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아카이브 - 일간 인기글 Exhibition Archive Popular Articles

아이테르 전시아카이브.


연도 [전시공간] - [전시제목] / [작가이름] [전시종류]


2026 아이테르 범일가옥 《전쟁이 만든 용적률》 / 작가 허남문 [미술전시]

《전쟁이 만든 용적률》

허남문 기획전

10:00 ~ 18:00 (KST)
아이테르 범일가옥, 부산 동구 범일로65번길 21

26.06.1. - 26.6.30.

 

00fef3c96119d.png




전쟁이 만든 용적률

허남문의 매체와 흔적, 그리고 비무장지대의 윤리

허남문 기획전 비평 │ 아이테르 범일가옥 │ 2026.06.01.–06.30.




서문 - 부산, 범일, 그리고 한 줄의 부피

전시 제목 《전쟁이 만든 용적률》은 이중의 충격을 가한다. 첫째는 단어들이 결합되는 방식이 어색하다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사건의 시간성과 용적률이라는 도시계획의 수치, 그 둘은 본래 서로 다른 문법에 속한다. 전쟁은 발발하고 종결되고 기억되지만, 용적률은 산정되고 고시되고 거래된다. 그러나 이 어색한 결합이 일단 성립되고 나면, 우리는 두 단어의 본래 자리를 다시 의심하게 된다. 전쟁은 시간을 만들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부피를 만들었고, 용적률은 단지 건축의 산식이 아니라 어떤 폐허와 어떤 부재의 산식이기도 했다는 사실. 둘째는 이 결합이 가리키는 작가의 실제 작업이 정말로 그러한 부피의 산정이라는 점이다. 허남문의 설치 작업은 한지 닥 펄프로 캐스팅된 철모 수십 점, 굴참나무 낙엽 수 자루, 미사일 모형, 흙, 재, 벼, 소금, 네온 튜브와 같은 사물들을 전시 공간이라는 한정된 대지 위에 다시 쌓아 올린다. 그것은 작가가 한 평의 전시장에 부여한 새로운 용적률이며, 동시에 전쟁이 한 나라의 영토에 부여하고 갔던 옛 용적률에 대한 응답이다. 한 사건이 만든 부피를, 다른 사건(전시라는 사건)이 다시 만든다. 만들어진 부피와 만드는 부피 사이의 차이가 곧 이 전시의 비평적 자리이다.

장소도 이 제목과 무관하지 않다. 아이테르 범일가옥은 부산 동구 범일동의 오래된 가옥을 전시장으로 전용한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부산 동구 범일동은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두꺼운 지층 중 하나가 압축된 동네다. 일제강점기 산업화의 변두리였고, 한국전쟁기 피란민들이 산복도로를 따라 판자를 박아 올렸던 곳이었으며, 그 뒤로는 산업화 시대 노동자들이 모여 살았고, 오늘날에는 도시재생과 젠트리피케이션이 동시에 진행되는 문화 지구가 되었다. 한 가옥이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거기 서 있었다는 사실은, 그 한 가옥의 용적률 안에 한국 근현대사의 시간 전체가 어떤 식으로든 응축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 장소에서 《전쟁이 만든 용적률》을 본다는 것은 단지 한 작가의 회고전이나 신작전을 본다는 것이 아니라, 한 가옥이 견뎌낸 시간과 한 작가가 만든 부피가 같은 평면 위에서 겹쳐지는 것을 본다는 뜻이다.

우리는 작가의 작업을 정리하기 전에 우선 이 두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첫째, 허남문의 작업은 부피의 작업이다. 그가 회화에서 출발했으면서도 결국 설치(그 가운데서도 굵직한 부피를 가진 설치)로 이행해 간 까닭은 우연이 아니다. 둘째, 그 부피가 이번에 자리 잡는 곳이 도시계획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역사적 의미에서의 용적률을 이미 머금고 있는 옛 가옥이라는 사실이다. 작가의 부피와 장소의 부피가 만나는 자리에서 새로운 비평적 사건이 발생한다. 이 글은 그 사건의 안쪽을 천천히 들여다보려는 시도이다.

1장. 장소의 두께—범일가옥, 부산, 그리고 가옥이라는 매체

1-1. 가옥이라는 매체의 발견

전시 공간을 단지 작품의 무대로 보는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다. 화이트 큐브의 신화가 비판된 이후, 동시대 예술은 전시 공간 자체를 매체로 다루는 것을 점차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모든 비-화이트 큐브가 자동적으로 비평적 공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가옥은 그저 멋스러운 배경이 되고, 어떤 가옥은 한 시대의 절단면이 된다. 둘 사이를 가르는 것은, 그 공간을 사용하는 작가와 기획자가 가옥의 시간을 매체로 다룰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다룰 어휘를 충분히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부산 동구 일대의 오래된 가옥들은 1930-40년대 일본인 거주지에서 흘러나온 잔재와 해방 후 귀속재산 처리, 그리고 한국전쟁기 피란민의 점거가 차례차례 겹쳐 만들어진 누적적 건조물이다. 처음에 일본식 격자무늬 창과 다다미 방으로 시작했던 공간이, 해방 후 한국인의 좌식 생활에 맞춰 조정되고, 한국전쟁기에는 임시 거주민들에 의해 다시 분할되며, 산업화 시대에는 셋방으로 쪼개지고, 마지막에 오늘날의 카페나 전시 공간으로 다시 통합된다. 이 일련의 변용은 단순한 리모델링의 역사를 넘어 한 가옥이 한 도시의 정치사를 흡수해 들어간 흔적의 역사이며, 그 흔적이 다시 가옥의 마룻장, 기둥, 벽지, 천장의 결에 새겨진다.

허남문의 작업이 이런 가옥에서 펼쳐진다는 사실은, 그의 작업이 가진 매체적 본성과 깊이 공명한다. 작가의 설치들은 발견된 흔적(굴참나무 낙엽, 녹슨 철모, 신문지에서 잘려 나간 전쟁 기사)을 재료로 삼는다. 발견된 흔적과 발견된 가옥이 같은 자리에서 만난다. 즉 범일가옥은이미 그의 작업과 같은 종류의 사물이다. 시간이 침전된 사물. 의도하지 않은 의미가 두께로 쌓인 사물.

1-2. 부산이라는 좌표—피란민의 도시, 잠재적 전선의 도시

부산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점한다. 1950년 8월부터 1953년 7월까지의 약 3년간 부산은 임시수도였다. 한반도의 거의 모든 정치적 기능이 이 도시로 압축되어 들어왔고, 거의 모든 피란민이 이곳을 통과했다. 부산의 산복도로와 우암동·범일동·초량동의 가파른 언덕길은 그 시기에 만들어진 도시의 지형이다. 그것은 도시계획의 결과가 아닌 전쟁의 결과로 만들어진 지형이다. 도시계획의 용적률이 평지의 산식이라면, 산복도로의 가옥들이 빚어낸 용적률은 전쟁이 만든 용적률이다.

이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정확한 도시사적 의미에서 그러하다. 부산 동구 일대의 가옥 밀도, 골목의 폭, 가옥당 거주자 수, 천장의 높이, 가옥과 가옥 사이의 거리 같은 것들은 전쟁이라는 사건이 직접 결정한 변수이다. 사람이 너무 많이 한꺼번에 몰려들었기 때문에 골목이 좁아졌고, 가옥은 작아졌으며, 한 채에 여러 가족이 살아야 했다. 가옥은 늘어날 수 있는 만큼 위로 늘어났고, 옆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한 평의 대지 위에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도록 가옥의 부피가 재산정되었다. 그 산식의 이름이 바로 ‘전쟁이 만든 용적률’이다.

허남문이 부산에서, 그것도 범일가옥에서 이번 전시를 연다는 사실은 그래서 전시 제목과 강하게 공명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의 모티프인 비무장지대를 부산이라는 도시의 또 다른 비무장지대(실은 영구히 임시적인 거주지, 영구히 임시적인 가옥, 영구히 임시적인 골목으로 이어진 동네)에 가져와 놓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단순한 ‘DMZ 작가가 부산에 오다’의 의미가 아니다. 작가가 비무장지대에서 발견했던 시간성(이름 없이 죽은 자들의 시간성, 폐허에 자라난 자연의 시간성, 일상이 종결되지 못한 채 계속되는 시간성)이 부산의 옛 동네에도 그대로 있다는 발견이다. 부산은 항상 전선의 후방이었고, 그 후방성 자체가 한국 현대사의 모든 무게를 떠받쳐 왔다.

1-3. 가옥의 결—허남문 매체와의 친연성

범일가옥의 결은 어떤 결인가. 긴 시간을 견딘 목재는 표면이 균열되고 검게 산화되어 있다. 마룻장은 발걸음이 닿는 자리마다 다른 강도로 닳아 있다. 벽지는 여러 겹으로 덧발려 있고, 그 사이사이로 옛 신문지나 옛 광고지가 비쳐 나오는 일이 종종 있다. 이런 결들은, 작가가 그동안 사용해 온 매체들과 놀라울 만큼 가깝다. 굴참나무 낙엽, 닥 펄프, 녹슨 철모, 잘린 신문 기사. 모두 시간을 흡수한 식물적·종이적·금속적 매체이다.

이 친연성은 단지 색감의 유사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체의 존재 방식, 즉 매체가 어떻게 시간을 견디고 시간을 드러내는가에 관한 것이다. 닥 펄프는 종이가 되기 직전의 펄프 상태에서 굳어진 매체이며, 표면이 거칠고 흰빛을 띤다. 그것은 종이의 가능태이면서, 동시에 그 가능태가 어떤 형(철모, 미사일)으로 응고된 매체이다. 굴참나무 낙엽은 한 해의 끝에 떨어져 다음 해의 시작 전까지 부엽토가 되어 가는 매체이며, 그 부피와 무게는 그 한 해의 강수량과 햇빛량을 자기 안에 기록한 매체이다. 녹슨 철모는 한 사람이 한때 머리에 쓰고 있던 금속이 그 한 사람이 사라진 뒤에도 계속 남아 있는 매체이다. 가옥의 마룻장, 벽지, 기둥 또한 그와 같은 시간의 흡수체이다. 누가 그 마룻장을 걸어갔는지, 누가 그 벽에 등을 기댔는지, 가옥의 결은 알고 있다. 작가의 매체와 장소의 매체가 동일한 시간성을 공유한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작가가 자신의 사물들을 이 가옥의 사물들과 같은 자리에 놓아 보임으로써, 이 가옥이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응시하게 하는 사건이다. 가옥은 자신이 시간을 흡수한 매체였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을 수 있다. 일상의 사용에 길들여진 가옥은 자신이 가진 두께를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작가의 사물들이 그 위에 놓이는 순간, 가옥의 결이 자기 자신의 결을 알아본다. 두 결이 같은 종류의 결이라는 것을 알아본다. 그 알아봄의 순간이 전시이다.

1-4. 임시수도의 미술사—부산이라는 미술사적 좌표

부산은 또한 한국 현대미술의 한 결정적 좌표이다. 한국전쟁기 임시수도 시절, 거의 모든 화가들이 부산으로 피란을 와 있었다. 그 시기 부산의 다방과 거리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한 모더니티가 임시로 짜여졌다. 그 임시성이 1953년 환도 이후 서울로 옮겨 가면서 한국 현대미술의 한 주류 흐름이 만들어졌다. 부산은 그 한 흐름의 출발점인 동시에, 그 흐름이 떠나간 뒤의 잔존지이기도 했다. 부산의 미술사는 그래서 끊임없이 ‘떠나간 뒤’의 미술사이다.

이런 부산에서 허남문의 작업을 본다는 것은, 한국 현대미술이 결국 어디로부터 떠나왔고 어디로 향해 갔는가를 다시 되짚는 일이기도 하다. 작가의 회화 작업이 이른바 단색화적 경향(한국 모더니즘의 한 주된 흐름)과의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비평가 윤진섭이 일찍이 지적한 바와 같다. 작가는 한지라는 한국적 매체를 동시대적 언어로 다시 다루고, 점·선·면이라는 모더니즘 회화의 기본 어휘를 자신의 조형 언어로 재발화한다. 이 작업이 단색화의 본거지 가운데 하나인 부산에서 다시 보여진다는 것은, 작가의 작업이 한국 미술사라는 더 큰 시간의 결 안에 놓이게 된다는 뜻이다.

다만 이번 전시는 회화만의 전시가 아니다. 작가의 작업은 회화에서 출발해 설치·미디어·사운드의 영역으로 넓혀져 왔고, 그 확장의 동력은 비무장지대 군 복무 경험이었다. 부산이라는 도시의 미술사적 자리(단색화의 한 갈래가 출발한 자리)와, 비무장지대 경험에서 비롯된 작가의 설치 작업이 이 가옥에서 만난다. 이 만남은 한국 미술사의 두 시간(1950년대 임시수도의 모더니즘과 21세기의 매체융합)을 한 평면 위에 겹쳐 놓는다. 부산의 옛 가옥이 그 겹침의 공간이 된다.

2장. 용적률이라는 개념—왜 이 단어인가

2-1. 용적률의 원래 의미와 그 전치

용적률(容積率, Floor Area Ratio, FAR)은 도시계획·건축법상의 개념이다. 대지면적에 대한 건축물 연면적의 비율, 즉 한 평의 땅 위에 얼마만큼의 부피를 합법적으로 지을 수 있는가를 정하는 비율이다. 이 개념은 도시의 밀도, 인구의 분포, 건축의 경제성, 주거의 질, 공공 공간의 확보 같은 매우 실용적인 문제들과 직결된다. 한 도시의 용적률 산정은 사회적 합의의 결과이고, 정치적 갈등의 자리이며, 자본의 이해와 공공의 이해가 충돌하는 지점이다. 강남의 한 평이 강북의 한 평과 얼마나 다른 부피를 짊어질 수 있는가의 차이가 한 도시의 부의 분포를 결정한다.

전시 제목이 이 개념을 빌려 와 ‘전쟁이 만든 용적률’이라고 명명할 때, 일어나는 일은 무엇인가. 첫째, 전쟁의 결과가 도시계획적 차원에서 측정 가능한 부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가설이 제출된다. 둘째, 그 부피가 실제로 한 사회의 주거·생활·기억의 밀도를 결정해 왔다는 주장이 따라온다. 셋째, 그러한 부피는 누가 어떻게 산정하고, 누가 어떻게 지불해 왔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즉 용적률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은유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비평적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것은 측정 가능한 어떤 것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측정될 수 없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전쟁이 만들어 낸 부피는 무엇인가. 첫째로 직접적 파괴의 부피이다. 무너진 건물, 부서진 다리, 파괴된 마을의 부피. 둘째로 사라진 부피이다. 죽은 사람들의 부피,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차지하지 않는 공간의 부피. 셋째로 새로 만들어진 부피이다. 무너진 자리에 다시 지어진 가옥, 새로 만들어진 도로, 새로 그어진 경계선의 부피. 넷째로 만들어진 채로 비어 있는 부피이다. 비무장지대 안의 빈터, 분단선 너머의 닫힌 마을, 출입할 수 없는 지대의 부피. 다섯째로 잠재적 부피이다. 언제든 다시 만들어질 수 있는, 그러나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부피. 미래에 다시 발발할 수 있는 전쟁의 부피.

2-2. 다섯 가지 부피와 허남문의 다섯 가지 매체

허남문의 설치 작업은 이 다섯 가지 부피와 놀라울 만큼 정확히 대응한다. 첫째로 파괴의 부피는 작가가 사용하는 미사일 캐스팅과 신문지에서 잘려 나간 전쟁 기사의 더미에서 보인다. 둘째로 사라진 부피는 닥 펄프로 캐스팅된 철모, 즉 한때 한 사람의 머리를 감쌌으나 이제는 그 사람 없이 비어 있는 모형의 부피에서 보인다. 셋째로 새로 만들어진 부피는 작가의 설치 자체이다. 빈 전시장에 작가가 다시 쌓아 올린 사물들의 부피. 넷째로 비어 있는 부피는 작품과 작품 사이의 간격, 작가가 굳이 채우지 않은 자리, 관객이 그 사이를 걸어 다닐 수 있도록 비워 둔 통로의 부피이다. 다섯째로 잠재적 부피는 미디어 작업(전투기 영상, 핵폭발 사진 자료, 야간 촬영 영상)이 가리키는 미래의 부피이다.

작가는 이 다섯 가지 부피를 자신의 매체 안에서 분명하게 분류하고 배치한다. 한 작품 안에 다섯 가지가 모두 들어 있는 경우도 있고, 한 가지 부피만 강조된 경우도 있다. <그 경계에 서서—비무장지대> 연작에서는 둘째와 넷째 부피가 강조된다. 닥 펄프 철모는 ‘이제는 비어 있는 부피’이고, 그 철모들이 줄지어 놓인 사이의 간격은 ‘만들어진 채로 비어 있는 부피’이다. <그 경계에 서서—NO WAR>에서는 첫째 부피가 강조된다. 닥 펄프로 캐스팅된 미사일과 전쟁 기사 신문, 문서 세단기는 모두 ‘파괴의 부피’와 그 부피를 처리하려는 행정적 노동을 함께 가리킨다. <서울 불바다—핵 전쟁 반대>에서는 다섯째 부피가 강조된다. 롯데타워 모형과 흙·재·사진 자료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부피’를 미리 가져와 보여 준다.

이렇게 작가의 작업을 다섯 가지 부피의 분류로 다시 보면, 그의 매체 선택이 단순한 재료의 미적 선호가 아니라 매우 분명한 비평적 산정의 결과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작가는 각 매체에 부피를 부여하고, 그 부피를 전시 공간 안에 정확하게 배분한다. 한 평의 전시장에 들어가는 닥 펄프 철모의 수, 굴참나무 낙엽의 자루 수, 미사일 캐스팅의 개수, 이 모든 것이 작가가 산정한 ‘이 전시의 용적률’이다.

2-3. 산정의 윤리—누가 부피를 매기는가

용적률의 윤리적 문제는 산정의 문제이다. 한 평의 땅 위에 얼마만큼의 부피를 올릴 수 있는가를 누가 결정하는가. 도시계획의 차원에서 그것은 지방자치단체와 중앙정부, 그리고 그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자본과 시민사회의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 그 결정은 종종 정치적 거래의 결과이고, 종종 자본의 압력에 의해 휘어지며, 종종 시민의 저항에 의해 멈춰 선다. 한 평의 용적률을 결정하는 일은 결코 중립적인 산정이 아니다.

전쟁이 만든 부피의 경우 그 산정은 더더욱 중립적일 수 없다. 누가 그 부피를 짊어졌는가, 누가 그 부피의 책임을 졌는가, 누가 그 부피를 기억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모두 산정의 문제이다. 한국전쟁의 사망자 수가 정확히 몇 명인지에 대한 합의는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 완전하지 않다. 비무장지대 안에 남은 유해의 정확한 수는 누구도 모른다. 분단 이후 양쪽에 갈라진 가족의 수는 통일이 늦어질수록 점점 더 측정 불가능한 영역으로 들어간다. 즉 전쟁이 만든 부피는 결코 정확하게 산정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것을 가리키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정확하게 산정될 수 없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부피를 어떻게 가리킬 것인가의 문제가 곧 예술의 문제이다.

허남문의 산정은 예술적 산정이다. 그는 정확히 몇 개의 철모를 놓을 것인가, 몇 자루의 낙엽을 깔 것인가, 몇 개의 미사일을 세울 것인가를 결정한다. 그 결정은 통계적 산정도, 행정적 산정도 아니다. 그것은 한 평의 전시 공간 안에서 ‘이만한 부피를 보면 관객이 무엇을 느낄 것인가’의 산정이다. 너무 적게 놓으면 부피는 가려지고, 너무 많이 놓으면 부피는 둔감해진다. 작가는 그 사이의 정확한 자리를 찾는다. 그 찾음의 능력이 작가의 능력이다.

이번 《전쟁이 만든 용적률》에서 작가는 자신의 산정 능력을 범일가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적용해야 한다. 화이트 큐브가 아니라 옛 가옥, 천장이 낮고 마룻장이 삐걱대는 공간 안에서 그가 어떤 부피를 산정할 것인가가 이번 전시의 비평적 관심사이다. 화이트 큐브에서는 작가의 부피가 공간을 가득 채우는 방식으로 산정되었다. 가옥에서는 어떨까. 가옥의 부피와 작가의 부피가 충돌할 것인가, 협상할 것인가, 융합될 것인가. 이 질문은 전시가 시작되어야 답해질 것이다. 그러나 비평가는 이 질문을 미리 던져 두는 것으로, 그리고 작가가 이 질문에 대해 어떤 가능한 답을 가지고 있는지 그의 이전 작업에서 미리 읽어 두는 것으로, 그 답에 대한 기대의 폭을 좁혀 둘 수 있다.

3장. 회화의 토대—점·선·면, 그리고 SPACE 연작

3-1. 점·선·면이라는 모더니즘의 어휘

허남문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회화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의 회화는 점·선·면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조형 요소를 다루는 작업이다. 이 어휘는 한국 모더니즘 회화의 한 본류(특히 단색화 계열)에서 끊임없이 다루어져 왔던 어휘이다. 그러나 같은 어휘를 다루는 작가들 사이에서도 그 어휘의 다룸 방식은 매우 다르다.

점·선·면이라는 어휘는 본래 추상 회화의 어휘이다. 칸딘스키는 1926년 『점·선·면』에서 이 세 요소를 회화의 가장 기초적 구성 요소로 정리했고, 이후 한 세기 동안의 추상 회화는 이 세 요소 위에서 다양한 변주를 만들어 왔다. 한국의 단색화 계열 작가들은 이 어휘를 한국적 매체(한지, 닥지, 묵, 광목, 마)와 결합시켜 다시 다루었다. 그들의 점은 단순한 도형이 아니라 종이 위에 스민 묵의 자국이었고, 선은 단순한 경계가 아니라 종이가 접히고 다시 펴진 자국이었으며, 면은 단순한 색면이 아니라 종이의 결이 펼쳐진 자국이었다. 점·선·면이 매체의 시간성을 머금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허남문의 점·선·면은 이 두 계열(칸딘스키적 추상의 계열과 한국 단색화의 계열)을 모두 의식하면서도 그 어느 한 쪽으로도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자리에 놓여 있다. 그의 작가 노트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작업에서는 화면의 구성을 점, 선, 면이라는 가장 원초적이면서 회화적인 요소를 융합하여 경계의 면으로 재구성한 후 개념적인 요소를 도입하여 새로운 조형 언어로 표현되어진다." 이 문장에서 결정적인 단어는 ‘경계의 면’과 ‘개념적인 요소’이다. 점·선·면을 그저 회화적 요소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경계’로 다시 사고하고, 그 위에 ‘개념’을 도입한다는 진술이다. 이 진술은 작가가 추상 회화의 한 전통 안에 머무르려는 작가가 아니라, 그 전통을 자신의 다른 작업(설치와 미디어)과 연결하려는 작가임을 분명히 한다.

3-2. ‘경계의 면’이라는 발상—추상에서 비무장지대로

‘경계의 면’이라는 표현은 우연히 사용된 표현이 아니다. 작가의 설치 연작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한 갈래의 제목이 〈그 경계에 서서—비무장지대〉이다. ‘경계’라는 단어가 작가의 회화와 작가의 설치를 가로질러 등장한다. 회화에서의 경계의 면은 점·선·면이 만나는 자리, 한 색면이 다른 색면과 부딪치는 자리, 한 형태가 다른 형태와 갈라지는 자리를 가리킨다. 설치에서의 경계는 비무장지대, 즉 한 영토와 다른 영토가 마주치는 자리, 한 정치 체제와 다른 정치 체제가 부딪치는 자리, 한 인간 집단과 다른 인간 집단이 갈라지는 자리를 가리킨다. 이 둘은 같은 단어이지만 같은 의미인가.

작가의 답은 ‘그렇다’이다. 회화에서의 경계와 설치에서의 경계는 서로 다른 종류의 사물이 아니라, 같은 종류의 사물이 서로 다른 매체로 발현된 것이다. 회화에서 그가 다루는 ‘경계의 면’은 두 영역이 서로를 의식하면서 동시에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서로를 만들어 주는 자리이다. 한 색면이 다른 색면에 의해 한정되지 않는다면 그 색면은 색면이 되지 못한다. 한 형태가 다른 형태에 의해 윤곽 지어지지 않는다면 그 형태는 형태가 되지 못한다. 경계는 두 영역이 서로 부정함으로써 서로를 정립시키는 자리이다.

비무장지대는 이런 의미에서 회화적 ‘경계의 면’의 정치적·지리적 구체화이다. 비무장지대는 두 국가, 두 체제, 두 군사가 서로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정립시키는 자리이다. 그러나 그 부정의 자리, 그 ‘아무것도 없음’을 표방하는 자리에서, 실제로는 모든 것이 머무른다. 70년 넘게 사람이 들어가지 못한 자리에 자연이 다시 자라 올랐다. 굴참나무가 자랐고, 멧돼지가 다녔으며, 두루미가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 자연 사이사이에 사라진 군인들의 흔적(녹슨 철모, 무너진 참호, 폭발하지 않은 지뢰)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정치적 ‘아무것도 없음’이 자연적 ‘모든 것이 있음’과, 그리고 역사적 ‘아직 끝나지 않은 무엇’과 동시에 겹쳐 있는 자리. 그것이 작가가 회화로 다루어 온 ‘경계의 면’의 가장 농밀한 구체화이다.

3-3. SPACE 연작의 형식적 분석

작가의 회화 연작 SPACE는 162.2x130.3 크기의 캔버스에 유화로 그려진 작업들이다. 자료에서 확인되는 작품들은 2020년경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었고, 2022년 작도 포함된다. 형식적 분석을 시도해 보자.

화면의 기본 구성은 다음과 같다. 단일 색채(붉은색, 청색, 검은색)의 면이 화면 전체를 채운다. 그 위에 흰빛의 기하학적 형태들(사각형, 다각형, 비정형의 면)이 마치 떠다니듯 배치된다. 이 흰 형태들은 단순한 도형이 아니라, 캔버스 표면 위에 직접 닥지 같은 종이가 덧대어져 만들어진 것 같은 텍스처를 가진다. 즉 한 폭의 캔버스가 회화이면서 동시에 콜라주이고, 평면이면서 동시에 부조적이다. 점·선·면의 어휘가 평면 위에서 평면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면 위에서 약간의 두께를 가지고 다루어진다.

색채의 선택은 매우 절제되어 있다. 한 작품 안에 사용되는 주된 색은 두 가지를 넘지 않는다. 붉은 면 위의 흰 형태, 청색 면 위의 흰 형태, 검은 면 위의 흰 형태. 이 절제는 단색화의 절제와 닿아 있다. 그러나 작가의 색은 단색화의 묵묵한 흰빛이나 차분한 톤이 아니라, 매우 선명한 채도를 가진 색이다. 미술평론가 파트리스 드 라 페리에르가 지적한 바, "독특한 광채와 특히 강렬한 삶을 부여하기 위해 색채 작업을 한다"는 점이 이 색채의 특성이다. 한국 단색화의 무채색적 경향이 자기 자신을 비우는 방향의 절제라면, 허남문의 색채는 자기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면서도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 안에서 정돈되는 방향의 절제이다.

형태의 배치도 흥미롭다. 흰 형태들은 화면 전체에 골고루 흩뿌려지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어떤 부분에 집중되어 있고 다른 부분은 비워져 있다. 이 비워진 부분은 단색의 색면으로 남아 있다. 형태와 배경, 충만함과 비어 있음이 한 화면 안에서 분명하게 구분된다. 이 구분 자체가 ‘경계의 면’이다. 형태와 배경 사이의 경계가 한 폭의 화면 안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이 된다.

3-4. 색채의 정치학—붉은 면과 청색 면

SPACE 연작에서 사용되는 주된 색채(붉은색과 청색)는 그 자체로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가진다. 붉은색은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무거운 색이다. 그것은 공산주의 진영의 색이었고, 그러므로 분단의 한 쪽을 가리키는 색이었다. 청색은 그 반대편의 색이었으며, 또한 한국이라는 국가의 한 상징색이기도 했다. 한 작가가 자기 회화의 주된 색으로 붉은색과 청색을 선택할 때, 그 선택은 단순히 보색의 미적 선택일 수 없다. 그 선택은 한국 현대사의 한 색채적 분단을 자기 화면 안으로 끌어들이는 선택이다.

물론 작가는 이 색채를 정치적 알레고리로 직접 사용하지는 않는다. 붉은 면이 곧 공산 진영이라거나 청색 면이 곧 한국이라는 식의 직접적 알레고리는 그의 회화에서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비평가는 작가의 회화를 그의 설치(DMZ, NO WAR, 핵 전쟁 반대)와 함께 놓고 볼 때, 이 색채의 선택이 단순한 미적 선택의 차원을 넘어선 어떤 무의식적·반의식적 선택이라는 사실을 읽어낼 수 있다. 작가가 회화로 다룬 ‘경계의 면’이 설치로 다룬 ‘비무장지대’와 같은 자리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회화의 붉은 면과 청색 면은 비무장지대의 양쪽(두 색채로 분단된 한반도)을 결국 가리킨다.

이 가리킴은 직접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더 강력하다. 만약 작가가 회화에서부터 직접적으로 ‘이것은 분단이다’라고 선언했다면, 그의 회화는 정치 포스터에 가까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회화를 먼저 회화로 성립시킨 다음, 그 회화의 색채와 형태가 가진 정치적 잠재성을 설치 작업을 통해 비로소 발화한다. 회화는 무언가를 직접 말하지 않으면서도, 그 무언가가 결국 무엇이었는지를 설치가 발화한 뒤에 거꾸로 알아채게 만든다. 이런 구조는 매우 정련된 비평적 구조이다.

3-5. 검은색 면—단색화와의 거리

SPACE 연작 가운데 검은색 면을 바탕으로 한 작업들은 특히 흥미롭다. 검은색은 한국 단색화의 한 주된 색채이기도 하지만, 단색화의 검은색이 대체로 흙빛과 가까운 따뜻한 검은색이라면, 허남문의 검은색은 차갑고 광택을 머금은 검은색이다. 평론가 라 페리에르가 "다양한 뉘앙스를 주기 위해 깊고 밝은 검정 컬러를 사용할 때조차"라고 지적한 그 검은색이다.

검은 면 위에 떠 있는 흰 형태들은 더욱 분명한 윤곽을 가진다. 붉은 면이나 청색 면 위에서는 흰 형태가 색채와 일종의 보색 관계 속에서 자기 윤곽을 흐릴 수 있지만, 검은 면 위에서는 흰 형태가 빛 그 자체로 분리되어 떠오른다. 이런 화면은 작가의 설치 작업 가운데 야간 촬영 영상이나 네온 작업과 호응한다. <DMZ> 네온 작업, 야간에 촬영된 비무장지대의 영상, 어둠 속에 떠오르는 닥 펄프 철모—이런 작업들은 모두 ‘어둠을 바탕으로 빛이 떠오르는 자리’를 다룬다. 검은 면 위의 흰 형태가 곧 그 자리이다.

이 검은색의 사용은, 작가의 작업이 한국 단색화의 한 전통을 의식하면서도 그 전통과 분명한 거리를 두는 자리를 보여 준다. 단색화가 ‘흙빛의 검은색’으로 자기 자신을 비우는 방향이었다면, 허남문의 ‘차가운 검은색’은 자기 자신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그 비워짐 위에 어떤 빛(즉 죽은 자의 빛, 별이 된 자의 빛, 비무장지대의 야간의 빛)이 떠오를 자리를 마련하는 검은색이다. 비움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비움 위에 떠오를 무엇을 위한 비움이다.

3-6. 회화에서 설치로 가는 다리

SPACE 연작은 그러므로 작가의 회화를 그의 설치로 연결시키는 다리이다. 회화의 점·선·면이 설치의 철모·낙엽·미사일이 되고, 회화의 색면이 설치의 공간이 되며, 회화의 ‘경계의 면’이 설치의 ‘비무장지대’가 된다. 이 다리가 있기 때문에, 작가의 설치 작업이 단순한 정치 설치(메시지를 직접 전달하는 설치)가 되지 않는다. 그의 설치는 그의 회화에서 가져온 형식적 절제와 매체적 두께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닥 펄프 철모가 단지 ‘죽은 군인의 환유’가 아니라 ‘회화적 형태’이기도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미사일 캐스팅이 단지 ‘무기의 모형’이 아니라 ‘조형적 사물’이기도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비평가 허정선은 작가의 작업을 "탈모던과 모던의 경계에 서 있다"고 정리했다. 이 정리는 매우 정확한 정리이다. 작가는 모던(모더니즘 회화의 점·선·면, 색면, 조형적 절제)의 어휘를 가진 채로, 탈모던(매체융합, 설치, 미디어, 사회적 발언)의 영역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걸어 들어감의 다리가 SPACE 연작이다. 회화를 단순히 ‘회화의 자리’에 두지 않고, 회화를 ‘설치로 향하는 다리’로 사용하는 작가. 이런 작가는 한국 현대미술에서 그렇게 흔하지 않다. 대개의 작가는 회화의 자리에 머물거나, 회화를 떠나 설치로 옮겨 간다. 둘을 동시에, 그리고 둘 사이의 다리를 분명하게 의식하면서 다루는 작가는 드물다.

이번 《전쟁이 만든 용적률》은 그래서 작가의 회화와 설치를 동시에 보여 주는 자리여야 한다. 회화 SPACE 연작과 설치 〈그 경계에 서서〉 연작이 같은 공간 안에서 만나야 한다. 그래야 작가의 작업이 가진 두 축이 동시에 보인다. 한 축만 보여 줘서는 작가의 깊이가 다 보이지 않는다. 회화만 보여 주면 작가는 그저 ‘단색화 계열의 한 작가’가 되고, 설치만 보여 주면 작가는 그저 ‘DMZ를 다루는 한 설치 작가’가 된다. 두 축이 함께 보일 때, 비로소 작가가 누구인지가 드러난다. 범일가옥은 다행히도 그런 두 축을 동시에 수용할 만한 공간이다.

4장. 설치로의 이행—발견된 철모, 발견된 매체

4-1. 비무장지대 GP라는 작가적 사건

작가의 약력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한 줄은 "작가는 비무장지대 내 최전방 초소(GP)에서 군 복무를 했다"는 한 줄이다. 이 한 줄은 작가의 약력의 어느 부분에 들어 있느냐를 따지기 전에, 그 자체로 작가의 작업 전체를 가로지르는 한 사건이다. 군 복무가 한 개인의 인생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비무장지대 최전방 GP에서의 군 복무는 그 어느 곳에서의 복무와도 다르다. 그것은 한 국가의 가장 외진 끝, 가장 첨예한 경계, 가장 일상에서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의 복무이다.

GP는 비무장지대 안에 양국이 서로의 군사 동향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한 초소를 가리킨다. 비무장지대는 본래 군사가 ‘무장하지 않기로 한’ 지대이지만, 실제로는 양국이 가장 첨예하게 무장한 채로 마주 보는 지대이다. GP는 그 마주 봄의 가장 앞자리이다. GP에서 근무한다는 것은, 매일 매시간 적의 동향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적에게 자신의 동향을 보여 주는 일이다. 70년 넘게 그 ‘바라봄과 보여 줌’이 끊어진 적이 없다. 그것은 시간이 멈춘 공간이면서 동시에 시간이 끊임없이 작동하는 공간이다.

이런 공간에서의 복무는 한 인간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비평가가 외부에서 짐작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통해 보여 주는 바에 따르면, 그 복무는 작가에게 매우 분명한 한 가지를 남겼다. 그것은 ‘발견’의 경험이다. 비무장지대의 낙엽 위에 불쑥 나타난 녹슨 철모. 이 한 사물의 발견이 작가의 작업 전체를 바꿔 놓았다. 비평가 허정선은 이 발견의 의미를 매우 정확하게 정리한다. 발견된 철모는 6.25 전쟁 당시 어린 나이에 이름도 없이 죽어간 병사들의 흔적이고, 그 가족들의 아픔이며, 분단의 비극을 가리키는 기호이다.

4-2. 발견된 사물—오브제 트루베의 한국적 재발화

발견된 사물(objet trouvé)이라는 개념은 20세기 초 마르셀 뒤샹과 다다이즘의 한 발명품이다. 일상의 사물을 미술관 안으로 가져와 그것을 미술품으로 선언하는 행위. 그것은 미술이 무엇을 다룰 수 있는가의 경계를 근본적으로 넓혔다. 이후 한 세기 동안 발견된 사물은 현대미술의 한 주요한 매체가 되었다. 그러나 발견된 사물이 무엇이든 미술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과잉 해석되어, 발견의 행위 자체가 너무 가벼워지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허남문의 발견은 그런 가벼움과 거리가 멀다. 그가 발견한 철모는 단순한 ‘일상의 사물’이 아니라, ‘비무장지대의 사물’이다. 그것을 발견한 자리는 미술관의 한 모퉁이가 아니라, 한 사람이 군 복무 중에 실제로 걸어 다닌 비무장지대의 낙엽 위이다. 그 사물이 거기 있게 된 경위는 우연한 처분이 아니라, 한 전쟁의 결과이다. 그 사물의 원래 주인은 단지 모르는 누군가가 아니라, 한 어린 군인이며, 그 군인은 죽었다. 발견의 모든 조건이 무거움 그 자체이다.

이런 무거움 안에서 발견된 사물은 뒤샹적 사물과 매우 다른 사물이 된다. 뒤샹의 변기는 ‘이것도 예술인가’를 묻는 사물이었고, 그 물음 자체가 그 사물의 미술적 의미였다. 허남문의 철모는 ‘이것을 예술로 다룰 수 있는가’를 묻지 않는다. 그것은 묻지 않아도 이미 무엇이며, 작가가 할 일은 그 무엇임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이다. 작가의 답은 두 가지로 갈라진다. 첫째, 그 철모를 직접 가져와 미술관에 놓는 일은 하지 않는다. 작가는 발견된 철모 그 자체를 가져와 전시하지 않는다. 둘째, 대신 그 철모를 닥 펄프로 캐스팅한다. 즉 새로 만든다. 이 두 가지 선택이 작가의 작업 방식 전체의 한 본질을 보여 준다.

4-3. 캐스팅이라는 매체적 결단

왜 작가는 발견된 철모를 직접 가져오지 않고 닥 펄프로 캐스팅하는가. 이 질문에는 적어도 세 가지 답이 있다.

첫째로 윤리적 답이다. 비무장지대 안의 사물은 그 자체로 한 사람의 유물이다. 그 유물을 군 복무자가 자신의 미술 작업을 위해 가져오는 것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더욱이 비무장지대는 군사보호구역이며, 그 안의 사물을 임의로 반출하는 일은 법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작가는 이 윤리적·법적 한계 안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발견의 강도를 어떻게 작품으로 옮길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그 고민의 결과가 캐스팅이다. 원본의 사물을 그대로 가져오지 않고, 그 형태를 닥 펄프라는 다른 매체로 옮겨 새로 만든다. 원본은 거기 그대로 두고, 그 형태의 기억만을 옮겨 온다.

둘째로 매체적 답이다. 닥 펄프는 한국의 전통적 종이 재료이다. 닥나무의 껍질을 벗겨 두드리고 풀어 만든 펄프이며, 한지의 원료이다. 한국 미술사 안에서 닥 펄프는 한지로 변하기 직전의 상태, 즉 모든 것이 가능한 상태이다. 그것을 한 형태(철모)에 부어 굳히면, 그 형태는 한지의 두께와 한지의 빛깔과 한지의 질감을 가지고 굳어진다. 즉 작가는 ‘비무장지대의 사물’을 ‘한국적 매체’로 다시 만드는 것이다. 발견된 사물의 원본성과 한국 매체의 전통성이 한 결과물 안에서 만난다. 이 만남은 작가의 작업이 단지 ‘DMZ의 환유’에 머무르지 않고, ‘한국적 매체의 동시대적 재발화’에 닿는 자리이다.

셋째로 형이상학적 답이다. 캐스팅이라는 행위는 그 자체로 한 사물의 ‘부재의 형식’을 만드는 행위이다. 원본의 사물을 거푸집에 대고 새 매체를 부어 굳히면, 그 새 매체는 원본 사물의 ‘외형’만 가질 뿐 원본의 ‘속’은 비어 있다. 작가의 닥 펄프 철모는 그 안이 비어 있는 철모이다. 한 사람의 머리가 한때 들어가 있던 그 자리가, 이제는 비어 있다는 사실. 그 비어 있음을 보이기 위해 캐스팅된 외형. 이것은 캐스팅이라는 매체가 본래 가진 가장 근원적인 의미이다. 부재를 그릇으로 만든다. 사라진 자의 형태를 남은 자가 외형으로만 다시 짓는다. 작가의 닥 펄프 철모는 그러므로 ‘죽은 자의 그릇’이다.

4-4. 닥 펄프라는 매체의 두께

닥 펄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한국의 전통 종이인 한지의 원료가 되는 닥 펄프는 닥나무(楮)의 인피섬유를 펄프화한 것이다. 닥나무는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일대에서 자생하는 뽕나무과 식물로, 그 껍질의 안쪽에 길고 강한 섬유가 발달해 있다. 닥 펄프로 만든 한지는 중성지의 보존성이 매우 뛰어나, 천 년의 시간을 견딘다고 알려져 있다. 신라 시대의 한지 문서가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까닭이 이 보존성에 있다.

이러한 매체적 특성은 작가의 작업과 매우 의미 있게 만난다. 작가는 ‘죽은 자의 그릇’으로서의 철모를 닥 펄프로 캐스팅한다. 닥 펄프의 보존성은 그 그릇이 천 년의 시간을 견딜 가능성을 함축한다. 한 어린 군인의 사라진 머리의 외형을 닥 펄프로 떠 둔다는 것은, 그 외형이 천 년의 시간을 걸쳐 지속될 가능성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한국 미술사가 한 권의 책을 천 년 동안 보존해 왔듯이, 작가는 한 인간의 외형을 천 년 동안 보존할 그릇으로 만든다. 이 두께의 결단은 단순한 매체 선택의 차원을 넘어,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부여한 시간의 폭을 가리킨다.

또한 닥 펄프는 색채상 흰빛이다. 정확히 말하면 약간의 누런 기운을 머금은 따뜻한 흰빛이다. 이 흰빛은 작가의 회화 SPACE 연작에서 다루어졌던 ‘붉은/청색/검은 면 위의 흰 형태’의 흰빛과 같은 종류의 흰빛이다. 회화의 흰 형태가 설치의 흰 철모로 변형된다. 매체는 캔버스에서 닥 펄프로 바뀌었지만, 색채와 형태의 어휘는 그대로 이어진다. 이 연속성은 작가의 작업 전체가 한 흐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확증한다.

닥 펄프의 표면은 또한 거칠다. 종이가 되기 직전의 상태에서 굳어진 매체이기 때문에, 그 표면에는 섬유의 결이 그대로 드러난다. 평론가 라 페리에르가 "마치 작가가 작품 표면을 스크래치하고, 흠집을 낸 듯, 할퀸 듯한 모습으로 표현"한다고 지적한 그 거친 표면이 여기서도 나타난다. 작가의 회화에서 색면 위에 직접 닥지를 덧대어 만든 흰 형태의 표면과, 설치의 닥 펄프 철모의 표면은 같은 종류의 거친 표면이다. 매끈한 표면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간 흔적이 있는 표면. 이 거친 표면은 ‘죽은 자의 그릇’이라는 의미와 매우 정확하게 호응한다. 매끈하게 만들어진 그릇은 죽은 자를 담을 수 없다. 그것은 너무 새로워서 죽은 자의 시간을 머금지 못한다. 거친 그릇만이 죽은 자를 담을 수 있다.

4-5. 굴참나무 낙엽—자연의 시간이 흡수한 정치적 시간

작가의 설치에서 닥 펄프 철모만큼이나 중요한 매체는 굴참나무 낙엽이다. 굴참나무는 참나무과의 한 종으로, 한반도의 산악 지대—특히 비무장지대 주변—에 흔히 분포한다. 그 낙엽은 가을이 깊어지면 떨어져 두텁게 쌓이며, 다음 해의 봄까지 부엽토가 되어 간다. 그 부엽토는 다시 다음 세대의 나무에게 영양분을 공급한다. 자연의 한 순환이 그 낙엽 안에서 매년 반복된다.

작가는 이 낙엽을 자루에 담아 전시 공간으로 가져와 바닥에 깐다. 그 위에 닥 펄프 철모들이 줄지어 놓인다. 낙엽의 갈색·황색·붉은색이 바닥을 덮고, 그 위에 흰 철모들이 떠오른다. 이 시각적 구성은 매우 강력하다. 자연의 시간이 정치의 시간을 떠받친다. 매년 떨어지는 낙엽이 한 번에 끝나야 했던 죽음들을 떠받친다.

그러나 이 구성의 의미는 단순한 ‘자연이 정치를 위로한다’의 의미가 아니다. 만약 그런 의미였다면 이 작업은 감상적 작업이 되었을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그런 감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낙엽은 단지 위로의 매체가 아니라, 흡수의 매체이다. 비무장지대 안에 떨어진 낙엽은 70년 넘게 그 자리에 쌓여 부엽토가 되어 왔다. 그 부엽토 안에 군인들의 흔적이 함께 묻혔다. 녹슨 철모, 부서진 무기, 흩어진 단추. 자연이 정치를 흡수해 자신의 한 부분으로 만들었다. 흡수는 위로와 다르다. 흡수는 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안으로 가져간다는 의미이다. 자연은 정치를 잊지 않고, 자신의 안에 가지고 들어간다.

작가가 낙엽을 매체로 사용할 때, 그는 이 흡수의 매체적 본성을 정확히 살린다. 낙엽 위에 놓인 철모는 마치 그 낙엽이 그 철모를 안에 가지고 들어가려는 듯한 형상을 이룬다. 낙엽은 단지 바닥재가 아니라, 흡수의 주체이다. 작가가 비무장지대에서 발견한 녹슨 철모의 자리—낙엽 위—를 그대로 전시장에 옮겨 온 것이다. 그러나 그 옮겨옴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발견의 자리의 매체적 본성을 살린 재구성이다.

또한 굴참나무 낙엽은 후각적 매체이기도 하다. 자루째 가져와 바닥에 깔린 낙엽은 그 자체로 가을 산의 냄새—흙냄새, 마른 잎의 냄새, 약간의 곰팡이 냄새—를 풍긴다. 시각 예술이 후각의 매체를 끌어들이는 일은 흔치 않지만, 작가의 설치에서는 이 후각이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관객은 시각으로만 작품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후각으로도 만난다. 그 후각은 ‘비무장지대의 가을’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시공간을 관객의 코로 끌어들인다. 시각의 거리감과 후각의 직접성이 동시에 작동한다. 관객은 작품을 보는 동시에 비무장지대를 호흡한다.

4-6. 매체의 다층성—한 사물 안에 겹쳐진 시간들

지금까지 다룬 두 매체—닥 펄프와 굴참나무 낙엽—는 작가의 매체 사용의 한 본질을 보여 준다. 그것은 ‘한 사물 안에 여러 시간이 겹쳐 있게 한다’는 본질이다. 닥 펄프 철모는 다음의 시간들을 한꺼번에 머금는다. 첫째, 6.25 전쟁이라는 과거의 시간. 둘째, 그 전쟁에서 죽은 어린 군인의 생애의 시간. 셋째, 그 군인의 가족이 그를 잃은 뒤 살아가야 했던 시간. 넷째, 그 철모가 비무장지대의 낙엽 아래 묻혀 70년을 지나온 시간. 다섯째, 작가가 비무장지대 GP에서 군 복무를 한 시간. 여섯째, 작가가 그 철모를 발견하고 캐스팅을 결심하기까지의 시간. 일곱째, 닥나무의 껍질이 펄프로 만들어지기까지의 시간. 여덟째, 그 닥 펄프가 거푸집에 부어져 굳어지는 시간. 아홉째, 굳어진 철모가 전시장에 놓여 관객에게 보여지는 시간. 열째, 그 철모가 닥 펄프라는 매체의 보존성에 따라 앞으로 천 년을 견딜 시간.

열 가지의 시간이 한 사물 안에 겹쳐져 있다. 관객이 그 사물을 볼 때, 관객은 단지 ‘닥 펄프 철모 하나’를 보는 것이 아니다. 관객은 그 사물 안에 겹쳐진 열 가지 시간을 동시에 만나고 있다. 이 다층성이 작가의 작업이 가진 두께의 정체이다. 표면은 단순하지만, 그 표면 아래에 시간의 여러 결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마치 한 가옥의 벽지가 여러 겹으로 덧발려진 것처럼.

이 다층성은 작가의 작업이 단순한 ‘정치 미술’이나 ‘기억 미술’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까닭이기도 하다. 단순한 정치 미술은 한 가지 메시지를 한 가지 시간 안에 담는다. ‘지금 이 정치가 잘못되었다’는 메시지를 ‘지금’이라는 시간 안에 담는다. 단순한 기억 미술은 한 가지 과거를 한 가지 시간 안에 담는다. ‘그때 그 일이 있었다’는 과거를 ‘과거’라는 시간 안에 담는다. 그러나 작가의 작업은 한 사물 안에 여러 시간을 동시에 담는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 사물 안에서 서로 만난다. 그 만남이 작가의 작업의 비평적 깊이를 만든다.

4-7. 매체의 가난함—절제된 재료의 윤리

비평가 허정선은 작가의 작업에 대해 "잡다한 재료들을 동원하지 않고, 반드시 필요한 재료들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여 표현 형식을 정제시킴으로써 전시의 의미를 매우 압축적으로 담아낸다"고 정리했다. 이 정리는 작가의 작업이 가진 또 다른 본질을 정확히 가리킨다. 그것은 ‘매체의 가난함’이다.

작가가 사용하는 매체는 많지 않다. 닥 펄프, 굴참나무 낙엽, 미사일 모형, 신문지, 문서 세단기, 흙, 재, 벼, 소금, 네온 튜브, 영상, 사운드. 이 정도가 작가의 매체 목록의 거의 전부이다. 이 매체들은 또한 한 작품 안에 몇 가지씩 묶여 사용되지, 모든 매체가 한꺼번에 등장하는 일은 거의 없다. 한 작품 안에는 닥 펄프 철모와 낙엽과 영상이 함께 등장할 수 있고, 다른 작품 안에는 미사일 캐스팅과 신문지와 문서 세단기가 함께 등장할 수 있다. 매체의 조합은 신중하게 결정된다.

이 가난함은 매우 의도된 가난함이다. 동시대 설치 미술의 한 경향은, 가능한 한 많은 매체를 한 공간 안에 끌어들여 ‘몰입적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빛, 바닥에서 올라오는 안개, 벽에서 진동하는 사운드, 한 모퉁이에서 흐르는 영상—이 모든 것이 한 공간 안에 합쳐져 관객을 ‘환경 자체’로 끌어들이는 방식. 이런 방식은 강력한 인상을 남기지만, 종종 그 인상의 강도에 의해 작품이 가진 의미가 흐려지는 일도 일어난다. 너무 많은 자극이 동시에 들어오면, 관객은 그 자극을 처리하는 데만 집중하게 되어, 자극 너머의 의미에 닿지 못한다.

작가는 이 ‘많음의 함정’을 피한다. 그가 사용하는 매체는 항상 한정되어 있고, 그 한정된 매체 사이에서 의미가 발생하도록 작업을 짠다. 닥 펄프 철모 30개와 굴참나무 낙엽 한 자루와 야간 촬영 영상 하나—이 세 가지 매체만으로 〈그 경계에 서서—비무장지대〉의 한 설치가 완성된다. 더 많은 매체를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도 작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매체의 가난함이 의미의 풍부함을 가능하게 한다.

이 가난함의 윤리는 작가의 작업 주제와 깊이 연결된다. 전쟁은 풍부함의 사건이 아니라 가난함의 사건이다. 전쟁 안에서 인간은 매우 적은 것만을 가지게 되고, 매우 적은 것에 의지하게 된다. 한 사람의 가난한 짐 가방 안에 들어 있는 것들—몇 장의 사진, 한 권의 책, 한 줌의 흙—이 그 사람의 생애 전체를 함축한다. 작가의 작업은 이 가난함의 미학을 그대로 자신의 매체 사용에 적용한다. 적은 매체로 많은 시간을 머금는 작업. 이것은 매체의 윤리적 절제이다.

5장. 매체의 도감—작가가 사용하는 사물들의 비평적 분류

5-1. 매체 분류의 필요

작가가 사용하는 매체를 한 번 정리해 보자. 단순한 목록이 아니라, 각 매체가 작가의 작업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따라 분류해 보자. 이 분류는 작가의 작업을 비평적으로 이해하는 한 도구가 될 것이다.

매체는 크게 다섯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생명의 매체—굴참나무 낙엽, 벼, 흙, 재. 둘째, 인간의 매체—닥 펄프 철모, 닥 펄프 미사일. 셋째, 정보의 매체—신문지, 문서 세단기, 영상, 사운드. 넷째, 빛의 매체—네온 튜브, 특수 조명. 다섯째, 건축의 매체—모형(롯데타워, 원전), 가변 설치. 이 다섯 갈래는 서로 분명한 경계를 가지면서도, 한 작품 안에서 종종 두세 갈래가 함께 사용된다.

각 갈래의 매체를 차례로 들여다보자.

5-2. 생명의 매체—굴참나무 낙엽, 벼, 흙, 재

생명의 매체는 한 자연적·생명적 순환의 한 단계를 가리킨다. 굴참나무 낙엽은 한 나무의 한 해 끝, 벼는 한 식물의 결실, 흙은 모든 식물의 어머니, 재는 모든 생명의 끝이다. 이 네 가지가 작가의 작업 안에서 함께 등장한다.

흙과 재의 사용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서울 불바다—핵 전쟁 반대〉(2025)에서 작가는 롯데타워의 모형을 흙과 재 위에 세웠다. 흙은 도시의 바닥이고, 재는 그 도시의 미래의 한 가능태이다. 핵 전쟁이 일어나면 도시는 재가 된다. 그 재를 미리 도시의 바닥에 깔아 두는 것이, 작가가 미래를 미리 현재로 끌어오는 방식이다. 사진 자료—이미 일어났던 핵폭발의 사진 자료—와 모형이 함께 놓이면서, 과거의 핵폭발과 미래의 핵폭발이 같은 한 평의 공간 안에서 만난다.

벼의 사용은 〈탈원전〉(2023)에서 등장한다. 원전 모형 곁에 놓인 벼와 소금. 벼는 한국 농경 문화의 가장 기본적인 작물이며, 그 식량적 의미는 매우 크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의 농산물에 대한 방사능 오염 우려가 한국에까지 전파된 일이 있었다. 벼는 그러므로 ‘오염될 수 있는 식량’의 환유이다. 소금은 식량의 보존을 위해 사용되는 물질이지만, 동시에 바닷물의 오염을 가리킬 수 있는 물질이기도 하다. 후쿠시마 오염수의 해양 방출 논쟁이 있었던 시기에 만들어진 이 작업은, 벼와 소금이라는 가장 일상적인 매체를 통해 가장 정치적인 주제를 다룬다.

이 매체들의 공통점은 ‘일상의 매체’라는 점이다. 농촌에서 매일 보던 사물들, 매일 먹던 사물들, 매일 쓰던 사물들. 이런 사물들이 작가의 작업 안에서 정치적·역사적 매체로 다시 호명된다. 일상의 매체가 정치의 매체로 변하는 자리에서, 일상이라는 자리 자체가 얼마나 정치적인 자리인가가 드러난다. 우리가 먹는 쌀이 어디서 자랐는가, 우리가 쓰는 소금이 어느 바다에서 왔는가, 우리가 밟고 다니는 흙이 무엇을 흡수해 왔는가. 이런 질문들이 일상의 매체를 통해 던져진다.

5-3. 인간의 매체—닥 펄프 철모와 닥 펄프 미사일

닥 펄프 철모에 대해서는 이미 길게 다루었다. 그것은 죽은 자의 그릇이고, 한국적 매체이며, 캐스팅이라는 매체적 결단의 결과이다. 그런데 작가는 같은 닥 펄프 매체로 미사일을 캐스팅하기도 한다. 철모와 미사일은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사물이지만, 같은 매체로 캐스팅된다. 이 동일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사일은 전쟁의 가장 첨예한 무기이고, 그 자체로 죽음의 매개체이다. 그러나 작가가 닥 펄프로 캐스팅한 미사일은 더 이상 죽음의 매개체가 아니다. 그것은 닥지의 따뜻한 흰빛을 가진, 손으로 만지면 부드러운, 떨어뜨려도 위험하지 않은 사물이다. 닥 펄프라는 매체가 미사일의 본성—단단함, 차가움, 위험함—을 정반대로 뒤집는다. 이 뒤집기는 의도된 뒤집기이다.

작가는 미사일을 만들 수 있는 매체로 닥 펄프를 선택함으로써, 미사일이라는 사물의 본질에 대해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미사일은 본래 그 단단함과 차가움과 위험함을 가져야만 하는 사물인가. 미사일을 따뜻한 흰빛의 부드러운 사물로 만들 수는 없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매체적 유희가 아니다. 그것은 미사일이라는 사물이 인간의 결단—단단함·차가움·위험함이라는 결단—의 결과일 뿐, 그 외 다른 사물로 만들어질 수도 있었다는 가능성에 대한 환기이다. 우리가 미사일을 단단한 금속으로 만든 까닭은, 우리가 그것으로 누군가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다른 결단이 가능했다면 미사일은 다른 사물이 되었을 것이다. 닥 펄프 미사일은 그 ‘다른 결단’의 한 형상이다.

〈그 경계에 서서—NO WAR〉(2022)에서 닥 펄프 미사일은 신문지에서 잘린 전쟁 기사들과 함께 놓인다. 신문지는 매일의 전쟁을 매일 보도하는 매체이고, 그 보도가 쌓이면 한 두께의 종이 더미가 된다. 미사일은 그 보도들이 가리키는 사건의 한 매개체이고, 그것도 종이—닥 펄프—로 만들어졌다. 정보의 종이와 사물의 종이가 한 공간 안에서 만난다. 문서 세단기는 그 종이들을 자르는 도구이다. 매일의 전쟁 기사를 자른다는 것은, 그 전쟁의 의미를 잘라 무력화한다는 행위인가, 아니면 그 전쟁의 자취를 잘게 흩뿌려 모두에게 닿게 한다는 행위인가.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

5-4. 정보의 매체—신문지, 영상, 사운드

정보의 매체는 작가의 작업에서 매우 중요한 한 갈래이다. 신문지에서 잘려 나온 전쟁 기사, 비무장지대의 전투기 영상, 야간 촬영 영상, 전투기 소리, 그리고 〈별이 되다〉의 사운드. 이 매체들은 모두 ‘한 사건을 전달하는 매체’이다.

신문지는 가장 오래된 정보 매체 중 하나이다. 종이 위에 인쇄된 글과 사진. 작가는 이 신문지에서 전쟁 기사 부분만을 잘라 내어 자신의 설치 안에 포함시킨다. 이 잘라냄은 매우 직접적인 비평적 행위이다. 작가는 매일의 신문에서 ‘전쟁’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부분을 잘라 모아, 그것이 얼마나 많은가를 보여 준다. 매일의 신문에는 전쟁이 있다. 우크라이나, 가자, 시리아, 예멘, 미얀마, 콩고. 끊임없이 전쟁이 보도되고, 그 보도가 신문 한 면씩을 차지한다. 그 면들을 한 자리에 모으면, 매일의 전쟁이 한 두께를 이룬다. 그 두께가 곧 ‘전쟁이 만든 용적률’의 한 가시적 형태이다.

영상은 작가의 설치에서 ‘움직이는 시간’을 가져온다. 닥 펄프 철모는 정지된 사물이고, 굴참나무 낙엽은 정지된 사물이다. 그 정지된 사물들 사이에 영상이 흐른다. 비무장지대의 전투기 영상, 야간 촬영 영상. 영상은 그 자체로 시간을 가진 매체이며, 그것이 정지된 사물 사이에 들어오면 전체 설치에 시간의 흐름을 부여한다. 관객은 정지된 사물을 보다가 영상을 보고, 다시 정지된 사물로 시선을 옮긴다. 그 시선의 이동이 곧 작품의 시간성이 된다.

특히 야간 촬영 영상은 작가의 작업이 ‘낮의 미술’이 아니라 ‘밤의 미술’임을 분명히 한다. 비무장지대는 본래 24시간 감시의 공간이다. 낮에도 밤에도 감시가 계속된다. 그러나 ‘밤의 비무장지대’는 그 특별한 시간성—적외선 카메라로 본 흑백의 영상, 동물들의 움직임, 적의 동향—을 가진다. 작가는 이 밤의 시간성을 자신의 설치 안에 가져온다. 닥 펄프 철모의 따뜻한 흰빛이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모습은, 영상의 야간성과 호응한다. 어둠을 바탕으로 한 흰빛—이것이 작가의 작업 전체를 가로지르는 한 시각적 어휘이다.

사운드는 가장 비물질적인 매체이지만, 가장 직접적으로 관객의 몸에 닿는 매체이기도 하다. 전투기 소리는 단순한 ‘배경음’이 아니다. 그것은 관객의 몸을 진동시키고, 관객으로 하여금 ‘비무장지대에 있다’는 감각을 거의 물리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별이 되다〉의 사운드—그것이 정확히 어떤 사운드인지는 자료에서 충분히 알 수 없으나, 작품 제목과 함께 추정해 보면—는 죽은 자들이 별이 되어 가는 어떤 우주적 시간성을 청각적으로 펼쳐낸다.

5-5. 빛의 매체—네온과 특수 조명

〈DMZ〉(2020)는 네온관 작업이다. 14mm 굵기에 3.170x70x6cm 크기. 네온 튜브가 만든 한 줄의 빛이 어두운 공간 안에 떠 있다. 이 작업은 작가의 매체 사용 가운데 다소 이질적인 자리에 있다. 닥 펄프나 굴참나무 낙엽 같은 ‘시간이 흡수된 자연적 매체’가 아니라, 가스가 봉입된 유리관에 전기가 흘러 빛을 내는 ‘인공적·산업적 매체’이다. 그러나 이 이질성이 오히려 의미 있다.

비무장지대는 자연이 자라난 자리이면서 동시에 가장 인공적인 자리이기도 하다. 70년 넘게 사람이 들어가지 못해 자연이 회복된 한편으로, 그 경계선은 인간이 만든 가장 엄격한 인공의 선이다. 자연성과 인공성이 한 자리에서 만나는 것이 비무장지대이다. 작가의 매체도 그 자리를 따라간다. 닥 펄프·낙엽이라는 자연적 매체와 네온이라는 인공적 매체가 작가의 설치 안에서 만난다.

네온의 빛은 또한 그 자체로 ‘선’의 매체이다. 작가의 회화에서 다루어진 점·선·면의 ‘선’이, 설치에서는 네온의 한 줄로 다시 등장한다. 14mm의 가는 유리관이 한 줄의 선을 그린다. 그 선은 어둠을 가로지른다. 작가는 이 한 줄의 선으로 ‘DMZ’라는 글자—혹은 어떤 형상—를 그려 낸다. 회화의 추상적 선이 설치에서 글자의 선으로 구체화된다.

특수 조명은 다른 설치들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별이 되다〉(2023)의 특수 조명은 정지된 철모 모형들 위에 별빛을 내려 보내, 그 철모들이 ‘별이 되어 가는’ 시각적 사건을 만든다. 조명의 색채, 강도, 각도가 모두 작가의 정밀한 결단의 대상이다. 흰빛의 닥 펄프 철모가 푸른 조명 아래에 놓이면 다른 사물이 되고, 붉은 조명 아래에 놓이면 또 다른 사물이 된다. 〈서울 불바다〉(2025)에서는 붉은 조명이 핵폭발의 광휘를 환기한다. 조명은 단순한 ‘작품을 비추는 기능’이 아니라, 작품의 한 부분으로서 매체적 결단의 대상이 된다.

5-6. 건축의 매체—롯데타워와 원전 모형

〈서울 불바다—핵 전쟁 반대〉(2025)에서 작가는 롯데타워의 모형을 사용한다. 롯데타워는 한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 중 하나이며, 서울의 한 상징이다. 그 모형이 작가의 설치 안에서 흙과 재 위에 세워질 때, 그것은 ‘서울이 핵 공격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상상의 한 환유가 된다. ‘서울 불바다’라는 표현은 1994년 북한 측에서 사용한 한 위협의 표현이었으나, 작가는 그 표현을 역설적으로 작품 제목으로 사용한다. 그것은 위협의 재인용이 아니라, 그 위협의 가능성에 대한 항의이다.

원전 모형은 〈탈원전〉(2023)에 등장한다. 원전은 평화로운 시기에는 한 국가의 에너지 동력이지만, 후쿠시마 사고가 보여 주었듯이 그 자체로 잠재적 재앙이다. 더욱이 전쟁이 발발한다면 원전은 가장 먼저 공격받을 표적 중 하나이다. 원전 한 곳이 공격받으면 그 일대는 수십 년간 거주가 불가능해진다. 우크라이나 전쟁 중에 자포리자 원전의 운명이 국제적 우려의 대상이 되었던 것을 떠올려 보라. 원전은 평화의 매체인 동시에 전쟁의 매체이며, 작가는 이 이중성을 모형이라는 형식으로 가시화한다.

이 건축적 매체들은 작가의 작업이 단순히 과거의 전쟁—6.25 전쟁—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진행형의 위협, 그리고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발언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닥 펄프 철모가 과거의 죽음을 가리킨다면, 롯데타워 모형은 미래의 죽음의 가능성을 가리킨다. 두 시간성이 작가의 작업 안에서 한 자리에 만난다.

5-7. 매체 사이의 관계—허남문의 매체 문법

지금까지 다섯 갈래의 매체를 따로따로 보았다. 그러나 작가의 작업에서 각 매체는 다른 매체와의 관계 안에서 의미를 가진다. 닥 펄프 철모 하나만으로는 〈그 경계에 서서〉가 완성되지 않는다. 그 철모가 굴참나무 낙엽 위에 놓이고, 그 위에 야간 영상이 흐르고, 멀리서 전투기 소리가 들릴 때, 한 작품이 완성된다. 매체와 매체 사이의 관계가 작품의 본질이다.

이 관계의 문법을 한 번 정리해 보자. 첫째, 자연적 매체와 인공적 매체의 짝짓기. 굴참나무 낙엽과 닥 펄프 철모. 둘째, 정지된 매체와 움직이는 매체의 짝짓기. 닥 펄프 철모와 영상. 셋째, 시각적 매체와 청각적 매체의 짝짓기. 영상과 사운드. 넷째, 과거의 매체와 미래의 매체의 짝짓기. 닥 펄프 철모와 롯데타워 모형. 다섯째, 한국적 매체와 보편적 매체의 짝짓기. 한지(닥 펄프)와 영상.

이 다섯 가지 짝짓기가 작가의 매체 문법이다. 한 작품 안에 다섯 가지가 모두 등장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두세 가지는 항상 작동한다. 이 짝짓기를 통해 작가의 작업은 단일한 매체의 단일한 의미를 넘어, 매체들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더 두꺼운 의미를 만들어 낸다. 그 의미는 어떤 한 매체에 환원되지 않는, 매체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의미이다.

비평가 장미진은 작가의 설치에 대해 "전시 공간의 활용 및 매체의 변용은 이 작가의 감각의 폭과 깊이를 여실하게 보여 준다"고 평한 바 있다. 이 평은 정확하다. 작가의 매체 사용은 단순히 ‘여러 매체를 다 사용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각 매체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매체 사이의 관계를 신중하게 짠다는 차원에서 작가의 감각의 폭과 깊이를 보여 준다. 매체의 ‘변용’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 매체를 그 매체의 본래 자리에 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매체와의 관계 안으로 끌어들여 그 매체의 새로운 가능성을 끄집어낸다. 닥 펄프가 한지의 원료라는 본래 자리에서 ‘죽은 자의 그릇’으로 변용되고, 굴참나무 낙엽이 부엽토라는 본래 자리에서 ‘정치를 흡수하는 매체’로 변용되며, 네온이 광고판의 매체라는 본래 자리에서 ‘비무장지대의 선’으로 변용된다.

이 변용의 능력은 작가의 가장 큰 미적 자산이다. 동시대 미술에서 ‘새로운 매체’를 발명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지만, ‘기존 매체를 새롭게 변용하는 일’은 여전히 가능하다. 작가는 후자의 길을 선택했고, 그 길을 매우 잘 걷고 있다.

6장. DMZ 연작의 안쪽—〈그 경계에 서서〉의 다섯 변주

6-1. 한 제목으로 묶인 다섯 변주

작가의 설치 작업 가운데 〈그 경계에 서서〉라는 큰 제목으로 묶이는 작업이 적어도 다섯 개 있다. 〈그 경계에 서서—비무장 지대〉(2020), 〈그 경계에 서서—비무장 지대〉(2022), 〈그 경계에 서서—NO WAR〉(2022), 〈그 경계에 서서—비무장 지대〉(2021), 〈그 경계에 서서—DMZ〉(2022). 같은 제목의 변주들이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이 집중은 우연이 아니다. 작가의 설치 작업이 가장 농밀하게 성숙해 가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다.

다섯 변주를 한 번 정리해 보자. 첫째, 〈그 경계에 서서—비무장 지대〉(2020). 굴참나무 낙엽, 닥 펄프 철모 캐스팅, 전투기 영상. 가변 설치. 둘째, 〈그 경계에 서서—비무장 지대〉(2022). 굴참나무 낙엽, 닥 펄프 철모 캐스팅, 전투기 영상. 셋째, 〈그 경계에 서서—NO WAR〉(2022). 닥 펄프 미사일 캐스팅, 전쟁 기사 신문, 문서 세단기. 넷째, 〈그 경계에 서서—비무장 지대〉(2021). 굴참나무 낙엽, 닥 펄프 철모 캐스팅, 전투기 소리 및 야간 촬영 영상. 다섯째, 〈그 경계에 서서—DMZ〉(2022). 굴참나무 낙엽, 닥 펄프 철모 캐스팅, 전투기 영상, 가변 설치.

같은 제목, 거의 같은 매체, 그러나 매년 다른 작품. 이 ‘같음과 다름’의 구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한 주제에 대한 깊은 변주이다. 한 작곡가가 한 주제를 가지고 여러 변주곡을 짓듯이, 한 작가가 한 매체 조합으로 여러 변주를 짓는다. 각 변주는 같은 재료를 사용하지만 다른 결과를 낳는다. 매체의 어떤 비율, 매체의 어떤 배치, 매체와 매체 사이의 어떤 시간 차가 한 변주를 다른 변주와 다른 것으로 만든다.

6-2. 첫 번째 변주(2020)—기본 어휘의 정립

2020년 작 〈그 경계에 서서—비무장 지대〉는 작가의 DMZ 연작의 첫 변주로 보아야 한다. 굴참나무 낙엽이 바닥을 덮고, 그 위에 닥 펄프 철모들이 정렬되어 있다. 멀리서 전투기 영상이 흐른다. ‘가변 설치’라고 명시되어 있는 것은, 전시 공간의 크기와 모양에 따라 작품의 정확한 구성이 달라진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핵심 어휘—낙엽, 철모, 영상—는 고정되어 있다.

이 첫 변주에서 작가가 정립한 매체적 어휘는 이후의 변주들에서도 거의 그대로 유지된다. 첫째, 자연의 매체로 바닥을 덮는다. 둘째, 그 위에 인간의 매체—죽은 자의 그릇—를 정렬한다. 셋째, 그 사이에 정보의 매체—영상 또는 사운드—가 흐른다. 이 세 층위의 매체가 한 공간 안에서 작동한다.

세 층위의 매체는 또한 세 가지 시간성을 가진다. 자연의 시간(낙엽의 부엽토화), 인간의 시간(철모의 부재), 정보의 시간(영상의 흐름). 이 세 시간성이 한 자리에서 만날 때, 그 만남의 자리가 곧 비무장지대이다. 비무장지대는 자연이 자라난 자리, 인간이 사라진 자리, 그리고 양국의 감시가 끊임없이 작동하는 자리이다. 작가는 매체적 구성으로 그 자리의 본성을 정확히 재현한다.

6-3. 두 번째 변주(2021)—사운드의 도입

2021년 작에서는 ‘전투기 소리’가 명시적으로 추가된다. 첫 변주에서 ‘전투기 영상’만 있던 자리에, 이제는 ‘전투기 소리 및 야간 촬영 영상’이 들어온다. 영상이 야간으로 바뀌고, 사운드가 추가된다. 이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야간 촬영 영상의 도입은 시각적 톤을 어둡게 만든다. 야간 영상은 적외선이나 저조도 카메라로 촬영된, 흑백에 가까운, 윤곽이 흐릿한 영상이다. 이런 영상은 ‘적의 침투’를 감시하기 위한 영상의 미적 형식을 그대로 가져온다. 관객은 자신이 ‘감시자의 시선’으로 영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둘째, 전투기 소리의 도입은 관객의 청각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다. 시각으로만 작품을 만나던 관객이, 청각으로도 작품을 만나게 된다. 시각은 거리를 두고 작동하는 감각이지만, 청각은 거리를 무시하고 작동한다. 멀리 있어도 들리고, 보이지 않아도 들린다. 전투기 소리는 어디서 나는지 알 수 없는 채로 공간 전체를 채운다. 관객은 자신이 ‘전투기의 위협 아래’ 놓여 있다는 감각을 가지게 된다.

이 두 가지 변화는 작가의 작업이 점점 더 ‘몰입적인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첫 변주에서 작가는 ‘비무장지대를 보여 주는’ 작업을 했다면, 두 번째 변주에서 작가는 ‘관객을 비무장지대 안에 두는’ 작업을 한다. 보여 줌과 두기 사이의 거리는 크다. 보여 줌은 관객을 외부에 둔다. 두기는 관객을 내부에 끌어들인다. 작가의 작업은 보여 줌에서 두기로 점점 이동한다.

6-4. 세 번째 변주(2022 NO WAR)—주제의 전환

2022년의 〈그 경계에 서서—NO WAR〉는 매우 흥미로운 변주이다. 다른 변주들이 ‘비무장 지대’ 또는 ‘DMZ’를 부제로 가진다면, 이 변주만 ‘NO WAR’라는 슬로건적 부제를 가진다. 매체도 다르다. 굴참나무 낙엽과 닥 펄프 철모 대신, 닥 펄프 미사일과 전쟁 기사 신문과 문서 세단기가 사용된다. 같은 ‘그 경계에 서서’의 변주이지만, 이 한 작품은 다른 변주들과 분명히 다른 방향을 향한다.

이 변주에서 작가는 ‘비무장지대’라는 구체적 장소에서 ‘NO WAR’라는 보편적 슬로건으로 시야를 넓힌다. 비무장지대는 한국의 한 특수한 자리이지만, NO WAR는 모든 전쟁에 대한 항의이다. 매체의 변화도 이 시야의 확장을 따라간다. 굴참나무 낙엽은 한국의 자연이지만, 신문지는 어디에나 있는 매체이다. 닥 펄프 철모는 한국 군인의 환유이지만, 닥 펄프 미사일은 모든 미사일의 환유이다. 한국의 매체에서 세계의 매체로의 이동이 한 작품 안에서 일어난다.

문서 세단기의 등장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그것이 작가의 설치 안에 들어와 전쟁 기사를 자른다. 이 자름의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편으로는, 매일의 전쟁 기사를 잘게 자르는 일은 그 기사가 가진 의미를 무력화하는 행위로 읽힐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잘린 조각들이 다시 전시장 안에 흩뿌려진다면, 그것은 그 기사의 자취를 모든 자리에 닿게 하는 행위로 읽힐 수 있다. 자름은 무력화이자 동시에 확산이다.

이 양면성은 ‘NO WAR’라는 슬로건 자체의 양면성과도 닮아 있다. NO WAR는 한 외침으로 발화될 때는 단순한 슬로건이지만, 매일의 전쟁 보도 앞에 놓일 때는 거의 무력한 외침이 되기도 한다. 외치는 사람의 의지는 분명하지만, 그 외침이 실제로 전쟁을 멈추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작가는 이 외침의 무력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외침이 무력화되어 가는 자리—신문 기사가 잘리는 자리—를 작품으로 가시화한다. 외침의 무력함을 외치는 작업. 이 이중성이 〈NO WAR〉의 깊이이다.

6-5. 네 번째 변주(2022 DMZ)—제목의 압축

2022년의 또 다른 변주는 〈그 경계에 서서—DMZ〉이다. 부제가 ‘비무장 지대’에서 ‘DMZ’로 압축되었다. 이 압축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비무장 지대’는 한국어로 풀어낸 표현이고, 한국 사회 안에서 통용되는 이름이다. ‘DMZ’는 그것의 영문 약자이며,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이름이다. 부제의 영문화는 작가의 작업이 국제적 수용을 의식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실제로 작가는 2017년과 2018년, 2024년에 프랑스 파리의 Grand Palais에서 ‘르 살롱전’에 참여한 바 있다. 한국의 비무장지대를 다루는 작가가 프랑스에서 자신의 작업을 보여 주는 일은, 그 자체로 작업의 의미가 한국적 맥락을 넘어 보편적 맥락으로 확장됨을 시사한다. ‘DMZ’라는 약자는 그 확장의 한 표현이다.

매체의 구성은 첫 변주(2020)와 거의 같다. 굴참나무 낙엽, 닥 펄프 철모 캐스팅, 전투기 영상, 가변 설치. 같은 어휘가 다른 부제로 다시 발화된다. 이 ‘같음과 다름’은 작가의 작업이 한 안정된 어휘에 도달했음을 보여 준다. 더 이상 새로운 매체를 도입하지 않아도, 같은 매체의 다른 배치로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이 단계는 한 작가의 작업이 성숙해진 한 분명한 표지이다.

6-6. 변주의 미학—같음 속의 다름

다섯 변주를 종합해 보면, 작가의 DMZ 연작은 변주의 미학에 기반한다. 같은 주제, 같은 매체, 같은 부피이지만, 매번 다른 작품이 된다. 이 변주의 미학은 클래식 음악의 변주곡 형식에 비할 만하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나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이 한 주제로 30여 변주를 만들어 내듯이, 작가는 한 매체 조합으로 다섯 변주를 만들어 낸다.

각 변주는 다른 시기, 다른 장소, 다른 전시장에서 펼쳐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 변주가 다른 변주와 다른 작품이 되는 까닭은 단지 매체의 미세한 차이만이 아니라, 그 변주가 펼쳐진 시공간의 차이이기도 하다. 2020년의 코로나 팬데믹 초기, 2021년의 팬데믹 한가운데, 2022년의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시기. 각 변주가 만들어진 시점의 세계 상황이 그 변주의 의미를 결정한다.

특히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은 작가의 작업의 의미를 한 번 더 두껍게 만든 사건이다. 2020년에는 작가의 ‘비무장지대’가 주로 한국의 분단이라는 구체적 맥락 안에서 읽혔다면, 2022년 이후에는 그것이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전쟁들’과 함께 읽힌다. 우크라이나의 마리우폴, 가자의 칸유니스, 시리아의 알레포—이런 도시들의 폐허가 작가의 비무장지대의 낙엽과 닿는다. 한국이라는 한 좌표의 비극이, 전 세계의 비극의 한 메타포로 확장된다.

6-7. 정렬의 정치학—철모의 배치 방식

DMZ 연작의 다섯 변주에서 닥 펄프 철모들은 ‘정렬’되어 놓인다. 무작위로 흩뿌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줄지어 정렬되어 있다. 이 정렬의 방식은 작가의 매우 의도된 결단이다. 만약 철모들이 무작위로 흩뿌려져 있었다면, 그것은 ‘전쟁의 혼란’이나 ‘죽음의 우연성’을 가리켰을 것이다. 정렬되어 있다면, 그것은 다른 무엇을 가리킨다.

정렬은 군대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이다. 군인은 정렬된다. 죽은 군인은 시신으로 정렬되었다가, 무덤으로 정렬된다. 군 묘지의 비석들이 정렬되어 있는 풍경—한국의 국립묘지나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 프랑스의 베르덩 추모지—은 모든 전쟁 추모의 한 가장 강력한 시각적 어휘이다. 작가의 철모 정렬도 이 어휘 안에 놓인다. 그것은 한 무덤의 정렬이고, 한 추모의 정렬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또한 ‘아직 살아 있는 군인들의 정렬’이기도 하다. 군대의 정렬은 죽음의 정렬이기 전에 삶의 정렬이다. 매일의 군 복무 안에서 군인들은 정렬한다. 점호 시간의 정렬, 식사 시간의 정렬, 행군의 정렬. 작가가 비무장지대 GP에서 직접 경험했을 그 정렬들이, 그의 닥 펄프 철모의 정렬 안에 함께 들어 있다. 살아 있는 군인의 정렬과 죽은 군인의 정렬이 한 자리에서 만난다. 그 만남이 닥 펄프 철모 정렬의 깊이이다.

작가가 한 정렬에 정확히 몇 개의 철모를 놓는가는 매번 다르다. 한 줄로 정렬된 수십 개의 철모를 본 관객은, 그 정렬이 끝없이 이어진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 상상의 끝없음이 곧 수의 무게이다. 한국전쟁 전사자의 수—한국군 약 13만 7천 명, 미군 약 3만 7천 명, 그 외 유엔군, 북한군과 중국군 수십만 명—은 너무 크다. 수십 개의 철모로 그 수를 재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수십 개의 정렬이 가리키는 것은 ‘수의 정확성’이 아니라, ‘수의 무게’이다.

6-8. 가옥에서의 변주 가능성

이번 《전쟁이 만든 용적률》에서 작가가 범일가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DMZ 연작을 어떻게 풀어 낼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비평적 관심사이다. 범일가옥은 화이트 큐브가 아니다. 천장이 낮고, 방이 작고, 마룻장이 삐걱대는 공간이다. 닥 펄프 철모 수십 개를 정렬할 수 있는가. 굴참나무 낙엽 자루를 깔 수 있는가. 전투기 영상을 투사할 만한 벽이 있는가. 이 모든 매체적 조건이 가옥의 조건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 충돌이 곧 새로운 변주의 가능성이다. 가옥에 맞춰진 새로운 변주, 가옥의 두께를 머금은 새로운 변주가 이번 전시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 가옥의 한 방에는 닥 펄프 철모 몇 개만 놓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 방에는 굴참나무 낙엽이 한 자루만 깔릴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한 방에는 영상이 작은 화면으로 흐를 것이다. 이 분할된 변주는 화이트 큐브에서의 통합된 변주와 다른 시간성을 가질 것이다. 관객은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옮겨 가면서, 한 변주에서 다른 변주로 이동한다. 그 이동이 곧 가옥이라는 매체가 새로 만들어 내는 작품의 시간성이다.

7장. 전쟁의 미래형—NO WAR, 핵 전쟁, 그리고 탈원전

7-1. 과거형 전쟁과 미래형 전쟁

지금까지 다룬 DMZ 연작은 주로 ‘과거의 전쟁’—1950년의 한국전쟁—과 그 결과로서의 ‘현재의 분단’을 다룬다. 그러나 작가의 작업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NO WAR〉(2022), 〈서울 불바다—핵 전쟁 반대〉(2025), 〈탈원전〉(2023)은 모두 ‘미래의 전쟁’ 또는 ‘잠재적 전쟁’을 다룬다. 이 세 작업은 과거형 전쟁이 아니라 미래형 전쟁을 향한다.

미래형 전쟁을 미술이 다루는 일은 과거형 전쟁을 다루는 일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과거형 전쟁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고, 그 결과로서의 폐허와 흔적이 있다. 미술은 그 흔적을 다룬다. 미래형 전쟁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고, 그 결과로서의 폐허와 흔적이 없다. 미술은 무엇을 다룰 수 있는가. 작가의 답은 두 가지이다. 첫째, 과거형 전쟁의 흔적을 가져와 미래형 전쟁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둘째, 미래형 전쟁이 일어났을 때 만들어질 폐허를 미리 모형으로 짓는다.

7-2. 〈서울 불바다—핵 전쟁 반대〉(2025)—미래의 폐허를 짓다

2025년 작 〈서울 불바다—핵 전쟁 반대〉는 이번 전시 《전쟁이 만든 용적률》(2026)에 가장 가까운 시기에 만들어진 작업이다. 매체는 공간 설치—롯데타워 모형, 흙, 재, 사진 자료, 특수 조명. ‘서울 불바다’라는 표현은 1994년 북한 측 인사가 사용한 표현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한국 사회에서 핵 위협의 한 상징적 표현이 되었다.

작가가 이 표현을 작품 제목으로 가져올 때, 그것은 단순한 재인용이 아니다. 그것은 그 표현이 가진 위협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에 대해 ‘반대’를 분명히 표명하는 행위이다. ‘서울 불바다’와 ‘핵 전쟁 반대’가 한 제목 안에 같이 들어 있다는 사실—위협의 표현과 그 위협에 대한 반대가 같은 자리에 놓인다는 사실—이 이 작품의 정치적 명료성을 만든다. 작가는 위협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그 가능성에 대해 반대한다.

매체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롯데타워의 모형—서울의 한 상징, 한국 자본주의의 한 상징, 동북아 도시 발전의 한 상징—이 흙과 재 위에 세워져 있다. 흙은 도시의 바닥이고, 재는 그 도시의 미래의 한 가능태이다. 사진 자료는 아마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핵폭발 사진, 혹은 핵 실험의 사진들일 것이다. 특수 조명이 모형 위에 비춰진다.

이 구성은 매우 강력한 시각적 환유이다. 한 도시의 상징이 한 도시의 미래의 폐허 위에 세워져 있는 모습. 시각적으로 그것은 ‘이 빛나는 건물이 곧 재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한 폭의 그림처럼 보여 준다. 미래의 가능성이 현재의 시각으로 가져와진다. 미래의 시간이 현재의 공간으로 응축된다.

7-3. 모형의 미학—1:N 축척이 만드는 의미

〈서울 불바다〉와 〈탈원전〉에서 작가는 ‘모형’을 매체로 사용한다. 롯데타워 모형, 원전 모형. 모형은 실제 사물의 축척 축소품이다. 실물 그대로의 크기가 아니라, 1:100 또는 1:1000 같은 비율로 축소된 사물. 이런 모형의 사용은 어떤 매체적 의미를 가지는가.

첫째, 축소는 사물에 대한 ‘조감’을 가능하게 한다. 실제 롯데타워는 555m 높이이고, 인간이 그것을 한 시야로 담을 수 없다. 가까이서는 일부만 보이고, 멀리서는 전체가 보이지만 디테일이 사라진다. 모형은 그 두 가지를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 전체와 디테일을 한 시야로 본다. 이 조감의 가능성은 ‘이 사물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가’를 상상하기 좋은 조건을 만든다. 실제 건물이 무너지는 일을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모형이 무너지는 일은 쉽게 상상된다. 모형의 축소가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둘째, 축소는 사물의 위엄을 깎는다. 실제 롯데타워는 그 자체로 위엄을 가진 건물이다. 한 도시의 풍경을 압도하고, 그 도시의 가장 큰 권력—자본의 권력—을 가시화한다. 모형의 롯데타워는 그런 위엄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만질 수 있는, 떨어뜨리면 깨질 수 있는 작은 사물이다. 위엄의 소거가 일어난다. 이 소거는 ‘이 위엄이 본래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셋째, 모형은 ‘이미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가리키기 좋은 매체이다. 실제 사물은 ‘이미 거기에 있는 사물’이지만, 모형은 ‘앞으로 어떻게 될 수 있는가’를 상상하게 하는 사물이다. 흙과 재 위에 놓인 롯데타워 모형은 ‘실제 롯데타워가 흙과 재 위에 놓이게 될 수 있다’는 미래의 가능성을 시각화한다.

7-4. 〈탈원전〉(2023)—원전이라는 평화의 매체이자 전쟁의 매체

〈탈원전〉(2023)은 원전 모형, 영상, 벼, 소금으로 구성된 바닥 설치 작업이다. 이 작업은 작가의 작업 가운데 ‘에너지 정치’를 다루는 거의 유일한 작업이다. 그러나 그 에너지 정치가 작가의 다른 작업들과 분리된 별개의 주제가 아니라, 작가의 전체 주제—전쟁의 다양한 형태—의 한 분기이다.

원전은 본래 평화로운 시기의 사물이다. 한 국가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동력원이며, 화석연료를 대체할 수 있는 비교적 청정한 에너지원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원전은 동시에 ‘잠재적 전쟁의 매체’이다. 첫째, 원전 사고가 발생하면 그 일대는 수십 년간 거주가 불가능해진다(체르노빌, 후쿠시마). 둘째, 전쟁이 발발하면 원전은 가장 우선적인 공격 표적 중 하나가 된다(우크라이나의 자포리자 원전). 셋째, 원전의 핵 물질은 핵무기의 원료가 될 수 있다.

작가가 원전을 다루는 까닭은 이 잠재성에 있다. 원전은 평화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전쟁의 잠재태이다. 이 이중성을 작가는 매체적으로 가시화한다. 원전 모형과 벼와 소금. 벼는 농업, 즉 평화로운 일상의 매체이다. 소금은 식량의 보존, 즉 평화로운 생존의 매체이다. 그 평화로운 매체들 사이에 원전 모형이 놓인다. 평화의 한가운데에 잠재적 전쟁이 놓여 있는 풍경.

이 풍경은 한국의 농어촌 풍경과 닿는다. 한국의 원전은 대체로 동해안과 남해안의 농어촌 지역에 위치한다. 부산 기장, 경주 월성, 영광, 울진, 고리. 모두 농어촌 지역의 옆에 자리한 원전들이다. 농민과 어민의 일상의 한가운데에 원전이 있다. 평소에는 그 둘이 서로 무관하게 작동하지만, 사고나 전쟁이 발발하면 그 둘은 한꺼번에 무너진다. 농민의 벼와 어민의 소금이 한꺼번에 오염된다. 작가의 〈탈원전〉은 이 한꺼번의 무너짐을 미리 시각화한다.

‘탈원전’이라는 단어 자체가 매우 정치적인 단어이다. 한국 사회에서 탈원전은 한 정치적 입장이며, 그에 반대하는 ‘원전 유지’ 또는 ‘원전 확대’의 입장과 끊임없이 충돌해 왔다. 작가가 이 단어를 작품 제목으로 가져올 때, 그것은 한 정치적 입장에 대한 분명한 표명이다. 작가는 미술가로서 정치적 침묵을 지키지 않는다.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한다. 동시에 그 입장은 단순한 슬로건의 표명이 아니라, 매체적 가시화—원전 옆에 벼와 소금이 놓인 풍경—를 통해 발화된다. 정치적 발언과 미적 발언이 동시에 일어난다.

7-5. 핵의 시간성과 분단의 시간성

핵의 정치학에서 가장 무거운 시간 단위는 70년이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이 떨어졌고, 그로부터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자리의 영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1986년의 체르노빌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출입 통제 구역이며, 완전한 회복까지는 수백 년이 더 걸린다. 2011년의 후쿠시마는 아직 십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그 영향이 어디까지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시간 단위는 작가의 작업의 시간 단위와도 닮아 있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으로부터 70여 년이 지났다. 그 70년 동안 분단이 유지되었고, 그 70년 동안 비무장지대 안의 군인의 흔적들이 낙엽 아래 묻혀 갔다. 작가의 닥 펄프 철모가 가리키는 시간 단위는 이 70년이다. 그리고 닥 펄프라는 매체의 보존성이 가리키는 미래의 시간 단위는 다시 천 년이다.

핵의 70년과 분단의 70년이 한 시대 안에 겹쳐 있다는 사실은 한국 현대사의 한 본질을 가리킨다. 한국은 핵의 시대에 분단된 나라이고, 분단의 시대에 핵을 마주한 나라이다. 둘은 서로 무관한 두 사건이 아니라, 같은 한 시대의 두 얼굴이다. 작가의 작업이 〈DMZ〉와 〈탈원전〉과 〈서울 불바다〉를 모두 한 작업 세계 안에 두는 까닭이 이 한 시대성이다. 그 모든 것이 한국 현대사의 한 시간 안에서 작동하는 같은 정치적·역사적 사건의 다른 얼굴이다.

7-6. 분명한 입장과 정련된 매체

작가는 미술의 한 흔한 자세—정치적 입장의 직접 표명을 회피하고, 모호한 비유와 다층적 의미 사이로 숨는 자세—를 따르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한다. NO WAR는 외침이고, 핵 전쟁 반대는 표명이며, 탈원전은 정치적 입장이다. 작가는 이 모든 발언을 매체적 형식 안에서 한다. 슬로건을 직접 외치는 것이 아니라, 매체의 배치로 외친다. 그러나 외친다.

이 외침의 자세는 동시대 미술에서 점점 드물어지고 있다. 많은 동시대 작가들은 정치적 입장의 직접 표명을 회피한다. 그것이 더 ‘세련된’ 자세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세련됨을 추구하지 않는다.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그 분명함이 작품의 미적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매체적 정련에 신경 쓴다. 분명한 입장과 정련된 매체의 결합이 작가의 미래형 전쟁 작업의 한 특징이다.

8장. 〈별이 되다〉—애도의 형식, 이름 없는 자들의 별

8-1. 한 제목의 무게

〈별이 되다〉(2023)는 작가의 작업 가운데 가장 시적인 제목을 가진 작업이다. ‘별이 되다’라는 한국어 관용 표현은 매우 깊은 함의를 가진다. 그것은 한국어에서 죽음을 가리키는 가장 따뜻한 표현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별이 되었다’고 말할 때, 그 말 안에는 죽은 자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위안, 죽은 자가 어떤 빛으로 남아 있다는 믿음, 죽은 자를 우러러 본다는 자세가 함께 들어 있다. 이 표현이 작품의 제목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작가가 죽음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대한 한 가지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작가는 죽음을 외면하지 않는다. 작가의 작업 전반이 죽음을 다룬다. 그러나 작가의 죽음 다룸은 죽음의 끔찍함을 강조하는 방식이 아니다. 작가의 죽음 다룸은 죽음 이후를 따뜻하게 응시하는 방식이다. 죽은 자가 별이 된다는 시적인 환원이, 그 응시의 방식을 한 마디로 응축한다. 죽음은 사라짐이 아니라 다른 자리로의 옮겨 감이고, 그 옮겨 간 자리에서 죽은 자가 산 자를 비춘다는 환원이다.

8-2. 매체 구성—설치, 영상, 사운드, 특수 조명

이 작업의 매체 구성은 ‘설치, 영상, 사운드, 특수 조명’이다. 핵심 사물은 ‘공간 설치/철모 모형, 낙엽, 흙’이다. 익숙한 매체들—철모, 낙엽, 흙—이 다시 등장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매체들이 ‘별이 되다’라는 제목 아래에서 다시 배치된다. 같은 매체가 다른 제목 아래에서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것이 연작의 힘이다.

자료의 사진으로 확인되는 한에서, 이 작업은 푸르스름하고 붉은 특수 조명 아래에서 진행되는 듯하다. 닥 펄프 철모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그 위로 어떤 영상이 투사된다. 영상의 내용은 자료만으로는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짐작컨대 별의 영상, 밤하늘의 영상, 혹은 빛의 추상적 움직임일 가능성이 있다. 영상이 무엇이든, 그 영상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빛’으로 기능할 것이다. 위에서 내려오는 빛이 아래의 철모들 위에 비친다. 별이 사라진 자들의 외피 위에 빛을 내려놓는다.

이 구성은 작가의 〈그 경계에 서서〉 연작과 비슷하면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 경계에 서서〉가 ‘그 경계에 서 있는 자’의 시선—즉 살아 있는 자의 응시—을 다룬다면, 〈별이 되다〉는 ‘그 경계 너머로 간 자’의 자리—즉 죽은 자의 자리—를 다룬다. 살아 있는 자의 응시와 죽은 자의 자리. 두 작업이 같은 매체로 두 가지 다른 차원을 다룬다.

8-3. ‘별이 되다’의 한국적 시학

‘별이 되다’라는 표현은 한국어 안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은 죽음을 가리키는 여러 표현—세상을 떠나다, 돌아가시다, 영면하시다—가운데서도 가장 부드럽고 시적인 표현이다. 이 표현은 한국인들이 죽음을 어떻게 위안의 형식으로 견뎌 왔는가의 한 흔적이다.

별이 된다는 환원이 가능한 까닭은, 별이 가진 두 가지 특성 때문이다. 첫째, 별은 멀리 있다. 우리가 손에 잡을 수 없고, 우리가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다. 죽은 자도 그러하다. 둘째, 별은 빛난다. 그 멀리에서 우리에게 빛을 보낸다.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자가 그럼에도 우리를 비춘다. 죽은 자도 그러하다. 죽은 자는 멀리 있지만 우리를 비춘다. 이 두 특성이 죽은 자와 별을 같은 자리에 놓을 수 있게 한다.

작가가 ‘별이 되다’를 작품의 제목으로 가져온다는 것은, 한국적 죽음 의례의 한 시학을 자기 작업 안으로 가져온다는 뜻이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다양하다. 어떤 작가는 죽음의 끔찍함을 강조하고, 어떤 작가는 죽음의 무의미함을 강조하며, 어떤 작가는 죽음을 정치적 책임의 문제로 다룬다. 작가는 이 가운데 어느 한 방식만을 택하지 않고, 한국의 일상적 죽음 의례—‘별이 되었다’고 말하는 그 일상적 위안의 의례—를 자기 작업의 한 축으로 삼는다. 이는 작가의 작업이 ‘예술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일상의 자리’와 연결된다는 뜻이다. 예술이 일상의 죽음 의례와 연결될 때, 그 예술은 더 깊고 더 멀리 간다.

8-4. 익명의 별들—이름 없이 죽은 자들

작가가 ‘별이 되다’의 주어로 다루는 것은 누구인가. 평론가 허정선의 글을 다시 인용하면, 그것은 "6·25 전쟁 당시 어린 나이에 이름도 없이 죽어간 병사들"이다. 이름 없이 죽은 자들. 가족도 모르고 역사도 모르는 자들. 이런 자들이 별이 된다.

이름이 있는 자가 별이 된다는 표현은 흔하다. 한 가족이 자기 가족의 죽음을 두고 ‘별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름이 없는 자가 별이 된다는 표현은 흔치 않다. 이름이 없는 자는 누가 그 별을 우러러 보는가? 자기 가족도 자기를 모르는 자, 자기 이름도 잊혀진 자, 자기가 어디에 묻혔는지도 알 수 없는 자—그런 자가 별이 된다면, 누가 그 별을 응시하는가?

작가의 답은 ‘예술이 그 별을 응시한다’는 것이다. 한 가족이 응시하지 못하는 별을, 한 역사가 기록하지 못하는 별을, 한 비석에 새겨지지 못하는 별을, 예술이 응시한다. 예술의 자리는 그러므로 ‘가족 없는 죽음, 역사 없는 죽음, 비석 없는 죽음’의 응시 자리이다. 이런 자리에 있는 자가 바로 작가이다. 작가는 그 응시의 책임을 자기 작업으로 진다.

이런 책임의 자세는 단순한 추모를 넘어선다. 추모는 ‘기억하라’는 명령형이다. 작가의 자세는 명령이 아니라 응시이다. 작가는 ‘기억하라’고 외치지 않고, ‘이렇게 응시한다’고 보여 준다. 그 보여 줌이 곧 한 가지 응시의 모범이다. 관객이 그 모범을 보고 자기 자신의 응시를 시작할 수 있다. 응시의 전염, 응시의 확산. 이런 방식의 추모가 가장 깊은 추모이다.

8-5. 〈별이 된 철모〉—이름의 분리

자료에 따르면 〈별이 된 철모〉라는 작품도 있다. 〈별이 되다〉의 한 변주이다. 이 작품은 단일한 매체—붉은색을 띈 한 점의 철모 형상—를 보여 준다. 자료의 사진으로는 명확한 해석이 어렵지만, 그것은 한 점의 철모가 별이 되었다는 사실의 가장 단순한 시각화일 가능성이 있다. 무리 가운데 한 점이 떨어져 나와 별이 된다. 익명적 무리 안에서 한 점이 어떤 색채로—붉은 색채로—분리되어 자기 자리를 가진다.

이런 분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리 안에 있는 한 점은 한 개인의 환유이다. 그 무리가 익명적이라 해도, 그 무리는 결국 익명적인 한 개인들의 모임이다. 한 점이 분리되어 별이 된다는 환원은, 그 익명의 한 개인이 자기만의 자리를 가진다는 진술이다. 익명 가운데서도 한 개인이다. 군집 가운데서도 한 자리이다. 이 환원은 매우 정치적이다. 우리는 흔히 비극을 다룰 때 ‘수십만 명이 죽었다’ ‘수백만 명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수십만, 수백만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합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명씩, 한 별씩이다. 〈별이 된 철모〉는 그 한 명 한 명의 자리를 환기시킨다.

이런 환기는 작가의 작업이 가진 한 가지 핵심적 윤리이다. 작가는 통계를 다루지 않는다. 작가는 한 점을 다룬다. 한 점에서 출발해서 그 한 점이 가리키는 더 큰 영역으로 나아간다. 〈그 경계에 서서〉의 닥 펄프 철모들이 줄지어 늘어선 구성도 사실은 한 점 한 점의 모임이다. 작가는 결코 ‘무리’를 한 덩어리로 다루지 않는다. 무리 안의 한 점 한 점을 각각 만든다. 같은 매체로 만들어진 같은 형태이지만, 한 점은 한 점이다. 그 한 점이 한 사람이다.

8-6. 빛의 매체—별의 빛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별이 되다’를 매체적으로 어떻게 환원할 것인가의 문제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별은 매우 멀리 있는 빛이다. 그 멀리 있음을 한 평의 전시 공간에서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 작가의 답은 ‘위에서 내려오는 빛’과 ‘아래의 정지한 사물들’의 조합이다. 빛은 위에 있고, 사물은 아래에 있다. 둘 사이의 거리가 ‘멀리 있음’을 환원한다.

이 거리의 환원은 매우 정밀한 환원이다. 만약 빛이 사물에 가까이 닿아 있으면, 그 빛은 ‘별의 빛’이 아니라 ‘조명의 빛’이 된다. 빛과 사물 사이에 분명한 거리가 있어야, 그 빛이 ‘멀리서 내려온 빛’이 된다. 작가의 〈별이 되다〉에서 영상은 천장 가까이 투사되고, 그 영상의 빛이 멀리 떨어진 바닥의 철모들 위에 닿는다. 두 자리 사이의 공기, 즉 작품의 공간 그 자체가 ‘별과 우리 사이의 거리’의 환원이 된다.

특수 조명이 만들어 내는 색채—붉고 푸른 색채—는 별의 색채와 닿아 있다. 실재의 별은 흰빛이거나 미세한 색조를 띤 빛이지만, 작가의 별은 분명한 색채를 가진 별이다. 이는 작가가 ‘별’을 그대로 재현하려 하지 않고, ‘별이 됨’의 한 정서를 매체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붉은 별은 따뜻한 별이고, 푸른 별은 차가운 별이다. 죽은 자의 별은 따뜻해야 하는가, 차가워야 하는가. 작가는 둘 다라고 답한다. 죽은 자의 별은 죽은 자에 대한 그리움(따뜻함)과 죽음 그 자체의 사실(차가움)을 동시에 가진다. 한 점의 별 안에 두 색채가 함께 있다.

8-7. 사운드의 자리

〈별이 되다〉가 사운드를 매체로 사용한다는 사실은 자료에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 사운드가 어떤 종류의 사운드인가는 자료만으로 확정하기 어렵다. 비무장지대 연작의 전투기 사운드와는 분명히 다른 종류일 것이다. 별이 되었다는 사실에 전투기 사운드는 어울리지 않는다. 짐작컨대 그 사운드는 매우 낮고 길게 깔린 베이스, 혹은 단순한 한 음의 지속음, 혹은 자연음—바람 소리, 물 소리—일 가능성이 있다.

어떤 사운드든, 그 사운드는 작품의 공간 안에서 ‘침묵의 두께’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완전한 침묵은 작품의 정서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완전한 침묵 안에서 관객은 자기 자신의 잡음—기침, 발걸음, 옷자락의 소리—을 의식하게 된다. 그 자기 의식이 작품의 응시를 방해한다. 매우 낮은 베이스가 깔리거나 자연음이 미세하게 흐를 때, 관객의 자기 잡음이 그 사운드 안에 묻힌다. 관객은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않게 되고, 작품의 정서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사운드의 역할은 이런 ‘자기 의식을 풀어 주는’ 역할이다.

이런 사운드의 사용은 매우 세련된 사용이다. 사운드가 직접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으면서도, 작품의 정서를 만들어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작가의 다른 작업들—전투기 사운드를 사용하는 작업들—도 같은 원리로 작동하지만, 그쪽은 사운드가 위협을 직접 환원한다. 〈별이 되다〉의 사운드는 위협이 아니라 ‘정적의 두께’를 만든다. 정적이 두꺼워지면, 그 안에서 별의 빛이 더 분명하게 떠오른다.

8-8. 위안의 가능성

〈별이 되다〉가 가장 깊이 발화하는 것은 ‘위안의 가능성’이다. 작가의 다른 작업이 위협, 분단, 죽음, 폭력의 시간성을 다룬다면, 〈별이 되다〉는 그 모든 시간성 끝에 남는 한 가지 가능성—위안—을 다룬다. 죽은 자가 별이 되었다는 환원은 위안이다. 그 위안이 가능한가? 그것은 거짓 위안이 아닌가?

작가의 답은 ‘거짓 위안과 진짜 위안 사이에 분명한 구분이 있다’는 것이다. 거짓 위안은 죽음을 부인하는 위안이다. 죽은 자가 죽지 않았다고, 죽은 자가 어디엔가 다시 살아 있다고, 죽음은 사실 슬픈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위안이 거짓 위안이다. 작가는 그런 위안을 주지 않는다. 작가의 작업 안에서 죽은 자들은 분명히 죽었다. 닥 펄프 철모의 빈 자리는 분명히 그 머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작가는 죽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진짜 위안은 죽음을 인정하면서 그 죽음 안에서 한 가지 의미를 발견하는 위안이다. 죽은 자가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빛을 남겼다는 사실은 발견될 수 있다. 그 빛이 별이다. 별은 죽은 자의 부활이 아니라 죽은 자의 유산이다. 그 유산을 우러러 보는 일이 가능하다. 작가의 〈별이 되다〉가 발화하는 위안은 그런 종류의 진짜 위안이다.

이번 전시 《전쟁이 만든 용적률》에서 〈별이 되다〉가 차지할 자리는 매우 중요하다. 다른 작업이 ‘전쟁이 만든 부피’의 어두운 차원을 보여 준다면, 〈별이 되다〉는 그 부피의 끝에서 한 가지 빛을 보여 줄 수 있다. 모든 부피가 어둠은 아니다. 모든 흔적이 무게는 아니다. 어떤 흔적은 빛이고, 어떤 부피는 별이다. 이 전시가 어둠으로만 끝나지 않게 하는 것이 〈별이 되다〉의 역할일 것이다. 비평가는 이 작품이 전시 동선의 어느 자리에 놓일 것인가를 매우 깊은 관심으로 본다. 마지막 자리, 출구 직전의 자리에 놓이면, 관객은 별의 빛을 가슴에 안고 가옥을 나선다. 그 빛이 가옥 바깥의 일상으로 이어진다.

9장. 모더니즘과 동시대성—허남문의 자리

9-1. 한국 미술사의 한 좌표

작가의 작업을 한국 미술사 안에 자리매김하려면 어떤 좌표가 필요한가. 평론가 허정선은 작가가 "탈모던과 모던의 경계에 서 있다"고 정리했다. 이 정리는 매우 정확하다. 작가는 모더니즘 회화의 어휘와 매체적 절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어휘를 동시대적 설치와 매체 융합으로 확장한다. 두 영역의 어휘를 함께 가지고 있다.

한국 모더니즘 회화의 한 갈래—특히 단색화—는 1970년대 이후 한 시대를 풍미했고, 이후의 한국 미술사 안에서 끊임없이 다시 논의되어 왔다. 한지, 마, 광목, 면 캔버스 위에 무채색 안료를 반복적으로 바르거나 새기거나 닦아 내는 작업들이 한 흐름을 만들었다. 이 흐름은 한국 추상 미술의 한 정체성을 만들어 냈고, 21세기 들어서는 국제 미술 시장에서도 주목받았다. 그러나 단색화의 한계도 분명하다. 그것은 매체의 절제를 극단으로 밀고 가면서 정치적·역사적 발언의 자리를 좁혔다. 한 시대의 매체적 정련을 이루었지만, 그 정련이 시대의 정치와 직접 연결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

한국 동시대 미술의 한 갈래는 단색화의 그 한계를 메우기 위해 설치, 미디어, 사회 참여로 옮겨 갔다. 이쪽의 작업들은 정치적·역사적 발언을 분명히 하지만, 매체적 정련의 정도가 단색화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두 흐름이 분리되어 있었다. 단색화가 매체적 정련을 가지지만 정치적 발언이 약하고, 동시대 설치가 정치적 발언을 가지지만 매체적 정련이 약한 분리. 이런 분리가 한국 동시대 미술의 한 구조적 특징이었다.

9-2. 두 흐름의 다리—허남문의 자리

작가의 자리는 이 두 흐름 사이의 다리이다. 그는 단색화 계열의 매체적 정련—한지·닥 펄프·점·선·면·색채의 절제—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대 설치의 정치적 발언—DMZ, NO WAR, 핵 전쟁 반대, 탈원전—을 한다. 두 흐름의 강점을 함께 가지고, 두 흐름의 약점을 메운다. 매체적 정련을 잃지 않으면서 정치적 발언을 하고, 정치적 발언을 하면서도 매체적 정련을 유지한다.

이런 자리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작가가 매체와 발언 사이의 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단색화는 매체를 ‘발언이 아닌 것’으로 다루었다. 매체의 절제 그 자체가 곧 그 작업의 의미였다. 동시대 설치는 매체를 ‘발언의 도구’로 다루었다. 매체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작가는 그 사이의 다른 자리를 찾는다. 매체가 발언이지만, 그 발언이 명제적 발언이 아니라 흔적의 발언이다. 닥 펄프 철모는 ‘죽음을 반대한다’는 명제를 전달하지 않는다. 닥 펄프 철모는 ‘여기에 사라진 자가 있었다’는 흔적의 진술을 매체 자체로 발화한다.

이런 매체-발언의 새로운 관계는 작가의 가장 결정적인 미술사적 기여이다. 그는 한국 모더니즘 회화의 어휘와 한국 동시대 설치의 어휘를 하나의 매체적 체계 안에 통합한다. 이 통합이 단순한 절충이 아니라 새로운 종합이 되는 까닭은, 두 어휘가 서로를 부정하지 않고 서로를 더 깊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모더니즘 회화의 정련이 동시대 설치의 정치적 발언을 더 정련된 발언으로 만들어 주고, 동시대 설치의 정치적 발언이 모더니즘 회화의 매체적 정련에 시대적 의미를 부여한다. 둘이 서로를 살려 준다.

9-3. ‘매체 융합 예술’이라는 명명

평론가 허정선은 작가의 작업을 "동시대 예술(contemporary art)의 매체 융합 예술"이라고 명명했다. 이 명명은 정확하지만, 이 글의 비평적 자리에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갈 필요가 있다. ‘매체 융합’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순히 여러 종류의 매체를 한 작품에 사용하는 것을 매체 융합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매체 융합은 여러 매체가 한 작품 안에서 서로 융합되어 새로운 매체적 효과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매체 융합이 일어나는 방식은 어떠한가. 닥 펄프 철모와 굴참나무 낙엽이 한 공간에 놓일 때, 두 매체는 단지 병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닥 펄프 철모만 놓여 있다면 그것은 한 점의 형태이다. 굴참나무 낙엽만 깔려 있다면 그것은 한 자루의 자연이다. 두 매체가 함께 놓이면, 닥 펄프 철모는 ‘비무장지대 바닥의 사라진 자’가 되고 굴참나무 낙엽은 ‘사라진 자가 누운 바닥’이 된다. 두 매체의 의미가 서로의 옆에서 변화한다. 이런 의미의 상호 변화가 매체 융합이다.

여기에 영상과 사운드가 더해지면 한 차원이 더 늘어난다. 정지한 매체와 흐르는 매체가 융합된다. 사물과 시간이 융합된다. 한 시대의 흔적과 그 시대가 지금 어떻게 이어지는가의 시간성이 한 공간 안에서 융합된다. 이런 다층적 매체 융합이 작가의 설치 작업이 가진 깊이의 한 원천이다. 매체가 많기 때문에 깊은 것이 아니라, 그 매체들이 서로를 변화시키는 방식이 정밀하기 때문에 깊다.

9-4. ‘현대인의 망각된 종교와 예술’—원향의 환기

평론가 장미진은 작가의 작업을 "현대인의 저변에 ‘망각된 종교와 예술’처럼 잠재되어 있는 원향의 이미지를 새삼 떠올려 준다"고 평했다. 이 평은 매우 시사적이다. 작가의 매체들—닥 펄프, 황토, 굴참나무 낙엽—은 한국인의 원향적 매체이다. 원향은 사람이 처음 살았던 자리, 사람의 가장 기본적 매체가 형성된 자리이다. 한국인에게 한지의 결, 황토의 무게, 낙엽의 부엽토 냄새는 원향의 매체이다.

‘망각된 종교와 예술’이라는 표현은 이런 원향의 매체가 현대인의 일상에서 잊혀졌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우리는 한지보다 인쇄지를, 황토 벽보다 콘크리트 벽을, 낙엽 깔린 길보다 아스팔트 길을 더 자주 만난다. 원향의 매체들은 우리의 일상 안에 잠재되어 있지만 표면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작가의 작업은 이 잠재된 원향을 다시 표면으로 떠오르게 한다. 원향이 떠오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어떤 자리—종교적이라고도 예술적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자리—를 다시 만난다.

이런 원향의 환기가 작가의 작업이 가진 또 한 차원의 깊이이다. 작가의 작업은 정치적 발언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의 작업은 우리의 원향을 환기시킨다. 정치와 원향이 한 작품 안에서 만난다. 분단과 한국적 매체가 한 작품 안에서 만난다. 이런 만남이 가능하기 때문에, 작가의 작업이 단순한 정치 미술의 자리에 갇히지 않는다. 정치를 다루지만 원향에 닿는 작업, 원향에 닿지만 정치를 잊지 않는 작업. 두 자리를 동시에 가지는 작업이 작가의 작업이다.

9-5. 평론가의 시선—국제적 좌표

허남문의 자료에는 프랑스 평론가 파트리스 드 라 페리에르의 글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작가의 작업이 한국 미술사 안에만 자리하지 않고 국제적 좌표 안에서도 논의되어 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작가가 파리의 그랑 팔레와 그랑 팔레 에페메르의 살롱전에 여러 차례 참가한 이력이 자료에 명시된다. 한국적 매체와 정치적 발언을 동시에 가진 작가의 작업이, 국제적 좌표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의 문제는 매우 흥미로운 비평적 문제이다.

라 페리에르의 평은 작가의 매체 사용과 색채 사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전통적인 재료와 현대적인 창작에의 영감을 결합시켜, 관람객에게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상상력이 작품의 선에서 뿜어내는 힘과 전달력이 뛰어난 역동성을 각인시켜 탄생시킨 제작물들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을 창조하는 작품들을 구현해 내기에 이른다." 이 평에서 주목할 점은, ‘전통적 재료’와 ‘현대적 영감’의 결합, 그리고 그 결합이 만들어 내는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프랑스 평론가가 한국 작가의 작업에서 본 것은 한국적 매체의 동시대적 재발화이고, 그 재발화가 만들어 내는 공간성이다.

이는 작가의 작업이 ‘한국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으면서도 한국적 매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의 국제적 확인이다. 한국 작가가 국제 무대에서 한국적 매체를 사용할 때 흔히 빠지는 두 가지 함정이 있다. 하나는 그 매체를 ‘이국적 매체’로 전시하는 함정이고, 다른 하나는 그 매체를 너무 동시대적으로 다루어 한국적 매체의 결이 사라지게 하는 함정이다. 작가는 두 함정을 모두 피한다. 그의 한지·닥 펄프는 이국적 매체로 전시되지 않는다. 그의 매체는 또한 동시대적 어휘 안에서 정련되지만, 그 정련 안에서도 한국적 매체의 결이 분명하다. 두 함정 사이의 좁은 길을 작가는 자기 발걸음으로 걷는다.

9-6. ‘색채의 광채’—라 페리에르의 다른 한 평

라 페리에르는 작가의 색채에 대해서도 평한다. "독특한 광채와 특히 강렬한 삶을 부여하기 위해 색채 작업을 한다. 그는 선별되고 채택된 상이한 뉘앙스들, 생동감 있고 눈부신 빛깔들, 다양한 뉘앙스를 주기 위해 깊고 밝은 검정 컬러를 사용할 때조차, 캔버스 위의 완성된 조각을 통해 생동감이 나타나며 그 바탕 재료는 마치 작가가 작품 표면을 스크래치하고, 흠집을 낸 듯, 할퀸 듯한 모습으로 표현함으로써 더 생생하고 활발해진 세계에 대한 비전, 직관을 마치 구리판에 새겨 넣은 작업처럼 다뤄진다." 이 평은 작가의 회화에 초점을 맞춘 평이지만, 그 안에 매우 중요한 한 가지 관찰이 있다.

‘스크래치하고, 흠집을 낸 듯, 할퀸 듯한 모습’이라는 표현. 이는 작가의 캔버스 표면이 단순한 색면이 아니라, 어떤 흔적을 가진 표면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 흔적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만든 흔적이다. 캔버스의 표면을 매끈한 채로 두지 않고, 그 위에 흠집과 할퀸 자국을 남긴다. 이 자국이 색채의 광채와 결합한다. 광채가 매끈한 표면 위에서가 아니라 흠집 난 표면 위에서 빛난다. 광채가 평온한 색면이 아니라 상처 입은 색면 위에서 빛난다.

이런 표면의 처리는 작가의 작업이 가진 한 가지 깊은 함의를 보여 준다. 빛은 평온한 자리에서가 아니라 상처 난 자리에서 비로소 빛난다. 별이 평온한 하늘이 아니라 어두운 하늘에서 빛나듯이, 작가의 색채도 매끈한 표면이 아니라 흠집 난 표면에서 빛난다. 이 미학은 작가의 설치 작업과도 연결된다. 닥 펄프 철모의 외피가 매끈하지 않다. 굴참나무 낙엽이 정돈된 사물이 아니다. 흙과 재가 정리된 매체가 아니다. 모든 매체가 어떤 흔적, 어떤 상처, 어떤 균열을 가지고 있다. 그 흔적 위에서 작품의 의미가 떠오른다.

9-7. 동시대성의 자리

‘동시대성’(contemporaneity)은 한국 미술 비평의 한 핵심 개념이다. 동시대 미술이 단순히 ‘현재의 미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기 의식—자기가 어느 시대의 어느 자리에 있는지를 자각하는 의식—을 가진 미술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동시대성은 단순한 시간적 좌표가 아니라 자기 의식적 좌표이다.

작가의 작업은 분명히 동시대적이다. 그 동시대성의 자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작가는 자기가 어느 미술사적 흐름 안에 있는지를 의식한다. 단색화 계열과의 친연성, 매체 융합 예술과의 친연성을 분명히 의식한다. 둘째, 작가는 자기가 어느 정치적·역사적 좌표 안에 있는지를 의식한다. 분단의 좌표, 핵 시대의 좌표, 한국 현대사의 좌표를 의식한다. 셋째, 작가는 자기가 어떤 매체적 자원을 가지고 있는지를 의식한다. 한국적 매체의 자원, 닥 펄프와 황토와 낙엽의 자원, 그리고 영상과 사운드와 같은 동시대 매체의 자원을 의식한다.

이 세 가지 의식이 한 작품 안에서 동시에 작동할 때, 그 작품이 동시대적이 된다. 작가의 작업은 이 동시대성의 자리를 정확히 점유한다. 그러나 작가의 동시대성은 동시대 미술의 흔한 한 가지 함정—자기 의식이 자기 과시로 흐르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작가는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의식하지만, 그 의식을 작품 안에서 과시하지 않는다. 작품은 의식의 결과를 침묵 안에서 드러낸다. 이런 침묵의 동시대성이 작가의 작업이 가진 한 가지 미덕이다.

9-8. 한국 미술사의 ‘앞으로의 한 페이지’

작가의 작업을 한국 미술사 안에 자리매김할 때, 그 자리매김은 단지 ‘현재의 한 자리’가 아니다. 그것은 ‘앞으로의 한 페이지’이기도 하다. 작가의 작업이 보여 주는 매체-발언의 새로운 관계, 모더니즘과 동시대성의 새로운 종합, 한국적 매체의 새로운 정치적 발화 가능성은, 앞으로의 한국 미술이 어느 방향으로 갈 수 있는가에 대한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한국 미술은 모더니즘의 매체적 정련과 동시대 설치의 정치적 발언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그 가능성을 작가가 자기 작업으로 보여 준다.

이번 《전쟁이 만든 용적률》은 그 가능성의 한 갱신이다. 이전의 전시들이 작가의 작업을 화이트 큐브의 자리에 두었다면, 이번 전시는 작가의 작업을 옛 가옥의 자리에 둔다. 가옥의 시간성과 작업의 시간성이 만난다. 이 만남에서 작가의 작업이 새로운 한 단계로 나아갈 가능성이 열려 있다. 비평가는 그 가능성을 매우 큰 기대로 기다린다. 가옥과 만난 작가의 작업이 어떤 모습으로 떠오를 것인가, 그 모습이 한국 미술사의 다음 한 페이지에 어떤 글자를 남길 것인가가 이 전시의 가장 큰 비평적 의의이다.

10장. 결론—한 평의 가옥, 한 부피의 시간

10-1. 다시, 용적률

이 비평의 시작은 ‘전쟁이 만든 용적률’이라는 전시 제목의 어색한 결합이었다. 이제 그 어색함이 더 이상 어색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전쟁이 만들어 낸 부피는 도시의 가옥들, 사라진 자들의 외피, 잘려 나간 신문지의 자루, 흙과 재의 무게, 일용할 양식의 작은 더미로 우리 곁에 있다. 그 부피가 한 평의 전시장에 다시 산정되어 놓일 때, 그 산정이 곧 작가의 비평적 행위이다.

작가의 산정은 행정적 산정이 아니다. 한국전쟁의 사망자 수, 분단으로 갈라진 가족의 수, 핵 위협 아래 사는 인구의 수와 같은 행정적 수치를 작가는 다루지 않는다. 그 수치들은 통계청의 자리에 있다. 작가의 산정은 매체적 산정이다. 한 자루의 닥 펄프, 한 모금의 굴참나무 낙엽, 한 점의 흙, 한 줌의 재. 작가는 이 매체적 수량을 가지고 한 평의 전시장에 한 부피를 만들어 낸다. 그 부피가 행정적 수치보다 더 깊이, 더 정확하게 ‘전쟁이 만든 무엇’을 가리킨다.

이런 매체적 산정이 가능한 까닭은, 작가가 매체와 사건 사이의 정밀한 호응 관계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한 점의 닥 펄프 철모는 한 사람의 사라짐을 가리키고, 한 자루의 굴참나무 낙엽은 비무장지대의 한 자리를 가리키며, 한 점의 흙과 재는 미래의 한 폭발을 가리킨다. 매체와 사건이 일 대 일 대응을 이룬다. 이런 대응이 일어날 때, 매체가 곧 산정의 단위가 된다. 작가는 자기 매체의 수량으로 사건의 부피를 측정한다. 이 측정은 정확하지 않지만, 그 정확하지 않음이 곧 사건의 본질에 더 가깝다.

10-2. 범일가옥이라는 자리—한 가옥의 응답

이 전시가 범일가옥에서 열린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이 가옥은 100년 가까운 시간을 견뎌 왔다. 식민기 적산 가옥에서 시작해, 한국전쟁기 피란민의 거처를 거쳐, 산업화 시대의 셋방으로, 그리고 오늘날의 전시 공간으로 변용되어 온 시간. 그 시간 동안 이 가옥은 한국 현대사의 거의 모든 굴곡을 자기 안에 새겨 왔다. 가옥의 마룻장, 기둥, 벽지, 천장에는 그 시간의 두께가 그대로 남아 있다.

작가의 작업이 이 가옥 안에 들어가면, 두 종류의 두께가 만난다. 가옥의 시간 두께와 작품의 매체 두께. 두 두께는 같은 종류의 두께이다. 시간을 흡수한 매체. 사건을 머금은 사물. 가옥과 작품이 같은 종류의 사물이 되어 한 자리에 선다. 가옥이 작품의 배경이 아니라, 가옥과 작품이 함께 ‘이 전시’를 구성한다.

이런 구성은 매우 동시대적인 구성이다. 화이트 큐브의 시대가 끝난 뒤, 동시대 예술은 전시 공간 자체를 작품의 한 매체로 사유하는 길을 걸어 왔다. 그러나 모든 비-화이트 큐브 전시가 자동적으로 비평적 자리에 서는 것은 아니다. 가옥과 작품이 같은 종류의 사물이 되어 함께 발화하기 위해서는, 작가도 기획자도 가옥의 시간성을 매체로 다룰 의지와 어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작가의 매체적 어휘—시간을 흡수한 매체에 대한 깊은 사유—가 이 가옥의 매체적 본성과 같은 종류의 어휘라는 점이 이 전시의 비평적 가능성을 만든다.

10-3. ‘서 있음’의 윤리—다시

작가의 자세를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그것은 ‘서 있음’이다. ‘그 경계에 서서’의 ‘서서’가 그 자세를 가리킨다. 작가는 경계의 한쪽에 서지 않고, 경계의 다른 쪽에도 서지 않는다. 작가는 경계 그 자체에 선다. 경계 그 자체에 서는 일이 곧 작가의 윤리이다.

이 윤리는 매우 어려운 윤리이다. 우리는 모두 어느 한쪽에 서기를 요구받는다. 정치적 좌표 안에서 어느 한쪽에 서지 않으면 우리는 ‘회피하는 자’가 된다. 그러나 작가의 ‘서 있음’은 회피가 아니다. 그것은 양쪽 모두를 동시에 응시하는 자리에 머무는 일이다. 한 쪽에서 다른 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두 쪽 사이에서 두 쪽 모두를 보는 일. 이런 자세는 예술가만이 취할 수 있는 자세이다. 정치인도, 행정가도, 기자도 이런 자세를 취하기 어렵다. 예술가는 자기의 매체를 통해 이런 자세를 취할 수 있다. 작품 안에서 양쪽이 동시에 가시화될 수 있고, 그 가시화를 본 관객이 양쪽을 동시에 응시할 수 있다.

이런 ‘서 있음’의 윤리가 가지는 정치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국 현대사의 분단을 어느 한쪽의 입장에서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단 자체를 한 평면 위에서 응시하는 자세이다. 단죄는 결말을 만들지만, 응시는 책임을 만든다. 단죄가 끝나면 다른 단죄가 시작되고, 단죄의 연쇄가 끝나지 않는다. 응시는 끝나지 않으면서 책임을 키운다. 우리가 응시한 만큼 우리가 책임진다. 작가의 ‘서 있음’은 그 응시-책임의 자세이다.

10-4. 한 작가의 한 생애와 한 전시

마지막으로 한 작가의 한 생애에 대해 말해야 한다. 작가 허남문은 1990년대 초반부터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작업을 이어 왔다. 도올 아트타운(1994)에서 시작해 청년작가상, 대구미술인상을 받았고,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서울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입주, 원주 갤러리원, 그리고 부산까지 전국을 가로지르는 전시 이력을 만들어 왔다. 국제적으로는 파리의 그랑 팔레 살롱전에 여러 차례 참가했다. 회화에서 시작해 설치·미디어·사운드의 매체 융합으로 작업의 폭을 넓혀 왔고, 비무장지대 군 복무 경험이라는 강력한 개인적 동기로 자신의 매체를 정련해 왔다.

이런 한 생애의 작업이 이번 《전쟁이 만든 용적률》에 결집된다. 회화 SPACE 연작, 설치 〈그 경계에 서서〉 연작, 〈별이 되다〉, 〈서울 불바다〉, 〈탈원전〉이 모두 한 가옥의 한 평면 위에 다시 모인다. 한 작가의 30년이 한 가옥의 한 달 안에 압축된다. 이 압축이 단순한 회고가 아닌 까닭은, 그 30년의 작업이 지금 시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분단은 끝나지 않았고, 핵 위협은 더 깊어졌으며, 동아시아의 긴장은 더 두꺼워졌다. 작가의 작업이 가리킨 모든 흔적과 위협이 지금 시점에서 더 분명하게 보인다. 그러므로 이 전시는 회고가 아니라 다시-읽기이다. 한 작가의 작업을 지금 다시 읽는 일.

비평가는 그 다시-읽기의 한 자리에 자기 글을 놓는다. 5만 자에 가까운 이 글은 한 작가의 한 전시에 대한 한 가지 응답이다. 그 응답이 정답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응답이 진지한 응답이라는 사실은 분명히 할 수 있다. 작가가 자기 매체로 발화한 흔적의 진술에, 비평가는 자기 글의 길이로 응답한다. 진술과 응답이 한 자리에서 만난다.

10-5. 관객을 위한 짧은 안내

이 비평을 닫기 전에, 이 전시를 방문할 관객을 위한 짧은 안내 한 줄을 남기고 싶다. 범일가옥에 들어서면, 그곳에 한꺼번에 모든 것을 보려 하지 마시기를 바란다. 작품 한 점 한 점을 충분한 시간 동안 응시하시기를. 닥 펄프 철모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굴참나무 낙엽이 어떻게 깔려 있는가, 영상이 어디에서 흐르는가, 사운드가 어떤 음으로 깔려 있는가를 한 가지씩 알아 두시기를. 그러고 나서 작품들 사이를 천천히 걸으시기를. 걸으면서 자기 발 아래의 가옥의 마룻장 소리를 들으시기를. 가옥의 천장이 얼마나 낮은가, 가옥의 벽이 얼마나 두꺼운가를 손으로 느껴 보시기를. 그 가옥이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무엇을 보아 왔을지를 생각해 보시기를.

이 모든 것이 한 자리에서 만나는 한 시간을 가지시기를. 그 시간이 짧지 않기를. 작품과 가옥이 함께 만든 한 부피, 즉 ‘전쟁이 만든 용적률’의 한 자락이 당신의 몸을 잠시 둘러싸기를. 그 둘러쌈이 당신에게 어떤 침묵, 어떤 응시, 어떤 ‘서 있음’을 남기기를. 그 남김이 가옥을 나선 뒤 부산의 거리로 이어지기를. 부산의 산복도로, 부산의 옛 골목, 부산의 항구가 사실은 모두 ‘전쟁이 만든 용적률’의 한 자락이라는 사실을, 가옥을 나선 당신의 발걸음이 다시 발견하기를.

작가는 한 평의 가옥 안에서 한 부피의 시간을 만들어 놓을 것이다. 비평가는 그 한 부피의 시간이 한 도시의 시간과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보아 두려고 했다. 관객은 그 한 부피의 시간을 자기 몸으로 겪으러 올 것이다. 작가-비평가-관객의 삼각형이 한 가옥의 한 달 안에서 한 번 더 그려진다. 그 삼각형이 그려지는 동안, 한반도의 분단도, 핵의 위협도, 한국 현대사의 무게도 잠시 한 자리에 모인다. 모인 자리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는 그 자리에 함께 선 자만이 안다. 비평가는 그 자리의 바깥에서 미리 한 줄을 적어 둘 뿐이다.

전쟁이 만든 부피가 한 가옥에 들어왔다. 한 가옥이 그 부피를 받아들였다. 그 받아들임의 한 달이 시작된다. 이 한 달이 부디 깊고, 부디 길고, 부디 오래 남기를. 작가의 작업이 한 도시의 가옥 안에서 한 번 더 별이 되기를. 이름 없이 죽은 자들이 그 별의 빛 아래에서 잠시나마 자기 자리를 가지기를. 그리고 그 빛이 가옥을 나서는 모든 발걸음에 한 줌씩 묻어 가기를.

—2026년 5월, 전시 개막 직전에 적다.


76f9aada18680.jpg


3950be84c5cea.jpg

d2897554ad0b4.jpg

d44b5d986f357.jpg

d98eb4efc773c.jpg

619483d83dcec.jpg

26e7f923af0fe.jpg

2d17dc465a71d.jpg

19a7ee860bc73.jpg

de6fc95bbfbae.jpg





-

예술협회 아이테르 [ AITHER ] 부산전시관


아이테르 AITHER 


부산 갤러리/전시관

- 문화예술기획업


주소: (48737)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로 65번길 21

주차: 진시장 공영주차장

서비스 운영시간: 월-토 10:00~18:00

연락처: 051-977-5272 | sck02145@naver.com | https://aither.kr/

팩스: 0504-322-2379

인스타그램: @aither.kr

유튜브: https://www.youtube.com/@AITHERART


[시설 안내]

4층, 전시 공간

5층, 라운지

6층, 창고



#신진 #작가 #art #artist #artwork #daily #미술 #painting #drawing #작품 #예술 #전시 #아트 #exhibition #일러스트 #서울 #전시회 #contemporaryart #현대미술 #그림 #아티스트 #seoul #조각 #oilpainting #예술가 #설치미술 #gallery #드로잉 #작가추천

b358ae65c6ca8.png