로 이때, 그는 고통의 극한과 마주한다. “피와 고름에 잠겨 죽어버린 기억과 감정의 시체를 끄집어내어 펼쳐 놓고 관찰한다”는 작업노트의 진술은 그 극단적 순간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서 고통은 더 이상 상징적 이미지나 은유로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실제로 감각되고, 냄새가 나고, 시각적으로 확인되는 ‘시체’의 형태로 등장한다. 이 진술 속에는 고통을 단순히 미화하거나 예술적 언어로 덮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는 고통의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얼굴을 있는 그대로 끄집어낸다. 피와 고름은 부패와 상처의 흔적이며,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은 감정의 잔해다. 정재권은 이 끔찍한 잔해를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꺼내 펼쳐놓는다. 이는 일종의 해부 행위다. 그는 자기 감정을 해부대 위에 올려놓고,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들여다본다. 이 행위는 끔찍하지만, 동시에 필수적이다. 고통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을 직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마치 ‘죽음의 의례’와 같다. 죽음을 체험하는 것은 살아 있는 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정재권은 그 죽음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자발적으로 소환한다. 그는 작업을 통해 자기 내면의 죽음을 경험하고, 그 죽음을 기록한다. 이는 일종의 자기 장례식에 가깝다. 살아 있는 동안 스스로의 감정과 자아의 시체를 꺼내어 보고, 그것을 기록하는 행위. 그가 하는 작업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죽음을 체험하는 의례적 실천이다. 이 의례 속에서 그는 비로소 자신의 고통과 결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다.
이 절정의 순간은 그의 작품 속에서 집착적이고 격렬한 선적 터치로 구현된다. 선은 단순한 형태의 묘사가 아니라, 고통의 비명과 같다. 떨리는 손으로 그어진 선들은 마치 고통에 몸부림치는 흔적처럼 보인다. 겹겹이 쌓이고 찢어지듯 덧칠된 화면은 인간의 내면이 무너져 내리는 파국을 시각적으로 체현한다. 물감은 더 이상 색채가 아니라, 피와 고름을 닮은 물질이 된다. 번지고 얼룩지고, 때로는 응고된 물감은 죽은 감정의 잔해를 연상시킨다. 이처럼 그의 회화는 추상적이지만, 동시에 육체적이다. 관객은 화면 앞에서 단순히 색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체액과 맞닥뜨린다.
절정과 죽음의 경험은 관객에게도 불편함을 안겨준다. 이는 미적 쾌락의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심리적 압박의 체험이다. 작품 앞에 선 관객은 숨 막히는 긴장 속에서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고통과도 조우하게 된다. 정재권의 작품은 감상자를 안락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감상자의 방어막을 무너뜨리고, 그 안에 숨겨진 죽음의 기억을 소환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단순히 개인적 고백을 넘어, 관객 각자의 심연과 연결된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자신의 고통과 마주하는 불가피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작품은 단순한 시각적 오브제를 넘어, 심리적 사건이 된다.
이러한 극단적 체험은 예술사적 맥락에서 볼 때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많은 예술가들이 죽음과 고통을 다뤄왔지만, 정재권은 그것을 상징적 거리두기나 미학적 장치로 처리하지 않는다. 그는 고통을 실질적으로 직시하고, 그 잔해를 끄집어내며, 그것을 화면에 그대로 옮긴다. 이 점에서 그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인간 신체 해체 회화와도 닿아 있지만, 동시에 다른 차원을 가진다. 베이컨이 존재론적 불안을 형상화했다면, 정재권은 자기 고통의 잔해를 고백적으로 끄집어낸다. 그의 작업은 더 내밀하고 일기적이며, 개인적 죽음의 기록이다. 그렇기에 관객은 작품 앞에서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불안을 체험한다.
죽음의 경험은 또한 변화를 위한 전제다. 정재권의 작업에서 이 절정은 단순한 파국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위한 필수 과정이다. 그는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엿본다. 죽음을 직시하지 않고서는, 결코 새로움에 도달할 수 없다. 이 점에서 그의 작업은 단순한 절망의 기록이 아니라, 절망을 통과한 이후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는 죽음을 끝으로 두지 않고, 죽음을 통해 다시 생을 바라보는 길을 찾는다. 이 과정이 바로 그의 작업을 단순한 어둠의 기록에 머무르지 않게 한다.
정재권의 예술에서 절정과 죽음의 경험은 결국 생의 의지와 직결된다. 그는 작업노트에서 이렇게 적었다. “스스로 목을 조르는 삶에서도 이어가는 생의 의지, 절망의 공기 속에서도 이어갈 수 있는 생의 의지, 떨리는 손으로 붙잡고 이어가는 생의 의지.” 이 문장은 절망과 몰락의 끝에서 발견한 작은 빛과 같다. 그는 죽음을 체험한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 모순적 태도, 즉 죽음을 경험하면서도 생을 붙잡으려는 태도가 그의 작업을 가장 강렬하게 만든다. 고통은 그를 무너뜨리지만, 동시에 다시 일어나게 한다. 죽음은 그를 끝내지만, 동시에 새로운 생을 가능하게 한다.
생의 의지로서의 회화
정재권의 작업이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그것이 단순히 죽음과 고통의 기록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분명히 절망의 끝을 경험했다. 작업노트에는 피와 고름으로 얼룩진 감정의 시체가 등장하고, 화면은 붕괴된 자아와 무너진 감정의 잔해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은 끝내 하나의 출구를 마련한다. 그것은 바로 생의 의지다. 절망을 통과한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야 한다는 결심, 무너진 자아의 파편 속에서도 다시 붙잡을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태도가 그의 회화를 관통한다. 이 귀환과 변형의 국면에서, 정재권의 회화는 죽음의 기록에서 생의 선언으로 전환한다.
작업노트 속 구절 ― “스스로 목을 조르는 삶에서도 이어가는 생의 의지, 절망의 공기 속에서도 이어갈 수 있는 생의 의지, 떨리는 손으로 붙잡고 이어가는 생의 의지” ― 는 이 전환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반복되는 단어는 ‘의지’다. 그는 더 이상 감정의 파괴나 몰락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럼에도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언어로 기록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의지가 거창하거나 영웅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거대한 이상이나 목적이 아니라, 단지 ‘떨리는 손으로 붙잡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바로 그 미약하고 불안정한 태도가 그의 작업을 가장 강력하게 만든다. 생의 의지는 완벽한 힘이 아니라, 부서지기 쉬운 의지의 끈이다. 그는 바로 그 끈을 끝내 놓지 않는다.
회화 속에서도 이러한 변형은 뚜렷이 드러난다. 이전의 화면이 파괴와 해체에 몰두했다면, 이제 그의 화면에는 새로운 질서의 조짐이 나타난다. 감정의 실은 여전히 얽히고 풀리지만, 그것이 만들어내는 형상은 단순한 무너짐이 아니라, 새로운 직조를 향한 움직임이다. 물의 번짐 역시 더 이상 단순히 잠식과 붕괴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색채의 층위를 만들고, 우연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즉, 파괴적 힘이었던 물은 이제 창조적 자극으로 변한다. 정재권은 절망의 물질을 그대로 사용하되, 그것을 새로운 가능성의 재료로 삼는다. 이 과정에서 그의 회화는 단순한 몰락의 기록을 넘어, 변형의 서사를 획득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변형이 기적처럼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고통과 절망을 통과하는 과정을 통해 서서히 형성된다. 그는 죽음을 경험했기에, 비로소 생의 의지를 말할 수 있다. 죽음을 직시하지 않고는, 생의 가치도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고통과 죽음의 체험을 생의 변형으로 연결하는 순환적 구조를 가진다. 몰락과 절망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을 준비하는 통과 의례가 된다. 이 구조가 바로 그의 작업을 단순히 어둠의 기록으로 읽히지 않게 한다. 그는 죽음을 경험하고, 그 이후에 다시 세상으로 귀환한다.
귀환은 단순히 개인적 치유로만 머물지 않는다. 정재권은 자신의 고통을 작품으로 전환하면서, 그것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작품은 그의 개인적 내면의 기록이지만, 동시에 관객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장이 된다. 감정의 실과 물, 해체와 변형의 과정은 누구나 자신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보편적 감각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그의 작품을 보며 단순히 타인의 고통을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과도 마주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도 여전히 살아가야 한다’는 작은 의지를 발견한다. 정재권의 회화는 개인적 치유에서 시작해, 사회적 공감을 매개하는 장치로 변형된다. 이 지점에서 그의 예술은 자기 고백을 넘어, 공유된 생의 선언으로 확장된다.
그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귀환과 변형은 또한 예술 자체의 기능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예술은 단순히 미적 경험을 제공하는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고통을 직면하고, 그 고통을 치유하며,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다. 정재권의 작업은 이 기능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의 회화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직시하게 만들며,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단순한 회화적 실험을 넘어,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실존적 성찰이다. 그는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당신의 고통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예술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귀환과 변형의 과정은 고통과 절망을 다룬 많은 예술가들의 전통 속에 놓인다. 그러나 정재권의 작업은 그 전통 속에서도 독자적 위치를 점한다. 그는 고통을 극복하거나 초월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 속에 머물고, 그 안에서 미약한 생의 의지를 발견한다. 이는 고통을 승리나 영광의 서사로 바꾸지 않고, 고통 자체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바로 이 점이 그의 작업을 진실하게 만든다. 그는 관객에게 거창한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든 이어지는 미약한 삶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 가능성은 불안정하지만, 바로 그 불안정성 속에 인간 존재의 진실이 있다.
정재권의 회화는 결국, 고통을 담는 동시에 그것을 변형하는 장치다. 그의 화면은 절망의 흔적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그 위에 새로운 질서를 직조한다.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 태도가 바로 생의 의지로서의 회화다. 회화는 단순히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매체가 아니라,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게 하는 힘이 된다. 정재권의 작업은 이를 강렬하게 증명한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숨기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그것을 이해하고 치유하며, 동시에 관객에게도 새로운 삶의 의지를 건넨다.
사회적 확장
정재권의 회화는 개인적 체험에서 출발했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기 방 안에서 고통과 폐쇄의 시간을 겪고, 절망과 죽음을 직시한 이후, 그는 결국 세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 귀환은 단순히 일상의 회복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변형된 자아로서, 새로운 시각과 언어를 가지고 세계와 다시 관계 맺기를 시작하는 과정이다. 그의 회화는 바로 이 ‘귀환’을 보여준다. 방 안에 고립된 내면의 고통을 밖으로 흘려보내며, 그것을 작품으로 만들어 사회적 맥락 속에 놓는다. 결과적으로 그의 작업은 개인의 서사를 넘어, 동시대 사회와 공유할 수 있는 언어로 확장된다.
정재권의 작품이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그가 직면한 고통이 철저히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불안정한 노동 환경, 반복되는 관계의 실패, 자기혐오와 무력감, 쾌락과 중독의 악순환 ― 이러한 요소들은 단지 작가 개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이 경험하는 감각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특정한 개인의 고백이면서, 동시에 세대적 초상을 형상화한다. 관객은 그의 작품 앞에서 단순히 작가의 고통을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겪고 있는 시대적 조건을 목격한다. 이 지점에서 그의 회화는 사회적 확장을 획득한다.
특히 그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실과 물의 이미지는 개인의 감정을 넘어 사회적 상징으로 읽힌다. 실은 공동체와 관계, 사회적 네트워크를 은유할 수 있다. 그것은 서로를 엮고, 붙잡으며, 함께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그러나 그 실은 언제든 끊어지고 풀린다. 물은 외부로부터의 압박, 사회적 불안정, 감정을 잠식하는 구조적 조건을 상징한다. 이 두 이미지의 충돌은 개인의 내면을 넘어, 동시대 사회가 겪는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정재권의 화면은 결국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세계의 불안정한 직물을 보여준다. 이 직물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 시대의 집단적 불안을 압축적으로 체현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전시는 단순한 회화 감상의 자리가 아니라, 공감과 성찰의 장으로 기능한다. 관객은 작품 속에서 자신이 경험한 불안을 발견하고, 동시에 그것을 다른 이들과 공유한다. 전시 공간은 고통을 고백하는 장소이자, 고통을 함께 바라보는 공동체적 공간으로 변한다. 이는 단순한 미적 체험을 넘어, 사회적 의례와도 같다. 작품은 개인의 내밀한 기록이지만, 그것이 공개되는 순간 사회적 사건이 된다. 따라서 정재권의 귀환은 개인적 귀환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귀환으로 확장된다. 그의 작업은 고통을 사회 속에서 나눌 수 있는 언어로 바꿔놓는다.
정재권의 작업이 가지는 또 하나의 의미는, 그것이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다시 묻는다는 점이다. 예술은 오랫동안 미적 즐거움과 형식적 완결성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진다. 예술은 어떻게 고통을 다루는가? 예술은 어떻게 절망을 치유하는가? 그리고 예술은 어떻게 개인의 경험을 사회적 공감으로 전환하는가? 그의 회화는 바로 이 질문들에 대한 응답이다. 그는 고통을 은폐하지 않고 드러내며, 그것을 공유 가능한 언어로 변환한다. 예술은 이 과정을 통해 사회적 장치로 기능한다. 관객은 작품 앞에서 미적 쾌락을 넘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경험을 한다.
이 사회적 확장은 국제적 맥락에서도 읽힐 수 있다. 현대 미술은 이미 오랫동안 고통, 트라우마, 사회적 불안을 다루어왔다. 아이 웨이웨이(Ai Weiwei)가 정치적 억압을 작품화하고, 도리스 살세도(Doris Salcedo)가 사회적 상처를 설치미술로 드러낸 것처럼, 정재권 역시 개인적 고통을 사회적 서사로 확장한다. 그러나 그의 방식은 거대한 정치적 담론보다는, 더 내밀하고 개인적인 서사에서 출발한다. 그렇기에 그의 작업은 오히려 더 강력하게 공감된다. 거대한 정치적 메시지 대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면의 고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의 회화는 글로벌한 동시대 미술의 언어와도 호응하면서, 한국 사회 특유의 조건을 반영하는 독자성을 가진다.
정재권의 귀환은 결국, 예술이 사회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그의 회화는 단순히 작가의 내면을 드러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며, 집단적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미술관의 벽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다시 묻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회화는 개인의 고백에서 사회적 언어로, 그리고 다시 시대적 증언으로 확장된다.
결국 정재권의 예술에서 ‘새로운 세계로의 귀환’은 단순히 개인적 재기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언어로 변환된 예술의 힘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그는 고통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그것을 감각적 언어로 바꿔 공유한다. 이 과정에서 그의 회화는 단순히 개인의 서사가 아니라, 동시대 사회의 불안과 희망을 동시에 담는 매개가 된다. 관객은 그의 작업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인식하고, 그것을 다른 이들과 연결짓는다. 그렇게 그의 회화는 공감과 성찰의 장이자, 사회적 확장의 사건이 된다.
마지막으로, 그의 작업은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의 고통은 어떻게 전환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단순히 미학적 차원의 물음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이고 사회적인 물음이다. 정재권은 자신의 고통을 작품으로 전환했고, 이제는 관객 각자가 자기 고통을 어떻게 전환할지를 묻는다. 이 질문은 열린 채로 남으며, 작품은 끝내 완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미완의 상태가 예술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예술은 답을 제공하지 않고, 질문을 남긴다. 정재권의 회화는 바로 이 질문을 사회 속으로 던지는 행위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세상으로 돌아와 남긴 가장 큰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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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협회 아이테르 [ AITHER ] 부산전시관
아이테르 AI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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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어 나온 초상
정재권
2025.09.28. ~ 2025.10.04.
10:00 ~ 18:00
아이테르 범일가옥
AITHER (48737) 21, Beomil-ro 65beon-gil, Dong-gu, Bu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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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시는 한 인간이 폐쇄와 단절의 방을 넘어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서사를 이야기한다. 그 여정에서 발생하는 내면의 고통과 불안을 강렬한 색채를 지닌 시각적 언어로 표현한다. 오래된 가옥의 공간은 인간 내면의 방이 되고, 방을 채우고 있던 물질들이 외부 세계로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위태로운 돈과 직업의 세계에서 자신의 무능을 통감하며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인간 관계에 대한 염증과 반복되는 사랑의 실패로 깊은 자기혐오와 외로움에 빠져, 의미 없는 쾌락에 중독되어 스스로를 위로하고 안주하는 폐쇄와 단절의 방 안에서, 예민하고 나약한 자아는 곳곳이 무너지고 죽어버렸다.”
작가는 ‘고통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함께, 스스로 저질러 온 자기파괴에 대한 죄의식을 회상하고 고백한다. 피와 고름에 잠겨 죽어버린 기억과 감정의 시체를 끄집어내어 펼쳐 놓고 관찰한다. 이는 부정적인 감정의 존재를 인식하고, 감정과 그에 지배당하는 자아를 분리하고, 과거의 고통을 추상적 자화상으로 변환하는 과정의 기록이다.
“기억과 감정들은 휩쓸리고 잠겨 죽었어도, 함께 죽어가지는 말자.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니까.”
작품은 내면의 고통을 감정의 ‘실’로 치환하여 표현한다. 이 실과 같은 감정의 가닥으로 짜인 직물 인간의 초상은 여유 없이 촘촘하게 짜여 있기도 하고, 때로는 작은 충격에 터져 풀어지기도 한다. 이 끊임없이 자라나고 흩어지는 감정의 해체를 집착적인 선적 터치로 표현한다. 감정을 잠기게 하여 번지고 무너지게 하는 외부 요인은 ‘물’의 이미지로, 숨 막히도록 턱 끝까지 차오른 깊은 우울과 불안을 표현한다.
“스스로 목을 조르는 삶에서도 이어가는 생의 의지,
절망의 공기 속에서도 이어갈 수 있는 생의 의지,
떨리는 손으로 붙잡고 이어가는 생의 의지.”
작가가 고통을 작품에 담는 것은, 동시에 그것을 치유하고 이해하는 과정이다. 스스로 만들어 낸 고통과 악몽의 방 안에 갇혀있었던 한 인간이 조금씩 세상 밖으로 새어 나오듯이 모습을 드러내는 서사를 표현한다. 작품은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새로운 시각과 성장의 흔적을 제시하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할 수 있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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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직시에서 생의 의지로
미술감독 공명성
방 안에 갇힌 개인
정재권의 작업노트에서 가장 먼저 두드러지는 것은 ‘방’이라는 은유적 공간이다. 이 방은 단순한 생활의 공간이 아니라, 폐쇄와 단절의 상태를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장소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둘러싼 사회적 불안, 관계의 상처, 직업적 불안정성, 사랑의 반복적 실패를 이 방에 가둬두었다. 마치 외부와의 모든 접촉을 끊어버린 듯한 이 폐쇄된 공간은 곧 인간 내면의 심리적 감옥이 된다. 그는 이 안에서 스스로 목을 조르며, 자기혐오와 무력감 속에 깊이 침잠한다. 작업노트의 문장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위태로운 돈과 직업의 세계에서 자신의 무능을 통감하며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인간 관계에 대한 염증과 반복되는 사랑의 실패로 깊은 자기혐오와 외로움에 빠져…”라는 고백은 단순히 개인의 심정을 넘어선다. 이는 동시대 사회가 구조적으로 만들어낸 불안정 노동, 파편화된 인간관계, 감정 자본의 고갈이 한 개인의 심리와 신체에 새겨진 흔적이자, 현대인의 보편적 결핍을 집약한다.
작가는 이러한 결핍을 단지 말로만 표현하지 않는다. 그는 색채와 재료를 통해 결핍의 무게를 시각화한다. 그의 초기 작업에서 보이는 강렬한 색채는 단순한 미학적 선택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불안을 폭발시키는 장치다. 원색의 충돌, 물감의 번짐, 캔버스를 찢고 나오는 듯한 선들은 모두 억눌린 감정의 압력을 드러낸다. 그에게 있어 물감은 단순한 표현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를 파괴하고 치유하는 ‘자해적’ 매체다. 방 안에서 소리 없이 무너지는 자아의 파편들이 캔버스 위에 응고되고 흘러내리며, 그것이 바로 결핍의 형태학이 된다. 그는 방 안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해체하고, 그 조각들을 재료로 전환한다. 이때의 방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작업의 원형질이자 내면의 결핍을 직시하는 실험실이다.
결핍은 단지 외부의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정재권은 자기파괴적 행위를 반복하며 그 결핍을 스스로 강화한다. 의미 없는 쾌락에 중독되어 스스로를 위로하고 안주하는 과정은 곧 결핍의 자기 생산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결핍이 단순히 부정적으로만 남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 결핍이야말로 창작의 동력이자 작업을 추진하는 원천이 된다. 그는 고통을 단순히 회피하거나 덮어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고통을 ‘작품화’함으로써 마주하려 한다. 이는 일종의 자기 고백적 예술이면서 동시에 자기 해체적 예술이다. 결핍을 가시화하고, 결핍을 통해 존재를 증명하려는 몸부림은 동시대 미술에서 중요한 윤리적 태도로 읽힌다.
그의 작업에서 가옥이라는 공간적 조건은 단순한 물리적 배경이 아니라, 내면의 방을 외부화한 장치다. 오래된 가옥은 시간이 켜켜이 쌓인 장소로서, 과거의 흔적과 균열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이 장소는 인간 내면의 상처와 결핍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벽의 균열, 낡은 바닥, 어두운 조명은 작가의 내적 고통을 시각적으로 중첩시킨다. 따라서 전시 공간 자체가 결핍의 은유가 되고, 관객은 단순히 작품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결핍이 응축된 공간 속에 들어서게 된다. 이는 미술사적으로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전통적 회화가 캔버스라는 평면에 감정을 담았다면, 정재권의 작업은 공간 전체를 감정의 장치로 전환한다. 그는 장소와 회화를 결합하여, 결핍을 다층적으로 경험하게 만든다.
결핍의 핵심은 결국 자아의 붕괴다. 작업노트에서 그는 “예민하고 나약한 자아는 곳곳이 무너지고 죽어버렸다”고 적는다. 이는 단순히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 삶의 경험에서 비롯된 진술이다. 그에게 예술은 무너진 자아를 복원하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무너진 자아의 파편들을 직시하고, 그것을 드러내어 관객과 공유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그는 자아를 재건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자아의 파괴 과정을 시각화하며, 그 속에서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고통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 질문은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이다.
이 결핍의 기록은 단순한 개인의 경험을 넘어, 동시대 사회적 맥락과 깊게 연결된다. 불안정 노동, 도시의 재개발, 인간관계의 파편화, 감정 자본의 소비와 고갈은 모두 현대 한국 사회에서 흔히 목격되는 풍경이다. 정재권의 방 안은 바로 이 사회적 조건들의 집약체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내밀하게 기록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시대적 결핍을 드러낸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자기 고백적이면서도, 사회적이다. 개인의 방은 곧 시대의 방이 된다. 관객은 그의 방 안에서 자신의 결핍을 발견하고, 그의 고통 속에서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본다.
결국 정재권의 작업에서 결핍은 부정적 상태로만 남지 않는다. 그것은 작품을 생성하는 원동력이며, 새로운 시각적 언어를 만들어내는 동기다. 결핍이 없다면, 그의 작업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결핍을 부끄러움이나 약점으로 감추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드러내고 응시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예술로 전환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결핍은 단순히 개인의 상처가 아니라, 예술적 실천의 시작점이 된다. 결핍에서 출발한 작업은 곧 고통을 미학으로 전환하는 서사의 첫걸음이 된다.
고통을 표현하려는 시도
정재권의 작업노트에서 발견되는 두 번째 축은, 그가 단순히 고통 속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려는 시도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자기 파괴와 폐쇄의 방 안에 갇힌 채 고립된 인간은 끝내 그 안에서만 존재할 수 없다. 고통은 언젠가 외부로 새어나오며, 언어와 형상을 필요로 한다. 작가는 바로 이 지점에서 회화라는 도구를 붙잡는다. 여기서 회화는 단순히 미적 표현의 수단이 아니라, 자기 고백과 자기 구원의 매개다. 그는 고통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색과 선으로 전환함으로써, 고통을 감내하는 방식에서 고통을 객체화하고 응시하는 방식으로 옮겨간다. 이 변화의 순간이 곧 그가 직면한 ‘낯선 세계로의 부름’이다.
작업노트에는 이러한 전환의 흔적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죽어버린 기억과 감정의 시체를 끄집어내어 펼쳐 놓고 관찰한다”고 썼다. 이 진술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과거를 재료로 삼겠다는 선언이다. 죽은 감정의 시체를 꺼내어 보는 행위는 고통을 다시 경험하는 잔혹한 과정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관찰한다는 말 속에는 이미 거리를 두려는 태도가 담겨 있다. 즉, 그는 자기 감정의 포로가 되는 대신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이 ‘관찰’의 태도가 곧 표현의 첫걸음이다. 여기서 그는 고통의 주체에서, 고통을 표현하는 주체로 이동한다. 이는 그 자체로 중요한 예술적 결단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전환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다. 고통을 시각적 언어로 옮긴다는 것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한다. 회화는 감정을 완전히 담아낼 수 없고, 오히려 왜곡하거나 과장할 수 있다. 작가는 이 한계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언어적 진술과 시각적 언어를 병행한다. 작업노트가 곧 그의 회화의 밑그림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어로 먼저 자기 감정을 진술하고, 그것을 다시 시각적으로 번역하는 과정은 마치 이중의 고백과 같다. 관객이 마주하는 회화는 단순한 시각적 이미지가 아니라, 언어와 경험이 중첩된 서사의 흔적이다. 이 지점에서 정재권의 회화는 단순한 형상 이상의 것, 곧 내면의 기록으로 자리 잡는다.
그의 시도는 또한, 고통을 감각적으로 ‘재현’하는 대신 ‘치환’하려는 전략으로 읽힌다. 그는 고통을 선과 색으로, 감정을 ‘실’과 ‘물’의 이미지로 변환한다. 감정의 실은 얽히고, 풀리고, 끊어지고, 다시 엮이면서 불안정한 인간 초상을 만들어낸다. 이는 곧 그의 내면이 어떻게 무너지고 재구성되는지를 보여주는 은유적 장치다. 물의 이미지는 감정을 잠식하는 외부 요인의 역할을 한다. 번져나가고, 흘러내리고, 잠식하는 물은 고통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며, 숨 막히도록 압박한다. 그러나 바로 이 물의 이미지가 회화적 실험의 동력이 된다. 그는 물감의 번짐, 재료의 확산, 색채의 침투를 통해 감정의 무너짐을 형상화한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작업은 재현이라기보다 감정의 과정 자체를 구현하는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은 동시에 작가에게 두려움과 저항을 안겨준다. 고통을 드러내려는 충동은 곧 자기 자신을 낯선 시선 앞에 노출하는 행위다. 폐쇄의 방 안에서 고통을 은닉하던 그가, 그것을 드러내려 할 때 맞닥뜨리는 것은 낯선 세계의 응시다. 관객이라는 타자, 혹은 사회라는 타자 앞에 자신의 고통을 내놓는 일은 그 자체로 잔혹한 고백이다. 여기서 그는 고통을 다시 한 번 경험하고, 때로는 고통의 강도가 증폭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이 두려움과 저항이야말로, 그가 예술가로서 나아가는 길을 규정한다. 낯선 세계로의 부름은 언제나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언어에 도달할 수 없다.
정재권의 시도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가 이 과정을 개인적 치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회화는 개인의 고통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을 보편적 감각으로 전환한다. 감정을 실과 물로 치환하는 방식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상징을 만든다. 관객은 그의 캔버스를 보며 ‘저것은 나의 감정일 수도 있다’고 느낀다. 즉, 그는 개인적 서사를 사회적 감각으로 확장한다. 여기서 그의 시도는 자기 고백을 넘어, 타자와의 관계 맺기로 이어진다. 방 안에서 홀로 반복되던 고통이, 표현을 통해 사회적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작가는 비로소 낯선 세계에 발을 내딛는다.
이러한 시도는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정재권의 회화는 20세기 추상표현주의나 신표현주의가 강조했던 ‘내면의 폭발’을 연상시키지만, 그것과는 다른 차이를 가진다. 그는 단순히 감정을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치환하고 구조화한다. 즉, 감정을 재료와 기법으로 번역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 고백을 하나의 언어 체계로 만든다. 이는 그의 작업이 단순한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감정의 언어학으로 읽혀야 함을 보여준다. 낯선 세계로의 부름은 단순히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언어를 발명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정재권의 시도는 또한, ‘왜 예술을 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맞닿는다. 그는 예술을 통해 고통을 치유하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영속화하고 기록한다. 치유와 기록은 서로 상반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를 보완한다. 치유하려면 먼저 고통을 드러내야 하고, 드러낸 고통은 기록으로 남는다. 예술은 이 모순적 과정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단순히 개인적 구원의 서사가 아니라, 인간 존재가 고통을 어떻게 다루고 전환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사유다. 여기서 예술은 단순히 미적 즐거움이 아니라, 존재론적 실천이 된다.
결국, 정재권의 작업에서 ‘낯선 세계로의 부름’은 두 가지 층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개인적 차원에서는 자기 고통을 작품으로 드러내려는 결단이다. 둘째, 사회적 차원에서는 그 고통을 공유 가능한 언어로 전환하려는 시도다. 그는 고통을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단순히 자기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감각으로 확장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하고, 폐쇄와 단절의 방 안에서 세상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내딛는다. 바로 이 순간이 그의 예술 세계가 시작되는 진정한 출발점이다.
자기 파괴와 몰락
정재권의 작업노트를 따라가다 보면, 그는 고통을 표현하려는 강렬한 충동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곧바로 그것을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는 여러 차례 자신을 파괴하거나 고통을 회피하며, ‘표현의 길’ 앞에서 주저하고 거부한다. 이러한 저항은 단순한 의지 부족이나 나약함이 아니라, 고통을 드러내는 행위 자체가 갖는 위험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고통을 표현한다는 것은 곧 그 고통을 다시 마주하고, 타자의 시선에 노출시키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자기혐오와 불안, 두려움에 압도되며, 스스로를 몰락으로 몰아넣는 모순적 행위를 반복한다.
작업노트에는 이러한 자멸적 경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는 “의미 없는 쾌락에 중독되어 스스로를 위로하고 안주하는 폐쇄와 단절의 방 안에서, 예민하고 나약한 자아는 곳곳이 무너지고 죽어버렸다”고 적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쾌락이 단순히 즐거움이 아니라 도피의 장치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고통을 직면하기보다는, 순간적 쾌락에 몸을 맡김으로써 자기 존재를 잊으려는 태도. 그러나 이러한 도피는 곧 더 깊은 자기혐오로 이어진다. 순간의 위안은 곧 무력감과 죄책감으로 바뀌고, 그것은 다시 자아를 무너뜨린다. 결과적으로 그는 고통을 피하려다 더 큰 고통을 자초한다. 이 자기 파괴의 반복이 바로 그의 예술 이전의 삶을 규정한다.
예술가로서의 정재권이 흥미로운 지점은, 이 몰락조차 작업의 일부로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나약함과 자기 파괴적 습관을 숨기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드러내고,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으려 한다. 이는 전통적인 영웅 서사와는 다른, 반(反)영웅적 태도다. 많은 예술가들이 고통을 승화시키며 자기 강인함을 강조했다면, 정재권은 오히려 무너지고 실패하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 작업노트와 회화는 바로 이 실패의 흔적이다. 그의 선과 색은 강렬하지만, 그 강렬함 속에는 무너짐과 허약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는 단순한 ‘강한 표현’이 아니라, 몰락을 드러내는 정직한 기록이다.
이러한 저항과 몰락의 과정은 작품 속 형식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의 회화에는 종종 구조가 무너지고, 구성이 붕괴되는 지점이 발견된다. 촘촘히 짜인 선들이 갑작스럽게 풀려 버리거나, 형상이 흐릿하게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 있다. 이는 단순히 기법상의 실수가 아니라, 작가의 내적 저항이 외부로 드러난 흔적이다. 그는 작품을 완결된 구조로 유지하기보다, 무너짐 자체를 드러내는 방식을 택한다. 이러한 불안정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을 안정적으로 감상하지 못하게 한다. 관객은 언제든 붕괴할 것 같은 화면 앞에서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바로 이 불안정성이 정재권의 작업을 독특하게 만든다. 몰락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미학적 전략으로 전화된다.
그러나 몰락은 언제나 파괴적인 것만은 아니다. 정재권에게 몰락은 자기 성찰의 통로이기도 하다. 그는 몰락을 통해 고통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나는 왜 반복적으로 무너지는가? 고통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라는 질문이 여기서 발생한다. 몰락은 질문을 생성하는 계기이며, 바로 그 질문이 그의 작업을 밀어붙인다. 즉, 몰락은 창작의 중단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 그는 실패 속에서 다시 붓을 들고, 무너진 감정의 잔해 속에서 다시 선을 긋는다. 따라서 몰락은 단순한 자기 파괴가 아니라, 창작의 리듬을 형성한다. 무너짐과 재시도의 반복이 그의 작업의 심장 박동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정재권의 몰락이 철저히 자기 고백적이라는 점이다. 그는 고통을 미화하거나 상징으로만 처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업노트의 직접적이고 날카로운 문장들을 통해 자신의 나약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정직함은 그의 작업이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실제 삶의 경험에 뿌리내려 있음을 증명한다. 동시에 이 정직함은 관객에게도 불편함을 안긴다. 관객은 그의 작품 앞에서 미적 즐거움보다는 불안과 긴장을 경험한다. 이는 관객이 그의 몰락을 단순히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체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관객을 몰락의 공범으로 끌어들인다. 관객은 그 앞에서 자기 자신의 나약함과도 마주하게 된다.
예술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전략은 자기 고백적 예술의 전통과 닿아 있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인간 존재의 파괴된 신체를 통해 불안한 실존을 드러냈다면, 정재권은 자기 감정의 파괴를 통해 불안한 내면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베이컨의 극적 왜곡이나 공포의 이미지와 달리, 더 개인적이고 일기적인 성격을 띤다. 그는 예술을 거대한 선언이 아니라, 자기 고백의 장으로 만든다. 이 점에서 그는 오히려 현대 한국 사회의 불안정한 청년 세대와 맞닿아 있다. 자기 파괴와 몰락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적 조건이기도 하다. 불안정 노동, 끊어진 사회적 관계, 무너진 안전망 속에서 살아가는 세대가 공유하는 감각이 바로 몰락이다. 정재권의 몰락은 이 세대의 몰락을 대변한다.
이렇듯, 정재권의 작업에서 ‘거부와 저항’은 고통을 드러내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다. 그는 고통을 표현하려는 순간, 동시에 그것을 피하려 하고 거부한다. 이 모순적 행위가 바로 그의 작업을 긴장 속에 놓이게 만든다. 몰락은 파괴적이지만, 동시에 창작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다. 그는 몰락 속에서 다시 일어나려 하고, 무너짐 속에서 다시 그린다. 따라서 거부와 저항은 단순한 후퇴가 아니라,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통과 의례다. 몰락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그는 고통을 진실하게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시각적 언어의 발견
정재권의 작업노트를 세밀히 들여다보면, 절망과 몰락의 반복 속에서도 끊임없이 등장하는 한 가지 단어가 있다. 바로 **‘실’**이다. 감정의 실, 기억의 실, 고통의 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감정의 가닥으로 치환하여 서술한다. 실은 서로 엮이고, 풀리고, 끊어지며, 인간 초상을 직조한다. 이는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그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핵심적인 언어다. 그는 붓질을 통해 끊임없이 선을 긋고, 그 선들이 얽히고 풀리며 화면을 채운다. 선의 집착적인 반복은 감정을 실로 바꾸는 과정이다. 이 집착의 흔적이 곧 그의 작업을 지탱하는 회화적 도구다. 정재권에게 선은 단순한 형상이 아니라, 감정을 물질화하는 매개다.
이 실과 함께 중요한 또 하나의 장치는 **‘물’**의 이미지다. 작업노트에서 그는 깊은 우울과 불안을 “턱 끝까지 차오르는 물”로 묘사한다. 물은 감정을 잠기게 하고, 번지게 하며, 무너뜨린다. 이 물의 이미지는 회화적으로 물감의 번짐, 채색의 확산, 화면의 침식으로 구체화된다. 그는 캔버스 위에 물감을 얹고, 번지고 흘러내리도록 방치하며, 그 과정을 통해 감정의 침식과 붕괴를 표현한다. 물은 그의 작업에서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감정의 외부 요인으로 기능한다. 사회적 압박, 관계의 상처, 경제적 불안은 모두 물의 형상으로 치환되어 화면을 잠식한다. 이때 실과 물은 서로 충돌한다. 실은 얽히고 버티려 하지만, 물은 그것을 잠식하고 흩뜨린다. 이 충돌의 긴장이 그의 작업을 살아 움직이게 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정재권이 이 두 이미지를 발명했다기보다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실과 물을 상징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그것을 포착했다. 그는 고통을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감정이 실처럼 얽히는 모습을 발견했고, 물처럼 감정을 덮치는 외부의 힘을 감각했다. 다시 말해, 실과 물은 그의 삶에서 추출된 언어다. 그렇기에 그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체험의 산물이다. 이 점에서 실과 물은 그의 작업에 있어 멘토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에게 새로운 시각적 언어를 가르쳐준 것은 이 추상적이지만 구체적인 이미지들이다.
이 시각적 언어의 발견은 그가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이전까지의 작업이 몰락과 실패의 기록이었다면, 실과 물의 발견 이후 그의 작업은 체계적 언어를 갖게 된다. 그는 단순히 감정을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감정을 선과 색으로 조직화한다. 이 조직화는 고통을 단순히 드러내는 것을 넘어, 고통을 이해하고 치유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예술은 이제 더 이상 고통의 결과물이 아니라, 고통을 분석하는 도구가 된다. 정재권의 붓질은 감정을 풀어헤치는 동시에, 그것을 직물처럼 다시 엮어내는 과정이 된다. 그에게 회화는 감정을 직조하는 행위다. 실로 짜인 인간 초상은 곧 그의 내면의 초상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그의 작업은 여전히 불안정하다. 실은 촘촘히 짜였다가도 작은 충격에 쉽게 풀려버리고, 물은 언제든 모든 것을 삼킬 수 있다. 그러나 이 불안정성이야말로 그의 작업의 본질이다. 안정된 구조나 완결된 형상이 아니라,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구조가 그의 작품을 특징짓는다. 이러한 불안정성은 현대인의 내면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누구나 감정의 실을 얽어가며 살아가지만, 작은 충격에도 그것은 풀리고 무너진다. 정재권은 바로 이 불안정성을 회화적 언어로 구현한다. 이 점에서 그의 작업은 단순한 자화상이 아니라, 동시대적 인간의 집단적 초상이다.
실과 물이라는 두 개의 언어는 또한 관객과의 소통 장치로 기능한다. 감정을 선적 터치로 표현하고, 물감의 번짐으로 불안을 구현하는 방식은 관객에게 즉각적인 감각을 전달한다. 관객은 그의 작품을 보며 곧바로 긴장과 불안을 체험한다. 이 체험은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다. 실과 물은 누구나 감각할 수 있는 보편적 경험이기 때문에, 그의 작업은 특정한 개인의 고백에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공감으로 확장된다. 이 지점에서 정재권의 발견은 단순한 개인적 발명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공유의 언어로 자리 잡는다. 그의 방 안에서 시작된 고통은 이제 관객과 함께 나누는 감각이 된다.
작업노트와 실제 작품을 함께 읽으면, 이 시각적 언어의 발견이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노트에서 감정을 실과 물로 치환하고, 작품에서 그것을 반복적 선과 번짐으로 구현한다. 이 언어는 점차 그의 작업 세계를 지탱하는 토대가 된다. 만약 초기의 작업이 무너짐과 몰락의 기록이었다면, 이제는 무너짐을 언어화하는 과정으로 변한다. 무너짐조차 하나의 형식으로 포섭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파괴가 아니다. 그것은 이해와 치유의 출발점이 된다. 정재권은 바로 이 과정을 통해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예술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발견은 추상표현주의 이후의 회화적 실험과도 연결된다. 잭슨 폴록이 드리핑 기법을 통해 무의식의 흐름을 시각화했다면, 정재권은 실과 물을 통해 감정의 흐름을 시각화한다. 그러나 그 차이는 분명하다. 폴록의 행위가 무의식의 자유로운 표출이라면, 정재권의 작업은 자기 고통을 치환하고 조직화하는 자기 분석적 과정이다. 즉, 그는 무의식의 자유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구조를 해부한다. 이 점에서 그의 작업은 더 내밀하고 심리학적이다. 실과 물은 곧 그의 심리학적 언어다.
정재권의 예술 세계에서 ‘멘토와 도구’는 외부의 인물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서 발견된 이미지들이다. 실과 물은 그에게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이자, 고통을 치유하는 멘토다. 그는 이 언어를 통해 자기 파괴와 몰락의 악순환에서 조금씩 벗어나, 새로운 회화적 길을 모색한다. 이 발견은 단순히 기법상의 발전이 아니라, 예술적 태도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제 그는 고통을 단순히 드러내는 데서 멈추지 않고, 고통을 분석하고 이해하며, 그것을 사회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언어로 전환한다. 이는 그의 작업이 개인적 고백에서 보편적 예술로 나아가는 전환점이다.
감정 직물의 해체
정재권의 회화 세계에서 감정은 단단히 짜여진 직물처럼 보인다. 선이 겹겹이 포개져 서로를 당기고 밀어내며, 마치 무언가를 보호하려는 듯 빈틈없이 화면을 채운다. 그러나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직물은 결코 완벽히 엮여 있지 않다. 실의 긴장은 조금만 흔들려도 끊어지고, 얽힘은 풀려 흩어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작업은 시련과 충돌의 국면에 진입한다. 실과 물, 감정과 외부, 자아와 타자 사이의 긴장은 단순한 균형이 아니라 끊임없는 해체와 재구성의 과정이다. 작품은 안정된 구조로 완성되기보다,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불안정한 직조물로 남는다.
작업노트에서 그는 “작은 충격에 터져 풀어지기도 한다”는 표현을 남겼다. 이는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그의 감정이 불안정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회화 속 직물은 얇은 실로 간신히 이어져 있을 뿐, 언제든 외부의 압력이나 내적 긴장으로 인해 무너질 수 있다. 이 불안정성은 그 자체로 시련이다. 감정을 실로 엮어 보존하려는 의지가 있는 동시에, 풀려나가고 해체되려는 충동이 함께 존재한다. 정재권의 화면은 바로 이 두 힘의 충돌을 담아낸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완결된 상태라기보다, 끊임없이 긴장 속에서 유지되는 과정의 기록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해체가 단순한 붕괴가 아니라는 점이다. 실이 풀려 흩어질 때, 그것은 무너짐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형상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실은 직조될 때 안정적 구조를 제공하지만, 풀릴 때는 새로운 얽힘과 만남을 준비한다. 정재권은 바로 이 모순적인 과정을 작품의 중심에 둔다. 해체는 파괴이자 생성이다. 그의 회화는 직물의 무너짐과 동시에 새로운 직조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이 이중적 과정이야말로 그의 작업을 긴장감 있게 만든다. 관객은 화면 속 선들이 언제 무너지고 언제 다시 얽힐지 알 수 없기에, 작품을 보는 순간마다 긴장과 몰입을 경험한다.
이 과정에서 ‘물’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감정의 직물을 잠식하는 물의 이미지는 그의 작업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물은 번지고, 스며들고, 흐르면서 실의 구조를 끊임없이 위협한다. 그러나 물은 단순히 파괴적인 힘만을 지니지 않는다. 번짐과 스며듦은 새로운 색채의 층위를 만들어내고, 실과 만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낸다. 즉, 물은 해체의 요인이자 동시에 생성의 자극제다. 정재권은 이 모순적 성질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는 물감의 번짐을 의도적으로 방치하면서, 그 안에서 우연적 형상을 포착한다. 이는 통제와 우연, 의지와 무력감이 뒤섞이는 과정이다. 작품은 그렇게 충돌과 시련을 시각적으로 체현한다.
관객이 그의 작업을 마주할 때 느끼는 불안은 바로 이 충돌에서 비롯된다. 선은 질서를 만들어내려 하고, 물은 그 질서를 무너뜨린다. 두 힘이 충돌하는 화면은 안정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흔들린다. 이 흔들림은 관객에게 심리적 긴장으로 다가온다. 안정된 조형미나 조화로운 구성을 기대하는 눈앞에, 언제든 풀려 무너질 듯한 화면이 놓인다. 이때 관객은 단순한 감상자가 아니라, 불안정한 감정 직물의 일시적 목격자가 된다. 그 경험은 미적 쾌락이 아니라, 체험적 긴장이다. 정재권의 작업은 바로 이 긴장을 통해 감정의 실체에 다가가게 한다.
시련과 충돌은 또한 작가 자신의 내적 갈등을 반영한다. 그는 감정을 실로 엮어 붙잡으려 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풀려나가는 과정을 외면하지 못한다. 붙잡으려는 의지와 무너짐을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충돌한다. 이 충돌은 작품 속에서 반복적 붓질과 번짐으로 구체화된다. 그에게 회화는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내적 갈등을 시각적으로 enact(연기)하는 행위다. 즉, 그는 화면 위에서 자기 자신과 싸우고, 시련을 경험한다. 관객은 그의 화면을 통해 그 싸움의 흔적을 함께 목격한다.
이 과정은 예술사적으로도 흥미로운 지점을 제공한다. 직물과 해체의 이미지는 미술에서 종종 사회적 은유로 쓰였다. 아나 알바르도르(Anni Albers)의 직조 작업이 사회적 구조와 질서의 은유였다면, 정재권의 실은 그 질서의 불안정성과 해체 가능성을 드러낸다. 즉, 그의 작업은 직조의 질서와 물의 무질서가 충돌하는 자리에서 사회적 불안을 드러낸다. 이는 곧 개인적 감정의 기록을 넘어, 동시대 사회의 불안정한 구조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은 공동체를 이어주지만, 물은 그 공동체를 잠식한다. 정재권의 화면은 바로 이 사회적 긴장을 압축적으로 시각화한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해체의 순간이 갖는 미묘한 아름다움이다. 감정의 직물이 풀려나갈 때 드러나는 선의 흐름, 물감이 번지며 만들어내는 우연한 색채의 층위는 파괴와 동시에 새로운 조형적 가능성을 낳는다. 정재권은 이 우연의 미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고통과 충돌 속에서도 새로운 형식적 언어를 길어 올린다. 그는 파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파괴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는 고통을 치유하는 방식이자, 예술적 실험의 핵심이다.
고통의 심연 직시
정재권의 작업노트와 작품을 함께 읽어내려가면, 그의 예술적 서사에서 가장 강렬하고도 두려운 장면에 도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고통의 심연을 직시하는 순간이다. 이전까지 그는 감정을 실로 엮고, 물로 잠기게 하며, 끊임없는 시련과 충돌 속에서 감정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과정은 하나의 절정으로 수렴한다. 감정의 직물이 풀려 해체되고, 물이 화면을 잠식해 올라오며, 자아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바로 이때, 그는 고통의 극한과 마주한다. “피와 고름에 잠겨 죽어버린 기억과 감정의 시체를 끄집어내어 펼쳐 놓고 관찰한다”는 작업노트의 진술은 그 극단적 순간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서 고통은 더 이상 상징적 이미지나 은유로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실제로 감각되고, 냄새가 나고, 시각적으로 확인되는 ‘시체’의 형태로 등장한다. 이 진술 속에는 고통을 단순히 미화하거나 예술적 언어로 덮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는 고통의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얼굴을 있는 그대로 끄집어낸다. 피와 고름은 부패와 상처의 흔적이며,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은 감정의 잔해다. 정재권은 이 끔찍한 잔해를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꺼내 펼쳐놓는다. 이는 일종의 해부 행위다. 그는 자기 감정을 해부대 위에 올려놓고,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들여다본다. 이 행위는 끔찍하지만, 동시에 필수적이다. 고통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을 직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마치 ‘죽음의 의례’와 같다. 죽음을 체험하는 것은 살아 있는 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정재권은 그 죽음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자발적으로 소환한다. 그는 작업을 통해 자기 내면의 죽음을 경험하고, 그 죽음을 기록한다. 이는 일종의 자기 장례식에 가깝다. 살아 있는 동안 스스로의 감정과 자아의 시체를 꺼내어 보고, 그것을 기록하는 행위. 그가 하는 작업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죽음을 체험하는 의례적 실천이다. 이 의례 속에서 그는 비로소 자신의 고통과 결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다.
이 절정의 순간은 그의 작품 속에서 집착적이고 격렬한 선적 터치로 구현된다. 선은 단순한 형태의 묘사가 아니라, 고통의 비명과 같다. 떨리는 손으로 그어진 선들은 마치 고통에 몸부림치는 흔적처럼 보인다. 겹겹이 쌓이고 찢어지듯 덧칠된 화면은 인간의 내면이 무너져 내리는 파국을 시각적으로 체현한다. 물감은 더 이상 색채가 아니라, 피와 고름을 닮은 물질이 된다. 번지고 얼룩지고, 때로는 응고된 물감은 죽은 감정의 잔해를 연상시킨다. 이처럼 그의 회화는 추상적이지만, 동시에 육체적이다. 관객은 화면 앞에서 단순히 색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체액과 맞닥뜨린다.
절정과 죽음의 경험은 관객에게도 불편함을 안겨준다. 이는 미적 쾌락의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심리적 압박의 체험이다. 작품 앞에 선 관객은 숨 막히는 긴장 속에서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고통과도 조우하게 된다. 정재권의 작품은 감상자를 안락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감상자의 방어막을 무너뜨리고, 그 안에 숨겨진 죽음의 기억을 소환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단순히 개인적 고백을 넘어, 관객 각자의 심연과 연결된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자신의 고통과 마주하는 불가피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작품은 단순한 시각적 오브제를 넘어, 심리적 사건이 된다.
이러한 극단적 체험은 예술사적 맥락에서 볼 때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많은 예술가들이 죽음과 고통을 다뤄왔지만, 정재권은 그것을 상징적 거리두기나 미학적 장치로 처리하지 않는다. 그는 고통을 실질적으로 직시하고, 그 잔해를 끄집어내며, 그것을 화면에 그대로 옮긴다. 이 점에서 그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인간 신체 해체 회화와도 닿아 있지만, 동시에 다른 차원을 가진다. 베이컨이 존재론적 불안을 형상화했다면, 정재권은 자기 고통의 잔해를 고백적으로 끄집어낸다. 그의 작업은 더 내밀하고 일기적이며, 개인적 죽음의 기록이다. 그렇기에 관객은 작품 앞에서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불안을 체험한다.
죽음의 경험은 또한 변화를 위한 전제다. 정재권의 작업에서 이 절정은 단순한 파국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위한 필수 과정이다. 그는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엿본다. 죽음을 직시하지 않고서는, 결코 새로움에 도달할 수 없다. 이 점에서 그의 작업은 단순한 절망의 기록이 아니라, 절망을 통과한 이후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는 죽음을 끝으로 두지 않고, 죽음을 통해 다시 생을 바라보는 길을 찾는다. 이 과정이 바로 그의 작업을 단순한 어둠의 기록에 머무르지 않게 한다.
정재권의 예술에서 절정과 죽음의 경험은 결국 생의 의지와 직결된다. 그는 작업노트에서 이렇게 적었다. “스스로 목을 조르는 삶에서도 이어가는 생의 의지, 절망의 공기 속에서도 이어갈 수 있는 생의 의지, 떨리는 손으로 붙잡고 이어가는 생의 의지.” 이 문장은 절망과 몰락의 끝에서 발견한 작은 빛과 같다. 그는 죽음을 체험한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 모순적 태도, 즉 죽음을 경험하면서도 생을 붙잡으려는 태도가 그의 작업을 가장 강렬하게 만든다. 고통은 그를 무너뜨리지만, 동시에 다시 일어나게 한다. 죽음은 그를 끝내지만, 동시에 새로운 생을 가능하게 한다.
생의 의지로서의 회화
정재권의 작업이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그것이 단순히 죽음과 고통의 기록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분명히 절망의 끝을 경험했다. 작업노트에는 피와 고름으로 얼룩진 감정의 시체가 등장하고, 화면은 붕괴된 자아와 무너진 감정의 잔해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은 끝내 하나의 출구를 마련한다. 그것은 바로 생의 의지다. 절망을 통과한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야 한다는 결심, 무너진 자아의 파편 속에서도 다시 붙잡을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태도가 그의 회화를 관통한다. 이 귀환과 변형의 국면에서, 정재권의 회화는 죽음의 기록에서 생의 선언으로 전환한다.
작업노트 속 구절 ― “스스로 목을 조르는 삶에서도 이어가는 생의 의지, 절망의 공기 속에서도 이어갈 수 있는 생의 의지, 떨리는 손으로 붙잡고 이어가는 생의 의지” ― 는 이 전환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반복되는 단어는 ‘의지’다. 그는 더 이상 감정의 파괴나 몰락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럼에도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언어로 기록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의지가 거창하거나 영웅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거대한 이상이나 목적이 아니라, 단지 ‘떨리는 손으로 붙잡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바로 그 미약하고 불안정한 태도가 그의 작업을 가장 강력하게 만든다. 생의 의지는 완벽한 힘이 아니라, 부서지기 쉬운 의지의 끈이다. 그는 바로 그 끈을 끝내 놓지 않는다.
회화 속에서도 이러한 변형은 뚜렷이 드러난다. 이전의 화면이 파괴와 해체에 몰두했다면, 이제 그의 화면에는 새로운 질서의 조짐이 나타난다. 감정의 실은 여전히 얽히고 풀리지만, 그것이 만들어내는 형상은 단순한 무너짐이 아니라, 새로운 직조를 향한 움직임이다. 물의 번짐 역시 더 이상 단순히 잠식과 붕괴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색채의 층위를 만들고, 우연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즉, 파괴적 힘이었던 물은 이제 창조적 자극으로 변한다. 정재권은 절망의 물질을 그대로 사용하되, 그것을 새로운 가능성의 재료로 삼는다. 이 과정에서 그의 회화는 단순한 몰락의 기록을 넘어, 변형의 서사를 획득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변형이 기적처럼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고통과 절망을 통과하는 과정을 통해 서서히 형성된다. 그는 죽음을 경험했기에, 비로소 생의 의지를 말할 수 있다. 죽음을 직시하지 않고는, 생의 가치도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고통과 죽음의 체험을 생의 변형으로 연결하는 순환적 구조를 가진다. 몰락과 절망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을 준비하는 통과 의례가 된다. 이 구조가 바로 그의 작업을 단순히 어둠의 기록으로 읽히지 않게 한다. 그는 죽음을 경험하고, 그 이후에 다시 세상으로 귀환한다.
귀환은 단순히 개인적 치유로만 머물지 않는다. 정재권은 자신의 고통을 작품으로 전환하면서, 그것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작품은 그의 개인적 내면의 기록이지만, 동시에 관객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장이 된다. 감정의 실과 물, 해체와 변형의 과정은 누구나 자신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보편적 감각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그의 작품을 보며 단순히 타인의 고통을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과도 마주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도 여전히 살아가야 한다’는 작은 의지를 발견한다. 정재권의 회화는 개인적 치유에서 시작해, 사회적 공감을 매개하는 장치로 변형된다. 이 지점에서 그의 예술은 자기 고백을 넘어, 공유된 생의 선언으로 확장된다.
그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귀환과 변형은 또한 예술 자체의 기능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예술은 단순히 미적 경험을 제공하는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고통을 직면하고, 그 고통을 치유하며,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다. 정재권의 작업은 이 기능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의 회화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직시하게 만들며,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단순한 회화적 실험을 넘어,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실존적 성찰이다. 그는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당신의 고통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예술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귀환과 변형의 과정은 고통과 절망을 다룬 많은 예술가들의 전통 속에 놓인다. 그러나 정재권의 작업은 그 전통 속에서도 독자적 위치를 점한다. 그는 고통을 극복하거나 초월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 속에 머물고, 그 안에서 미약한 생의 의지를 발견한다. 이는 고통을 승리나 영광의 서사로 바꾸지 않고, 고통 자체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바로 이 점이 그의 작업을 진실하게 만든다. 그는 관객에게 거창한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든 이어지는 미약한 삶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 가능성은 불안정하지만, 바로 그 불안정성 속에 인간 존재의 진실이 있다.
정재권의 회화는 결국, 고통을 담는 동시에 그것을 변형하는 장치다. 그의 화면은 절망의 흔적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그 위에 새로운 질서를 직조한다.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 태도가 바로 생의 의지로서의 회화다. 회화는 단순히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매체가 아니라,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게 하는 힘이 된다. 정재권의 작업은 이를 강렬하게 증명한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숨기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그것을 이해하고 치유하며, 동시에 관객에게도 새로운 삶의 의지를 건넨다.
사회적 확장
정재권의 회화는 개인적 체험에서 출발했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기 방 안에서 고통과 폐쇄의 시간을 겪고, 절망과 죽음을 직시한 이후, 그는 결국 세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 귀환은 단순히 일상의 회복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변형된 자아로서, 새로운 시각과 언어를 가지고 세계와 다시 관계 맺기를 시작하는 과정이다. 그의 회화는 바로 이 ‘귀환’을 보여준다. 방 안에 고립된 내면의 고통을 밖으로 흘려보내며, 그것을 작품으로 만들어 사회적 맥락 속에 놓는다. 결과적으로 그의 작업은 개인의 서사를 넘어, 동시대 사회와 공유할 수 있는 언어로 확장된다.
정재권의 작품이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그가 직면한 고통이 철저히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불안정한 노동 환경, 반복되는 관계의 실패, 자기혐오와 무력감, 쾌락과 중독의 악순환 ― 이러한 요소들은 단지 작가 개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이 경험하는 감각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특정한 개인의 고백이면서, 동시에 세대적 초상을 형상화한다. 관객은 그의 작품 앞에서 단순히 작가의 고통을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겪고 있는 시대적 조건을 목격한다. 이 지점에서 그의 회화는 사회적 확장을 획득한다.
특히 그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실과 물의 이미지는 개인의 감정을 넘어 사회적 상징으로 읽힌다. 실은 공동체와 관계, 사회적 네트워크를 은유할 수 있다. 그것은 서로를 엮고, 붙잡으며, 함께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그러나 그 실은 언제든 끊어지고 풀린다. 물은 외부로부터의 압박, 사회적 불안정, 감정을 잠식하는 구조적 조건을 상징한다. 이 두 이미지의 충돌은 개인의 내면을 넘어, 동시대 사회가 겪는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정재권의 화면은 결국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세계의 불안정한 직물을 보여준다. 이 직물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 시대의 집단적 불안을 압축적으로 체현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전시는 단순한 회화 감상의 자리가 아니라, 공감과 성찰의 장으로 기능한다. 관객은 작품 속에서 자신이 경험한 불안을 발견하고, 동시에 그것을 다른 이들과 공유한다. 전시 공간은 고통을 고백하는 장소이자, 고통을 함께 바라보는 공동체적 공간으로 변한다. 이는 단순한 미적 체험을 넘어, 사회적 의례와도 같다. 작품은 개인의 내밀한 기록이지만, 그것이 공개되는 순간 사회적 사건이 된다. 따라서 정재권의 귀환은 개인적 귀환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귀환으로 확장된다. 그의 작업은 고통을 사회 속에서 나눌 수 있는 언어로 바꿔놓는다.
정재권의 작업이 가지는 또 하나의 의미는, 그것이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다시 묻는다는 점이다. 예술은 오랫동안 미적 즐거움과 형식적 완결성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진다. 예술은 어떻게 고통을 다루는가? 예술은 어떻게 절망을 치유하는가? 그리고 예술은 어떻게 개인의 경험을 사회적 공감으로 전환하는가? 그의 회화는 바로 이 질문들에 대한 응답이다. 그는 고통을 은폐하지 않고 드러내며, 그것을 공유 가능한 언어로 변환한다. 예술은 이 과정을 통해 사회적 장치로 기능한다. 관객은 작품 앞에서 미적 쾌락을 넘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경험을 한다.
이 사회적 확장은 국제적 맥락에서도 읽힐 수 있다. 현대 미술은 이미 오랫동안 고통, 트라우마, 사회적 불안을 다루어왔다. 아이 웨이웨이(Ai Weiwei)가 정치적 억압을 작품화하고, 도리스 살세도(Doris Salcedo)가 사회적 상처를 설치미술로 드러낸 것처럼, 정재권 역시 개인적 고통을 사회적 서사로 확장한다. 그러나 그의 방식은 거대한 정치적 담론보다는, 더 내밀하고 개인적인 서사에서 출발한다. 그렇기에 그의 작업은 오히려 더 강력하게 공감된다. 거대한 정치적 메시지 대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면의 고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의 회화는 글로벌한 동시대 미술의 언어와도 호응하면서, 한국 사회 특유의 조건을 반영하는 독자성을 가진다.
정재권의 귀환은 결국, 예술이 사회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그의 회화는 단순히 작가의 내면을 드러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며, 집단적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미술관의 벽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다시 묻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회화는 개인의 고백에서 사회적 언어로, 그리고 다시 시대적 증언으로 확장된다.
결국 정재권의 예술에서 ‘새로운 세계로의 귀환’은 단순히 개인적 재기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언어로 변환된 예술의 힘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그는 고통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그것을 감각적 언어로 바꿔 공유한다. 이 과정에서 그의 회화는 단순히 개인의 서사가 아니라, 동시대 사회의 불안과 희망을 동시에 담는 매개가 된다. 관객은 그의 작업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인식하고, 그것을 다른 이들과 연결짓는다. 그렇게 그의 회화는 공감과 성찰의 장이자, 사회적 확장의 사건이 된다.
마지막으로, 그의 작업은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의 고통은 어떻게 전환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단순히 미학적 차원의 물음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론적이고 사회적인 물음이다. 정재권은 자신의 고통을 작품으로 전환했고, 이제는 관객 각자가 자기 고통을 어떻게 전환할지를 묻는다. 이 질문은 열린 채로 남으며, 작품은 끝내 완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미완의 상태가 예술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예술은 답을 제공하지 않고, 질문을 남긴다. 정재권의 회화는 바로 이 질문을 사회 속으로 던지는 행위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세상으로 돌아와 남긴 가장 큰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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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협회 아이테르 [ AITHER ] 부산전시관
아이테르 AITHER
부산 갤러리/전시관
- 문화예술기획업
주소: (48737)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로 65번길 21
주차: 진시장 공영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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